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리와 생존 전략

오리온 맥주보다 와리

by 윤해


자마미섬은 굉장히 뜨겁고 습하다. 한낮에는 내가 가진 모든 멜라민 색소들이 버선발로 마중 나올 만큼 뜨거운 햇살이 내리쬔다. 6월 말의 밤 기온도 30도에 육박하고, 섬이라 뺨이 금세 끈적해진다. 문 밖을 나서면 바로 습해지기 때문에 샤워도 크게 소용이 없었다. 그저 덥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도록 애쓰며 습기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덥고 습한 걸 싫어하는 내가, 어쩌다가 자마미와 사랑에 빠졌을까?


자마미에서 더위를 견디는 팁이 두 가지 정도 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아름다운 바다에 잠수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북이가 아니라 인간이므로 24시간 물속에 있을 순 없으니, 두 번째 방법을 소개해본다.


처음 자마미에 도착한 날, 페리에서 내려 향한 곳은 타코집이었다. 자마미 섬은 여의도의 약 두 배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식당 수가 적어서 예약이 없이는 식당에 방문하기 어렵다는 후기를 들었기에 미리 정해 둔 식당으로 전진했다. 섬이 작아 선착장에서 150미터만 가면 타코집에 닿을 수 있었지만, 그 150미터가 말도 안 되게 더웠다. 주문은 오리온 생맥주! 그리고 타코라이스.


야외 테이블에 앉아 뺨이 실시간으로 익어가고 있었는데 맥주 한 모금에 서서히 가라앉았다. 왜 오키나와에서 오리온 맥주가 흥하게 되었는지 온몸으로 이해되는 순간. 분명 시원한 탄산 거품이 있었는데 사진을 보아하니 받자마자 마셔버린 것 같다.


오리온 맥주가 더위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 줬다면

그 더위 속에 살게 만든 건 '와리'였다.


'와리'는 도수가 높은 술을 물이나 소다에 타서 마시는 방식이다. 위스키 하이볼도 와리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고도수 술을 사랑해서 하이볼은 싫어하는 편이었다. 감히 높은 도수로 태어난 귀한 술에 탄산수를 타다니! 그런데 자마미에 와서 와리를 마시고 와리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와리는 좋은 문화다.


발상을 전환해 보면 알코올과 수분을 한 번에 마실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기분 좋은 아와모리 향은 솔솔 느낄 수 있지만 도수는 낮아서 시원하게 벌컥벌컥 마실 수 있다. 가득한 얼음이 더위에 녹아가는 과정도 와리의 일부다. 자마미의 더위에 얼음이 빠르게 녹아 제법 술 같던 맛에서 미지근한 물 한 잔으로 변한다. 덤으로 잔 표면에 맺히는 송골송골한 물방울조차 기분 좋게 느껴진다.


와리는 다채롭기까지 하다. 목이 마르면 아와모리를 차에 타서 재스민 와리를 마시면 되고 나른할 때는 커피에 타서 커피와리를 마시면 된다. 재스민 와리는 향긋한 진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커피와리는 고소함이 좋고 쌉쌀한 콜드 브루 같았다. 달달하고 녹진한 에스프레소 마티니와는 또 다른 매력이다. 베이스에 따라 달라지는 매력 덕에 안주에 어울리는 와리를 선택하는 재미도 있다.


와리가 없었더라면 이 후덥지근한 섬을 덜 사랑했을 지도, 아니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돌아가서도 와리를 종종 마셔야겠다고 다짐했다. 다만 쾌적한 에어컨 아래에서 그 맛이 날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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