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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os Jul 13. 2023

나의 당근마켓 사용법

혹시 팔렸는지요?

나와 아내는 같은 혈액형이지만 다른 성격을 지녔다. 어떤 상황이 일어났을 때(일어날 것 같을 때) 처리하는 방식이 다르다. 나는 긍정적이고 좋게만 해석하여 기다리는 반면, 아내는 부정적이고 보수적으로 해석하여 준비한다. 그냥 보면 내 성격이 더 좋고 아내는 좋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25년의 결혼생활을 해보니 나의 이런 성격이 항상 좋은 것만 아니라는 것과 아내의 성격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많았다.


보수적으로 해석하여 미리미리 준비하는 아내의 성격은 재테크할 때와 해외여행 갈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아내가 20년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하여 구입하였다. 아내는 부동산 재테크의 전문가처럼 수입과 지출, 대출금 상환 등을 꼼꼼히 계산하여 우리 가족의 미래를 설계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재테크를 위해 기록한 노트가 3권이나 되었다. 물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직장에 열심히 다녔고 자기 계발에만 몰두했다.


신혼 때 딱 한 번 패키지여행을 간 것을 제외하곤 해외여행은 무조건 자유여행으로 갔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말하는 자유여행은 여행사가 아내로 바뀌었을 뿐 아내가 모든 것을 계획하여 가는 여행을 말한다. 그러니까  'wife's package tour'인 셈이다. 코로나 전에 유럽여행을 간 적 있었다. 아내는 이 여행을 위해 몇 달 전부터 준비했는데 하루 일정을 한 시간 단위로 짰다. 몇 시에 일어나서 어디서 무슨 음식을 먹고, 어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목적지에 도착하고, 미리 구입한 입장표로 박물관을 관람하는 등.


아내에게 말은 안 했지만 사실 나는 이런 짜임새 있는 여행보다 바닷가 휴양지에서 맥주 마시면서 책 읽고 수영하는 그런 느긋한 휴가를 더 좋아한다. 언젠가 아내에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신이 이렇게 몇 달 전부터 표 예약하고 여행계획 짜는 거 힘들지 않아?" 그럼 아내는 "나는 여행 가는 것보다 가기 전에 여행 루트를 상상하고 계획하는 게 더 좋아"라고 말한다.


매사에 철저하게 준비하는 성격은 한 가지 단점이 있다. 그건 바로 불가항력적으로 준비한 계획이 틀어졌을 경우다. 우리는 스위스 여행을 마치고 이탈리아 로마로 가야 했다. 이탈리아를 가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스위스 브리그역에서 이탈리아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아내는 마치 블록이 하나씩 순서 대로 넘어져야만 하는 도미노 게임처럼 '스위스 체르마트역에서 브리그역으로 다시 브리그역에서 이탈리아 밀라노로 다시 밀라노에서 로마 테르미니역'으로 이동하는 아내만의 게임을 계획했다. 그런데 스위스 체르마트역에서 브리그역까지 가는 기차가 연착이 된 것이다. 아내가 만든 도미노 게임이 틀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아내는 엄청 불안하고 초초해한다. 시간을 갖고 차분하게 생각해서 결정해야 하는데 극도의 불안감이 아내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상황이 바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내 성격이 진가를 발휘할 때다. 먼저 안절부절 못 하는 아내를 화려한 언변(하얀 거짓말)으로 안심을 시킨다. 그런 후 어찌어찌해서 기차표를 바꿔 이탈리아 로마까지 무사히(?) 데리고 가면 끝난다. 비록 계획했던 시간보다 많이 늦어졌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제야 아내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런 성격을 지닌 아내는 매사에 진지하다. 그래서 유머, 농담 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칫 어설픈 농담을 했다간 오히려 화만 돋우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의심이 많으면서도 일단 신뢰하면 절대적으로 믿는 이율배반적인 성향을 지녔다. 그래서 나는 젊었을 때(내 기준으로 40대 중반까지) 진중한 아내를 즐겁게 웃기기 위해 가끔이지만 이벤트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40대 후반 50대가 되니 이런 이벤트를 하는 것이 힘에 부쳐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나를 두고 아내는 푸념을 했다. "남자는 다 똑같다. 세월이 흐르면 관심도 멀어지고 사랑도 식고..."




그래서 준비했다. 아내의 생일날을 기념하여 색다른 이벤트,  일명 '나의 당근마켓 사용법'이다. 아내는 비싸게 주고 산 아이의 모자를 버리기 아깝다며 당근마켓에 올렸었다. 그런데 채팅으로만 문의할 뿐 정작 구매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속상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당근마켓 회원가입을 한 후 아내와의 접선을 시도하였다. 당연히 아내는 나의 정체를 몰랐다.


"혹시 팔려는지요? 안 팔렸으면 네고 가능할까요?"

나는 '네가 가능여부'를 물으며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였다.


"네~ 네고 가능합니다~ 제가 3시 30분 이후에 메시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3시 30분 이후에 확인 가능하다는 걸 남편인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오후 3시 30분이 되기를 기다린 후 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럼 4개에 만이천 원 가능할까요? 목요일 저녁 괜찮은지요?"

분명 아내는 모자 4개에 만원의 가격을 책정했다. 그런데 나는 만이천 원에 거래 가능한지를 물었다. 이 메시지도 일부러 장난을 친 거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판매자가 책정한 가격보다 더 큰 금액으로 거래를 시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예상대로 매사에 진지한 아내는 깜빡 속아 넘어갔다.


"네 만이천 원 가능합니다~ 목요일 6시 30분 이후 가능합니다~"

남편이니까 당연히 목요일 6시 30분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네 혹시 10분 전에도 도착할 수 있습니다"

10분 전에 도착할 수 있다는 멘트를 보내 의심하지 않도록 하여 완전범죄를 노렸다.


당근에서 모자를 파는 아내와 구매하는 척하는 남편



아내는 그날 저녁 모자를 팔게 됐다며 좋아했다. 그것도 본인이 책정한 가격보다 2천 원을 더 받게 되었다며 기뻐하였다. 그 모자를 산다고 한 사람이 남편인 나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아내에게 미안한 감정이 생기기까지 했다. 자칫 애써 준비한 이벤트가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드디어 약속한 목요일 저녁 6시 30분이 다가왔다. 나는 집 근처 편의점 앞에서 모자값 만이천 원을 넣은 봉투와 작은 꽃다발을 들고 아내를 기다렸다.  드디어 아내가 모자가 든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 나는 잠시 숨어 있다가 두리번두리번 하는 아내를 쳐다보며 모른 척 아내 옆을 지나갔다.


"어~ 자기야! 여기 왜 있어?"

"..."

예상했던 대로 진지한 아내는 내가 모자를 사는 사람이란 걸 몰랐다. 내가 뒤에 숨겨 놓은 꽃다발을 앞으로 내 보이자 그제야 아내는


"설마 당신이?"

"네 제가 모자를 산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자 여기 모자값 만이천 원과 생일축하 꽃 드리니 받아주세요."


아내는 어떻게 자기를 감쪽같이 속일 수 있냐고 화를 내면서도 눈가에 눈물이 맺쳤다. 오랜만에 우리 부부는 인근 포장마차에서 아내가 좋아하는 떡볶이와 어묵, 잔치국수를 실컷 먹으며 생일 파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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