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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Z 교장 May 28. 2023

자연산 생선회와 건포도 백설기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는 마음안에 '사람다운 情'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올해 5월은 3일 연속되는 연휴가 두 차례나 있어 무척이나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연휴 모두 오늘처럼 주룩주룩 비가 내려 우리 가족은 실망하고 있답니다.

방구석에 누워 비 내리는 창문을 보니 갑자기 그때 그 일이 생각나 노트북을 켰습니다.







"네 형님. 주말에 어떤 일로 전화하셨어요?"


"김 선생님. 주말에 쉬고 있을 텐데 너무 미안해. 다른 게 아니라 어제 우리 아버지가 바닷바람 쐬고 싶다고 해서 지금 남쪽 바다에 왔어."

"그런데 가족들이랑 저녁식사를 해야 하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식당 문 연 곳이 하나도 없지 뭐야. 마침 여기가 김 선생님 고향이라고 말한 게 생각이 나서, 자기한테 전화했어. 정말 미안한데 우리 아버지 모시고 저녁 먹을 수 있는 식당 없을까? 주말에 쉬는데 미안하네."


"아~ 네 형님. 비가 많이 오나보네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알아보고 바로 연락드릴게요."


지평선 끝자락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주말 저녁.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부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는 부장님이라 형님, 동생 하면서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아무리 친하게 지내는 사이라도 주말 저녁에 급한 일이 아니면 전화하기 힘들었을 텐데, 아버지 모시고 가족들과 처음 가보는 바닷가에서 비가 너무 많이 와 저녁식사를 할 식당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마침 그곳은 내 고향이었고 우리 부모님도 여전히 살고 계셨다.


나는 부랴부랴 시골 아버지께 전화를 했다.


"아부지. 저 필숩니다."


"어 어제도 전화했는디 오늘 뭔 일로 또 전화해부렀냐?"


어제 아버지께 전화로 안부인사를 했는데 또다시 아들로부터 전화가 오자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하셨다.


"네 아부지. 부탁이 있어라. 저기요. 지금 우리 학교 교감 선생님이 아버님 모시고 그곳에 갔는디요. 지금 비가 억수로 많이 와부러갔고, 식당을 못 찾고 있다고 저한테 전화왔단께요. 제가 교감선생님 전화번호 가르쳐드릴 테니 아부지가 괜찮은 식당 좀 찾아서, 교감선생님한테 전화 좀 해주시오."


"어어. 알았다. 걱정하지 말고 있어라."


나는 아버지께 일부러 같은 학교 부장선생님이 아니라 교감 선생님이라 거짓말을 했다. 시골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라고 하면 그냥 선생님, 교감선생님, 교장선생님만 알고 계셨고, 아들이 있는 학교의 교감선생님이라고 하면 말이 필요 없이 그냥 높으신 분이고 잘해드려야 하는 사람으로 알고 계셨다. 이렇게 하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주말 저녁 낯선 바닷가에서 급하게 전화한 형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네 형님. 마침 우리 아버지가 그 근처에 계시다고 하네요. 아마 우리 아버지가 형님한테 식당 알려줄 거예요. 거기 가서 맛있게 드시면 될 겁니다."

"아참~ 이유는 묻지 마시고 제가 아버지한테 형님을 교감 선생님이라고 알려드렸으니 그렇게 알고 계세요."


"아이고 고맙다 고마워. 자네한테 부탁했는데 아버님한테까지 폐를 끼치게 되었네.. 미안하고 고맙네."


부장님은 연신 고맙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날 저녁 늦게 부장님한테 또 전화가 왔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crowdpic.net



"필수야. 자네 아버지가 소개해준 식당으로 가니까, 이미 상이 차려져 있더라. 처음 보는 생선회와 전복, 각종 해산물까지 너무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 우리 아버지도 살아생전에 이렇게 맛있고 싱싱한 회는 처음 먹어본다고 너무 좋아하셨다. 내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하냐?"

" 그리고 필수야 아무래도 이상하다. 식사비를 계산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조금만 받더라고..."


"맛있게 드셨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아마 그 식당이 현지인들이 고깃배로 직접 고기를 잡아서 파는 식당이고 외지인들이 아니라 거기 사는 시골 사람들만 상대로 하는 식당이라 아마 가격이 쌀 거예요."


거짓말이었다.

아버지는 나와 전화를 끊고 인근 식당을 알아보니 비가 많이 와서 모든 식당이 문을 닫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버지 친구분이 하는 식당에 전화를 하여 당신 아들 학교 교감 선생님이 이곳에 왔는데 저녁식사를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미안하지만 아들 손님 좀 받아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시골은 그랬다.

아버지 친구의 아들은 곧 나의 아들인 것이다. 아버지 친구는 바로 가게 문을 열고 얼마 전에 잡아온 자연산 우럭과 갯장어, 전복 등으로 한 상을 크게 차려주셨다. 물론 식사비는 아버지가 나중에 낼 테니 받지 말라고 하셨단다. 그런데 부장님이 식사비를 한사코 내겠다고 해서 조금만 받았다고 한다.


 




나와 부장님만 알고 있는 그날 바닷가에서의 이야기가 있은 지 한 달 후에 부장님의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나는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충청도 시골 장례식장에 갔다.


"필수 왔는가? 이렇게 멀리까지 뭣 하러 왔어?"


"무슨 말씀하세요. 당연히 찾아와야 줘."


"사실은 아버지가 병원에서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어. 그런데 의사말이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정도 사실 것 같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리고 필수야 너무 고마워. 돌아가신 아버지가 당신 막내아들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싱싱한 자연산 회와 전복을 배불리 먹었다고, 그날 이후 친구분들을 만날 때마다 자랑하셨어. 자네 덕분에 내가 고향 어르신들께 효자 소리 듣고 있어. 너무 고마워."


도시에서 선생질하는 막내아들이 죽기 전에 바닷가 구경도 시켜주고 맛있는 자연산 회와 전복도 사줘서 너무 행복하고 좋았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 친구분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잘난 아들 덕분에 뒤늦게 호강했다고 자랑도 하고.


이후로 그 부장님과 나는 각자 다른 학교로 옮기게 되었고 보이지 않으면 멀어진다는 말처럼 1년에 한두 번 가끔 안부만 묻는 사이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김필수 선생님이시죠? 여기 000 떡집입니다. 오늘 오후에 떡 배달 갈 예정입니다. 확인차 전화드렸습니다."


"아 저기요?"


누가 보낸 것인지 물어보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어쩔 수 없이 누가 보낸 지도 모를 떡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공적인 업무 관계로 얽힌 사람이 보낸 떡이라면 다시 돌려보낼 심산이었다.


"교감 선생님 떡배달이 왔습니다.


"아 네. 잠깐만요. 누가 보냈는지 확인 좀 할게요."


나는 떡배달 온 사람을 기다리라고 하고 누가 보낸 건지 확인하였다.


보낸 사람에 '강인수'라고 적혀 있었다.


"어 강인수라면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부장님인데 내가 교감으로 전직(장학사에서 교감으로)한 지는 어떻게 알고 보냈을까?"


나는 핸드폰 연락처에 강인수를 검색했다. 다행히 전화번호는 그대로 있었다. 전화를 하자마자 부장님이 곧바로 받았다.


"어 아우님.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있었지?"


"네 형님. 잘 있었습니다. 혹시 형님이 떡 보내셨습니까?"


나는 다짜고짜 떡을 보낸 분이 맞냐고 물었다.


"어 내가 보냈지. 아는 사람이 자네가 교감으로 승진했다고 하길래. 축하 떡을 보냈지. 진작에 알았더라면 3월 자네가 출근하자마자 보냈을 텐데. 이제야 보냈네."


"아이고. 형님 뭐 하러 이런 걸 보내셨어요. 교감된 게 뭐 큰 일이라고?. 지금 어느 학교에 계세요?"


"그럼 교감된 게 좋은 일이지 뭐야? 우리 같은 선생들은 승진이라면 교감, 교장밖에 없는데 축하할 일이지? 참, 나는 작년에 명예퇴직했어. 지금은 친형 하는 일을 도와주면서 살아?"


"아~ 명퇴하셨군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동안 안부 전화도 못 하고 죄송합니다."


"괜찮아. 나도 똑같이 연락 한 번 못 했는데 뭘. 그나저나 내가 자네 한테 큰 빚을 졌잖아. 그게 너무 고마워서 작지만 떡을 보낸 거야."


"네? 형님이 저한테 뭔 빚을 졌다고 그러세요?"


"15년 전에 내가 우리 아버지 모시고 자네 고향 바닷가에 놀러 갔을 때 말이야.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식당을 못 찾고 헤매고 있을 때 자네가 맛있는 식당을 소개해줬잖아. 그 여행이 우리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여행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연신 나한테 고맙다고 하셨거든."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것만 생각하면 자네가 고마워서 눈물이 나와. 아무튼 지금은 내가 떡만 보냈지만 언제 한 번 시간 내봐. 내가 거나하게 한 잔 쏠게. 이래 봐도 나 교사 때보다 돈 더 많이 벌고 있어."


사실 나는 그날 일을 다 잊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 근무한 부장님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잊어버려도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은 평생을 잊지 못한다고 했던가?


나는 단지 함께 근무하고 있는 친한 형님이 내 고향에 가서 그곳에 살고 있는 아버지께 부탁을 한 정도였다. 아버지 또한 한평생 살고 있는 마을이니 친구 식당에 부탁을 한 것뿐이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가족들이 낯선 바닷가에서 저녁식사를 한 이후 아버지가 한 달 만에 돌아가셨던 일을 당한 형님의 입장에서는 평범한 한 끼 식사가 아니었나 보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어쩌면 평생을 충청도 시골 마을에 사셨던 형님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싱싱한 자연산회를 막내아들로부터 대접받았던 만찬(?)이었는지도...


"네 형님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나중에 한 번 봬요. 연락드릴게요."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이미지



떡은 그냥 떡이 아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백설기였다. 그것도 안에 달달한 건포도가 잔뜩 들어간 백설기였다. 명퇴한 형님은 잊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까만 건포도가 들어간 하얀 백설기를 푸짐히 보낸 것이다.

그날 우리 학교 교직원들은 떡에 담긴 사연을 모른 채 명퇴한 형님이 보낸 떡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 덧붙이고 싶은 말


뒤늦게 '각주로부터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나는 전공과 관련되어 각주에 얽매인 글들을 많이 썼었습니다. 이런 글은 '그 결과에 대한 보람'은 있었지만, 글 쓰는 과정 그 자체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잔뜩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년 10월부터 이곳 브런치에 내가 살아온 발자취를 더듬고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글을 쓰는 두세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막연하게 간직하고 있는 과거의 추억과 시간들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시 살아나 내 삶의 소중한 의미를 주고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https://brunch.co.kr/@yoonteacher/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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