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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영 Oct 25. 2022

체험학습 도시락은 카레입니다

상윤이가 체험학습을 갔다.

체험학습 도시락 최종 선택 메뉴는 카레로 정했다.

작은 보온 죽통 밑에 밥을 깔고 위는 카레로 덮었다.

보온이 오래되라고 미리 보온 죽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 넣어뒀었다.


체험학습을 간다고 할 때부터 '뭐 싸주지?' 고민이 많았다.

김밥, 유부초밥, 볶음밥, 샌드위치 등

다양한 체험학습 도시락 메뉴가 있지만 안 먹고 올게 뻔했다.


우영우처럼 김밥만 먹는 건 아니지만,

"뭐 먹고 싶어?"

물어보면,


"카레!" 아님 "돈가스!"

외쳐댄지 벌써 5달 정도 된 것 같다.


상윤이가 5살 때 다녔던 공립유치원은 체험학습을 참 자주 다녔다.

유치원 전체 체험학습을 자주 나가기도 했거니와

도움반은 도움반 대로 별도로 주 1회는 체험학습을 갔었다.

한 달에 4~5번은 도시락을 쌌던 것 같다.


상윤이의 첫 체험학습에 나는 새벽부터 바빴다.

가지각색 예쁘고 특이한 도시락 메뉴들을 구상하여 검색하며 만들었다.

난생처음 만들어보는 것들이었다.

처음 싸 보았다는 것은 상윤이도 먹어본 적이 없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그렇게 상윤이는 떠났고,

체험학습이 끝나갈 무렵 이제 출발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도시락에 대한 코멘트도 받았다.

'어머니 상윤이가 도시락을 거의 안 먹었어요. 평소에 잘 먹는 걸로 싸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출격 준비를 마치고 원정 나간 2단 도시락은 모두가 부상 흔적 없이 무사히 귀환했다.


내가 싼 도시락은 먹을 사람이 아닌, 보는 사람을 신경 쓴 도시락이었다.

먹을 사람이 좋아하는 메뉴보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쓴 도시락,

오로지 나 이렇게 노력했다고 보여주기 위한 도시락이었을 뿐이었던 거다.


다음 도시락은 상윤이가 잘 먹는 것 위주로 싸주었다.

흰밥과 계란말이와 소시지 계란부침, 스팸과 상윤이가 잘 먹는 과일도 넣고 하다 보니 2단 도시락이 가득 찼다.

'이번에는 잘 먹고 오겠지.'


메시지가 왔다.

'어머니 양이 너무 많아요. 절반 정도만 싸주시면 될 것 같아요.'


먹는 이의 식성은 고려했으나 먹는 양은 고려하지 않았다.

여전히 단출해 보일까 봐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쓴 도시락이었다.


어김없이 체험학습 날은 다가왔다.

이번에는 상윤이가 평소에 잘 먹는 반찬들로 도시락을 구성하였고 

2단이었던 도시락을 1단으로 줄였다.


'이 정도면 이젠 완벽하지. 그런데 애들 가방 자체도 무거운데 이 가방을 들고 다닐 수 있으려나.'

라고 생각했을 때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 상윤이가 밥을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가방이 너무 무거우니 다음부터는 플라스틱 도시락에 담아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들고 다닐 사람의 무게를 고려하지 않은 도시락은 여전히 기각당했다.

그래도 상윤이가 도시락을 다 비우고 온 데서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절치부심 반전의 때가 왔다.

나는 미리 준비해둔 작은 플라스틱 도시락에

상윤이가 좋아하는 반찬들로 상윤이가 먹을 만큼만 싸서 보냈다.

간식도 작은 플라스틱 통에 과자를 소분하여 담아 보냈다.


'어머니, 상윤이가 밥을 다 먹었어요. 양도 딱 좋았어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개운했다.

막혔던 변기가 꾸르르륵 소리를 내며 뻥 뚫리는 것 같이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도시락은 이렇게 싸는 거구나.'

이후 상윤이의 도시락은 늘 깨끗이 비워져 돌아왔고 그럴 때마다 뿌듯함에 기분이 짜릿해짐을 느꼈다.


엄마의 자존감은 별거 아니다.

밥 잘 먹어 주는 것, 그런 사소한 일에도 쉽게 올라가는 게 엄마의 자존감이다.

나의 자존감은 빈 도시락통을 볼 때마다 쑥쑥 자랐다.


그리고 초등학교 첫 체험학습.

상윤이의 도시락은 작은 보온 죽통에 넣은 따뜻한 카레.

단출하지만 상윤이가 가서도 잘 먹고 올 것 같은 메뉴로 정했다.


메뉴를 정해놓고도 여전히 신경이 쓰였다.

다른 친구들은 이런 거 안 싸올 텐데...

먹기 불편하진 않을까...

그냥 김밥을 싸줄까,

볶음밥은 먹지 않을까?


그러나 늘 고민의 결론은 카레로 통했다.


고민의 끝에는 상윤이가 있다.

상윤이가 잘 먹는 것,

상윤이가 먹을 수 있을 만큼,

상윤이가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무게.


상윤이랑 지내다 보면 나는 유독 다른 사람의 시선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괜히 눈치 보게 되고 예민하게 굴게 된다.

남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눈치 보고 위압감을 느끼며 쭈굴쭈굴 쭈구리가 된다.


그래서 더 아등바등 잘해 보이려 노력하고,

나 이렇게 노력하는 엄마라고 보여주길 원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내 자존감은 땅과 한 몸인 것처럼 딱 붙은 껌과 같이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내게 가장 중요한 무엇인지 따져보기로 했다.

나지.

나 빼고,


카레.


답은 금방 나왔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오직 나와 상윤이의 마음이다.

스쳐 지나갈 타인의 시선이나 조롱이 아니라...

나는 보여주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네가 좋아하는 것,

네가 행복해하는 표정,

너의 즐거움이 곧 나의 자존감이 된다.


메시지가 왔다.

'상윤이 밥 다 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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