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응답하라 1988 >
"아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있으면 말해봐. 엄마가 다 사줄게"
"괜찮아요. 먹고 싶은 거 없어요."
광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엄마는 아들과 헤어지는 게 많이 아쉬웠는지 연신 먹고 싶은 게 없냐고 물었다. 나는 버스가 곧 출발할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에 엄마에게 신경질 적으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학생 빨리 타요. 출발 시간 다 됐어요."
버스기사는 룸미러 옆에 걸려 있는 시골 목욕탕에나 있을 법한 동그란 벽시계를 계속 쳐다보며 빨리 타라고 재촉했다. 시곗바늘이 흘러가는 소리가 너무 커서 내 귀에 들리는 건지 아니면 빨리 타야 한다는 나의 급한 마음에 환청이 들리는지 모르지만, 행여 나를 태우지 않고 버스가 출발할까 봐 엄마에게 작별 인사도 못 하고 허둥지둥 버스에 올라탔다.
눈동자를 빨리 굴려 앉을자리를 찾았다. 서울까지 장장 4시간 넘게 버스 안에 있어야 하니 편한 자리를 앉아야 한다. 좁은 버스안에서 편히 가려면 옆 사람이 누구인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두 혼자 편하게 가고 싶어서인지 옆자리에 가방을 놓은 사람도 있고, 아예 노골적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못 앉게 하려는 사람도 있다. 나 또한 배알이 꼴린 사람 옆에 앉기 싫어서 좁은 중앙 통로를 커다란 보자기와 가방을 들고 천천히 지나갔다.
마침 창가 쪽에 앉아 잠을 자고 있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옆자리에 비어 있어서 앉았다. 오랫동안 차를 타야 하기 때문에 창가 쪽에 앉아 바깥 풍경 쳐다보며 가는 것이 그나마 덜 지루한데 어쩔 수 없었다.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를 엄마가 싸주신 정체불명의 보자기를 선반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버스기사는 좌우 백미러를 바쁘게 살피며 천천히 핸들을 돌렸다. 그때서야 나는 엄마와 작별인사도 못 하고 버스를 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고 있는 아주머니의 머리 사이로 버스 창문 밖 엄마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구부정하게 일어서서 창 밖을 쳐다봤다. 그래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어 이상하다. 엄마가 보이지 않네. 벌써 집에 가는 버스를 탔나?"
그럴 리가 없다.
엄마는 내가 탄 버스가 당신 눈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내가 보든 안 보든 손을 흔들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분이셨다. 5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엄마와 아쉽게 헤어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고속버스는 터미널 건물 쪽으로 향한 앞 머리를 완전히 돌려 나가는 출구 쪽으로 돌렸다. 버스기사가 막 액셀을 밟으려는 찰나 버스 꽁무니 쪽에서 엄마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출발하려는 버스와 도착하는 버스들 사이에서 뛰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매우 위험해 보였다.
"기사님 기사님 잠깐만요. 차 좀 세워주세요. 저기 우리 엄마가 막 뛰어오고 있어요."
나는 버스기사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말함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의자 손잡이에 다리를 부딪혀 아픈 줄도 모르고 급하게 앞문으로 뛰어갔다.
"아니 학생 위험해.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차가 멈춘 다음에 움직여야지!"
버스가 멈추자, 엄마는 앞 문을 열어달라고 버스 문을 두드렸다.
"피~쑹~"
버스 문이 열리자마자 급하게 내려가려고 하는 나와 올라가려고 하는 엄마는 서로 몸이 부딪혔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밖으로 나가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고속버스들이 움직이고 있는 사이로 막 뛰어 오시면 어떡해요?"
엄마는 버스 기사의 호통치는 소리와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당신이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아들, 이거 갖고 가"
"이게 뭐예요?"
차 안에서 배고플 때 먹어. 아무도 주지 말고 혼자만 먹어.
서울 가서 밥 굶지 말고 잘 먹고 학교 다니고
"네..."
엄마는 검정 봉다리(봉지)를 안에 뭐가 들었는지 말도 해주지 않고 불쑥 내게 내밀었다.
나는 검정 봉다리를 꽉 쥐고 버스에 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버스기사와 승객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내 옆자리 아주머니는 이미 잠에서 깨어나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아주머니는 몸을 창가 쪽에 바짝 붙여 자기 자리를 더 내주었다. 마음 착한 분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무릎 위에 다소 곳이 놓여 있는 검정 봉다리를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이게 뭘까? 긴 뭔가 들어 있는 것 같은데, 엄마가 배고플 때 먹으라고 했으니 음식 같은데. 오이인가? 이것도 아닌데 오이는 딱딱한데, 이건 말랑말랑 하단 말이야"
봉다리를 열어 안에 뭣이 들었는지 빨리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용물을 확인하고 뭔지 모를 이 음식을 먹기에는 버스 안이 너무 고요했다. 나는 버스 안 승객들이 모두 잠들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고 대신 옆자리 아주머니가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
한 참을 기다렸을까. 아주머니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나는 검정 봉다리를 열었다.
봉다리를 열자
태어나 처음 맡아본 달콤한 냄새가 내 코를 자극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태어나 처음 본 노오란 바나나가 내 눈을 자극했다. 어찌나 그 향이 강했던지 마치 버스 안에 노랗디 노란 바나나 향기가, 엄마의 사랑이 버스 안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봉다리 입구를 막았다. 행여나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 봐서. 먹지도 못할 음식인데 맛있는 냄새만 맡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엄마는
한참 엄마 품이 그립고 엄마가 필요한 어린 나이에 공부를 한답시고 도시로 유학 간 중학교 3학년 아들이
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왔고, 개학날이 다가와 다시 서울로 가는 그 아들이 못내 안타까웠을 것이다.
나는 광주 고속버스터미널 입구에서 TV에서만 보았던 노란 바나나를 처음 보았다. 그리고 엄마는 과일 파는 좌판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애린 마음으로 쳐다봤을 것이다. 아들이 쳐다보는 그것이 무엇이든 당장 사다 주는 엄마는 그것이 값비싼 바나나인 걸 확인하고 많이 망설였을 것이다.
그 당시 바나나는 많이 아주 많이 비쌌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김선영 배우가 마트에서 바구니에 담긴 바나나의 가격(2천 원)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1988년 최저 시급은 462원이었다. 당시 최저 시급으로 하루 종일(8시간) 일해서 3,696원을 벌었으니 2천 원이면 하루를 꼬박 일해야 사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다. 그런데 하루 3천6백 원을 번 사람이 2천 원짜리 바나나를 사 먹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 당시 엄마는 바닷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벌이가 시원찮았다.
그런 엄마는 아들이 눈을 떼지 못하는 바나나를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사지 못했을 것이고, 아들이 버스를 타고 다시 서울로 올라 가려고 할 때 터미널을 뛰쳐나가 그 가게에서 바나나를 사 왔던 것이다.
그 당시 엄마의 나이보다 더 먹은 나는 이 일이 마치 엊그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하다.
기어이 내 손에 쥐어준 그 비싼 바나나를 엄마는 거침없이 몸빼 바지 깊숙이 들어 있는 꼬깃꼬깃한 지패 몇 장을 꺼내 과일장수에게 건네준 엄마의 마음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학생 편하게 먹어. 내 눈치 보지 말고 꺼내서 먹어. 나는 버스 타기 전에 밥을 먹어서 배불러"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아주머니가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불쑥 내게 던졌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검정 봉다리를 만지작만지작하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마음 편하게 먹으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서야 나는 봉다리 안에 들어있는 바나나 한 개를 꺼냈고 아주 조심스럽게 노란 껍질을 벗겼다. 먹으려고 입을 작게 벌리기 전에 이미 바나나의 달콤한 향이 코를 자극했고 뇌가 반응하여 입안에 침이 고여 있었다.
태어나 처음 먹어 본 바나나 한 입의 맛과 향은 내 가슴속 어딘 가에 그때 그 형체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중학교 3학년 어린 나이에 나는 서울에서 외삼촌 댁에서 살았었고, 엄마는 차디찬 새벽 바다 바람맞으며 그런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셨다.
엄마 곁을 떠나 도시에서 홀로 공부하는 아들이 간절히 쳐다보는 그 비싼 바나나를
엄마는 좋아하는 아들의 얼굴 떠올리며 힘들게 번 돈을 '너무 비싸다', '너무 아깝다'는 생각 없이 가차 없이 바나나 값을 지불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과일 중에서 유난히 노란 바나나를 제일 좋아합니다.
베란다 김치냉장고 위에는 항상 세탁소 옷걸이로 만든 걸이에 맛있게 익어 가는 바나나가 걸려 있습니다. 혹여 바나나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초하여 아내에게 빨리 새벽배송으로 바나나를 주문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런 아내는 나의 유별난 바나나 사랑을 잘 알기에 만사 재처 놓고 핸드폰으로 바나나를 주문합니다.
세탁소 옷걸이에 바나나가 주렁주렁 걸려 있지 않으면 내가 불안해하는 이유는 중학교 3학년 때 광주에서 서울 가는 고속버스에서 먹은 바나나의 기억 때문입니다.
그때 버스 안에서 숨 죽이며 먹었던 바나나 맛을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불행히도 나는 그때 그 바나나 그대로의 맛과 향을 그 이후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