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 30분.
호텔을 나서기 전 잠시 고민했다. 유리를 다시 만나도 될까. 나의 등장은 유리에게 폐만 되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어제 일 중에서 드문드문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봤다. 어제 내가 겪은 그 일은 LSD 같은 환각제를 먹은 사람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 플래시백(마약의 효과가 사라진 후에 다시 경험하는 감각)이었다. 앞으로 또 그런 환각 증세가 나타날 것인지, 나타난다면 언제, 어떤 짓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유리를 만났을 때 나타난 일이었으니 오늘 유리 앞에서 또 그러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
대학 정문에는 오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환하게 갠 날씨만큼이나 학생들의 웃음이 밝았다. 거의 다 내 또래 같았다. 대부분 백인이었지만 동양인 학생들도 꽤 보였다. 유리도 저들처럼 가방을 메고 이곳을 매일같이 지나가겠지. 공부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이모의 가게도 도와주는 유리의 삶. 뭔가 이미 잘 정돈된 것 같은 유리의 삶에 내가 균열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나는 또다시 위축되었다. 처음 유리가 자기에게 꿈이 생겼다고 말할 때의 그 반짝이는 눈빛. 찰나의 섬광이 기억났다.
민준아.
어느새 유리가 곁에 와 있었다.
어, 유리야.
유리는 베이지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굽이 살짝 있는 스킨톤의 샌들을 신고 자그마한 녹색 숄더백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긴 머리칼에서는 코코넛 향기가 났다. 나는 어제 희미하게 느꼈던 유리의 변화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느꼈다.
유리는 자라나 있었다. 내 곁에 있을 때보다 무언가를 더 배웠고, 더 이뤘다. 완성형은 아닐지라도, 나는 아직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어느 지점에 벌써 다다른 것 같았다. 나를 떠나 있던 그 사 년이 유리에게는 성장하는 시간이었겠구나.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 나는 조금 후회되었다.
일단 해명부터 하고 싶어 말을 꺼냈다.
어제 일은...
잠깐.
유리는 나의 말을 부드럽게 막았다.
우리, 저리로 갈까?
유리는 학교 맞은편에 있는 카페를 가리켰다. 나에게 미소를 보이며 유리가 앞서갔다. 유리의 뒤를 따라갔다. 유리와 내가 함께 여러 빵집을 다녔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어디를 가도 항상 손을 잡고 다녔었는데. 손을 잡지 않으면 어깨를 감싸거나 팔짱을 꼈다. 몸의 어느 한 부분이 닿지 않은 채 유리와 걷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앞서 걷는 유리의 팔이 앞뒤로 흔들렸다. 나는 유리 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얗고 가는 그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왠지 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았다.
횡단보도에 이르러 유리가 나를 돌아봤다. 내 마음이 들리기라도 했는지,
민준아, 우리 이렇게 따로 떨어져 걸으니까 조금 이상하다. 그치?
유리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웃지 못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나오지 않았다. 바보같이 유리의 손만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가 손을 내밀면 나는 그 손을 반드시 잡을 것이다. 잡고서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녹색 불이 켜지고 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코코넛 향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유리는 먼저 발걸음을 옮겨 또각또각 길을 건넜다.
카페의 야외 자리에 앉아 유리는 플랫 화이트를, 나는 롱블랙을 주문했다.
호주에 와서 커피 많이 마셔봤어? 유리가 물었다.
응 가끔 마셨어.
맛있지?
응.
오늘은 날씨 정말 좋다. 어제 너 완전 물에 빠진 생쥐였는데.
아, 그랬지. 비가 진짜 많이 오더라.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끊겼으며 의미가 없었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고 사과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종업원이 주문한 커피를 들고 왔다. 음료를 한 모금 마신 유리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햇살이 유리에게로 내리쬐어 유리가 눈을 찡그렸다. 자리를 바꿔주겠다고 했다. 유리는 괜찮다며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냈다. 그녀는 새까만 선글라스를 얼굴에 얹고 씩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어제와 달리 유리에게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어제 일 있잖아.
나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너한테는 정말 솔직하고 싶어. 우리는 늘 그래왔으니까.
유리는 이제 내 입술을 보고 있었다. 유리는 내가 한쪽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말한다고 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때면 입술 끝이 더 올라가 나만의 표정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내가 뭐라고 하는지 다 알 수 있다고. 지금도 그녀는 내가 하지 않은 말을 알 수 있을까? 그러면 좋을 텐데.
내가... 잠깐 약을 했었어. 가벼운 거긴 한데 그래도 나쁜 건 나쁜 거지.
말을 하며 유리의 얼굴을 살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유리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안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안 해, 전혀. 한국에 있을 때 잠깐 했었고, 앞으로는 절대 안 할 거야.
다짐의 말이 왠지 모르게 공허했다. 절대 안 할 것이라는 이 말은 지금 방금 생각해 낸 듯했고 가볍게 들렸다.
어제 내가 갑자기 그런 건... 플래시 백 증상이라고... 예전에 경험했던 그 환각이 잠깐 다시 보였던 건데, 이건 약을 안 먹으면 없어지는 거래. 나도 너무 놀랐었어. 처음이었거든. 물론 유리 네가 제일 놀랐겠지만...
플래시 백... 환각... 약.
유리는 듣기 힘들어했다. 자기의 얼굴에 표정이 생겨나는 걸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선글라스 너머에서 그녀는 내 감정을 보호하기 위해 혼자 애쓰고 있었다. 유리가 앞에 놓인 커피잔에 시선을 두고 만지작거렸다.
실망... 했어?
내가 물었다.
실망... 유리가 말했다.
아니. 어제 네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 놀란 것은 맞아. 내가 아는 민준이의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유리는 나에게 상처가 될까 봐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말하는 동안 나의 눈동자는 내내 흔들렸으리라.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유리는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유리는 나를 동정하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어 했다. 깨지기 쉬운 연약한 상태로 유리에게 온 나를, 용기 내어 치부를 드러내는 나를 어찌할 줄 몰랐을 뿐이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잔을 들어 커피를 조금 마시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겹치지 않게 서로를 한 번씩 훔쳐봤다. 유리에게 말을 하고 나자 나에게는 안도감이 약간 생겼다. 혹시 유리와 나의 두 번째 관계를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말도 안 되지만 그녀라면, 그녀와 함께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피어났다. 우리는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유리와 헤어지고 호텔로 돌아왔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비를 맞으며 유리 이모의 가게로 찾아갔고 유리 앞에서 해서는 안 될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다시 만나 사과하기까지 24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루 만에 일주일 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기분이었다. 나는 침대로 가서 그대로 엎드렸다. 지친 나의 육체는 빠르게 무의식으로 들어갔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휴대전화가 울렸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내 귀에는 분명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시끄러운 벨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계속 누워있었다. 침대 위에서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그쳤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멈췄던 전화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으... 음. 의식이 조금씩 깨어났다. 힘겹게 손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찾았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민준아. 나야, 재우.
.......
나는 재우라는 이름을 인식하지 못했다.
재우...
자다가 받았나 보다.
재우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민준아. 잘 지냈어?
불안한 목소리로 내 안부를 묻는 재우. 어딘가 이상했다.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났다.
재우? 재우야?
응.
야, 너 어디야?
아... 민준아, 우선 내가 미안하다. 그때 내가 그냥 그렇게 나가버려서... 너 황당했지. 그게 뭐라고 너를 두고 내가 그랬는지... 내가 미쳤었나 봐.
그래. 지금 어딘데.
음. 너는 호텔이지? 그때 거기?
응.
혼자 있어?
응.
그럼 내가 그리 갈게. 호텔 앞에 있었어. 잠깐만 기다려.
재우는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의 액정을 다시 봤다. 재우의 번호가 아닌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였다. 재우가 바로 들어올 수 있게 호텔 방문을 열어 슬리퍼로 고정해 두었다.
십분 뒤 재우가 들어왔다. 재우가 사라진 지 두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민준아.
뒤로 문을 닫으며 재우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재우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머리를 자르지 않은 것 같았다. 덥수룩한 머리는 눈을 가렸고 수염도 수북이 나 있었다. 한국에서 호주로 오기 전에 들떠서 샀던 감색 반 필 티셔츠는 땀인지 무엇인지 모를 얼룩이 여기저기 져 있었다. 충혈되어 벌건 눈은 재우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오니 시큼한 냄새까지 풍겨왔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나 엉망이지?
재우가 내 시선을 의식한 듯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디 있었어?
재우의 행색만 봐도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알 것 같았다. 약을 한 아름 들고나간 재우였다.
나도 뭐. 그냥저냥 지냈어.
재우는 얼버무리고 말았다.
너 밥은 먹었어?
내가 물었다.
밥?
되묻는 재우를 보니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수염에 가려 얼굴은 티가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많이 여위어 있었다. 티셔츠 속을 채우던 부피감이 반으로 줄어든 것 같았다.
밥부터 먹자.
나는 재우의 대답을 듣지 않고 앞장서 나갔다.
재우와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수제버거 집으로 갔다. 내가 치즈버거를 시키자 재우는 같은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재우와 마주 앉았다. 재우의 집에서 지낼 때 함께 갔던 백반집 생각이 났다. 불고기백반과 바지락 칼국수. 불고기를 한 입 크게 넣어 우적거리고 뜨거운 칼국수를 훌훌 거리며 먹었던 그 시간이 생각났다. 이제 이런 햄버거 따위 말고 그런 게 먹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의 재우가 생각났다. 아무런 예고 없이 내가 찾아갔을 때 받아주고 도와줬던 재우. 자세한 것을 캐묻는 대신 묵묵히 곁에 있어 주었던 재우. 재우의 모습은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햄버거가 나오고 우리는 말없이 먹기 시작했다. 입맛이 별로 없다던 재우는 막상 햄버거를 손에 들자, 허기를 느꼈는지 나보다 빨리 먹기 시작했다. 크게 입을 벌려 햄버거를 베어 물고 감자튀김을 서너 개씩 집어 입에 넣고 삼켰다. 햄버거에서는 소스와 채소가 섞인 주황색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재우의 수염과 손에는 기름이 마구 묻었다. 재우는 숨도 쉬지 않고 게걸스레 햄버거를 먹어치웠다. 옆자리에는 백인 가족이 앉아서 식사하고 있었다. 그중 꼬마 여자아이가 재우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아이 엄마가 보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햄버거를 모두 먹은 재우는 휴지로 수염과 손을 닦고 아직 먹고 있는 나를 봤다. 재우는 나에게 천천히 먹으라고 했지만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나는 들고 있던 햄버거를 내려놓고 재우를 봤다.
민준아.
응.
입에 남은 햄버거를 오물거리며 내가 대답했다.
너 돈이... 얼마나 남았어?
돈?
나는 남은 액수를 떠올렸다. 한국으로 돌아갈 항공권을 사고 나면 이제 거의 남지 않은 액수였다.
비행기 값 정도 남았어.
그래?
재우는 마른세수를 했다.
고개를 들어 천정을 잠시 보던 재우는
나 사실... 돈이 좀 필요해.
재우는 내 눈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왜? 무슨 일이야?
재우는 호텔에서 나간 직후 제일 싼 숙소에서 머물며 하루도 빠짐없이 약을 했다고 했다. 하루에 한 번으로는 부족해 두 번, 세 번 하는 날도 있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멈추지를 못했다. 그렇게 많았던 약은 어느덧 다 사라졌다. 약이 없어지자 재우에게는 금단 증상이 나타났다. 30도가 넘어가는 이 여름에 재우는 몸을 덜덜 떨었다. 뼛속에 애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사흘 밤 동안 잠을 자지 못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뼛속의 애벌레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재우를 간지럽히고 괴롭혔다. 그때 긁어서 생긴 상처라며 재우가 티셔츠를 들어 보여줬다. 갈비뼈가 튀어나온 그의 상체에 손톱자국과 벌건 핏자국이 가득했다. 재우의 팔을 다시 봤다. 주사기 자국과 긁힌 자국들이 있었다. 옆좌석에서는 꼬마 아이뿐 아니라 아이의 아빠도 쳐다보고 있었다.
가게에 더 있다가는 신고라도 당할 것 같아서 재우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계산하고 가게 밖으로 나와서 햇빛 아래에 서 있는 재우를 봤다. 피와 살이 다 어디로 갔는지 재우의 몸은 뼈 바로 위에 가죽만 덧대어 놓은 모습이었다.
약을 구해야 했어. 재우가 말했다.
그걸 해도 죽을 것 같지만, 하지 않으면 더 죽을 것 같았거든... 재우는 힘없이 옅게 웃었다.
미안하다. 이런 꼴 보여서. 그래도, 이제... 정신을 좀 차렸어. 이것만 해결하고 어떻게든 너랑 같이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그러려고 연락했어.
재우는 같은 숙소에 머물던 한 외국인에게서 약을 구할 수 있었다. 동남아인으로 보이는 그가 먼저 재우를 알아보고 약을 주겠다고 했다. 재우도 처음에는 돈을 주고 약을 샀다. 산만큼만 하고 돌아오려고 했었다. 하지만 금단 증상이 심해지고 나서는 돈이 없으면서도 일단 약을 달라고 했다. 약을 충분히 확보해 두는 것이 재우에게는 더 중요했다. 결국 미리 받아두었던 약도 모두 소진하고 빚만 생긴 재우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걔가 갱단 소속이더라고... 그 숙소가 게네들 소굴이고. 몇 명이서 나를 찾아와서는 어디론가 날 끌고 갔어. 무섭게 협박하더라. 내일까지 돈 가져오라고... 솔직히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라 그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는데 되게 살벌했어. 내 여권이랑 휴대전화도 다 걔네한테 있어.
재우가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 지 두 달이었다. 재우는 이제 와서 나에게 돈을 부탁하는 것이 면목 없다고 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얼마를 빚졌어?
천 이백 달러.
호주 달러로 천 이백. 110만 원이었다. 겨우 이 정도의 돈으로 재우가 협박당하고 나에게 이렇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다니... 그러나 그 겨우 천 이백 달러는 우리 둘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돈이기도 했다. 관광 비자의 만료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길어야 한 달 정도 머물려던 이 여행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 벌써 3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재우야. 돈을 주는 건 어렵지 않아. 근데 난 네가 걱정돼.
진심이었다. 지금 당장의 문제는 해결하겠지만 그 이후는? 재우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길거리에 있는 ATM 기기에서 돈을 인출했다. 돈을 꺼내서 재우에게 건넸다.
고마워.
재우는 돈을 갚아서 여권과 휴대전화를 찾아 바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호텔로 먼저 돌아왔다. 오면서, 재우와 거기까지 함께 갔다 올 것을 괜히 혼자 보냈나 싶어 후회했다. 재우를 믿는 수밖에. 나는 재우를 기다리며 침대에 누웠다. 이제 재우와 같이 돈을 마련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워야 했다.
침대에서 설핏 잠이 들었다. 깊지 않은 잠에 꿈이 따라왔다. 우리 가족이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들어오는 날이었다. 겨울에 하는 이사라 짐을 모두 집안으로 들일 때까지 추위를 견디며 기다려야 했다. 이삿짐 센터 아저씨들이 일을 마치고 모두 돌아간 후에 아버지가 중국 음식을 시켰다. 배고프고 추웠던 내가 성급하게 짬뽕의 랩을 뜯다가 손에 국물을 쏟았다. 뜨거운 국물에 덴 데가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어머니가 얼른 차가운 물로 내 손을 씻겨주셨다.
민준아, 괜찮아. 이렇게 하면 금방 나을 거야. 울지 마.
어머니는 나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시간이 영원할 것처럼 엄마는 나를 그렇게 어루만졌다. 눈물이 났다. 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꿈속에서 울던 나는 잠에서 깨고 나서도 눈물을 흘렸다. 작게 흐느끼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고 이제 꺽꺽 소리가 났다. 입으로 소리 내어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꿈에서라도 두 분을 만나 내가 작은 위안을 얻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더 가슴이 메었다. 꿈일 뿐이라고, 예전의 일이 잠시 생각난 것뿐이라고 되뇌어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
재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재우의 번호로 전화를 해봤다. 역시나 받지 않았다. 재우가 두 번째로 사라지자 내 마음은 그전보다 더 가라앉았다. 또다시 사라지다니. 나는 이제 버틸 힘이 없는데. 포기하고 그냥 남은 돈으로 나 혼자 돌아갈까 잠시 생각했다. 그때 재우의 말이 떠올랐다. 남들처럼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말. 재우에게는 마약을 하지 말라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도 떠올랐다.
재우의 마른 몸도 마음에 걸렸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돈을 갚고 돌아오겠다던 재우. 그렇게 말하던 재우의 얼굴에는 가식이 없었다. 그 순간의 재우는 정말 돌아올 생각이었을 거라 믿었다. 갱단 놈들에게서, 그리고 마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재우의 심정을 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돈을 갚으러 갔을 때 그의 눈에 보이는 마약의 유혹을 아마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손에는 돈이 들려 있었고, 그 돈은 재우가 한동안 걱정 없이 약에 취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었다. 돈만 갚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은 마약 중독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재우의 의지를 탓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재우를 혼자 보낸 내 책임이었다.
재우가 호텔 앞에서 전화했을 때 사용했던 번호를 찾아봤다. 모르는 번호로 왔던 그 전화가 지나가는 아무에게서 휴대전화를 빌려 전화한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다. 제발 그 갱단 놈들 중 한 명의 것이기를.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참 울리는데도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연이어 전화를 걸고 상대는 계속해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응답이 없는 것은 그 번호가 갱단 누군가의 전화기가 확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마약 거래를 할 때 신분이 보장된 사람의 전화만 받았던 경험이 나에게도 있다. 다행이었다. 이제 통화만 되면 된다. 그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 재우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연결음을 듣다가 종료 버튼을 눌렀다. 또 통화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가 종료 버튼을 눌렀다. 재우를 찾을 수만 있다면 이것을 밤새도록 반복할 자신이 있었다.
열일곱 번 만에 전화를 받은 상대는 다짜고짜 정신병자냐며 화를 냈다. 나는 정말 미안하지만, 약이 너무 급하다고, 당장 구해야 해서 전화했다고 둘러댔다. 그는 네가 아무리 지금 죽는다고 해도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며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때, 재우의 이름을 말하며 그가 소개해주었다고 덧붙였다.
후즈 퍽킹 재우?
재우 이즈 위드 유, 히 이즈 코리안.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재우가 누구인지 이미 아는 눈치다. 약값을 갚으러 와서 오히려 약을 더 사 간 약쟁이. 지금 전화한 나는 그와 비슷한 약쟁이일 것이고. 그렇다면 이 두 코리안에게 약을 좀 더 팔아서 나쁠 것은 없다고 그는 판단했을 것이다.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진 그는 무슨 약을 원하냐고 물었다. 나는 일단 그들이 재우와 함께 있는 곳이 어디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길거리에서 거래하자고 그가 말하기 전에 의심 없이 나를 숙소로 안내하도록 유도해야 했다. 그들이 아무리 갱단이어도 함부로 가지고 다니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양을 사겠다고 하면 그들의 아지트로 나를 부를 것이었다.
메스 원 킬로그램. (메스암페타민 즉 필로폰 1kg)
말을 하고 나자 나의 손과 허벅지가 갑자기 떨려왔다. 내가 말한 메스 1kg은 나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폭탄 발언이었다. 한국에서 필로폰 1kg은 약 팔천만 원이었다. 한국에서 유독 비싼 값에 판매되는 편이라 호주에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의 입에서 그런 엄청난 말이 나오다니, 잠시 어이가 없었다.
나의 과감한 주문에 저쪽에서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메스 1kg의 거래는 개인이 혼자 쓸 것을 간단히 주문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3만 명 이상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양이었다. 대량으로 사서 각 판매책에게 배분하는 규모 있는 판매상이나 요구하는 양이다. 이들과 거래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마음대로 살 수가 없는 양이라는 뜻이다. 나는 너무 섣부르게 말한 것 같아 좀 불안해졌다. 그 방법밖에 없었는지 더 확실한 방법은 없었는지 생각해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의 구매의사를 그냥 무시하지는 못했다. 재우를 포함해서, 코리안은 마약을 비싸게 사 갔다. 아무리 중독자여도 적정 시세를 알고 찾아오는 호주 현지인들과는 달리 코리안은 여기서 얼마에 약이 거래되고 있는지도 모르고 왔다. 어쨌든 한국에서보다는 저렴했고, 저렴한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계제도 없었기 때문이다.
필로폰 1kg을 코리안에게 판다는 건 엄청난 돈을 벌 기회였다.
아일 콜 유 백.
그는 다시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일이 너무 엄청나서 오히려 침착해졌다. 재우와 함께 마약을 살 때는 웹상에서만 거래했었다. 그것은 믿을 만한 판매자를 잘 고르기만 하면 되는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직접 마약상을 만날 필요가 없었다. 쇼핑몰에서 쇼핑하듯 가볍게 주문했다.
사지도 않을 필로폰 1kg을 주문해 놓고 나는 명치끝과 목구멍이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다 상대는 갱이었다. 태어나서 갱단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거래가 성사돼도, 성사되지 않아도 문제였다.
30분 후 휴대전화로 문자가 왔다. 시드니 외곽의 주소로 11시까지 오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구나. 재우가 있는 곳이.
백 팩을 찾아서 짐을 쌌다. 재우와 나의 물건을 다 합쳤는데도 그 가방 하나에 모두 들어갔다. 가방을 싸고 침대에 걸터앉아 벽시계를 쳐다봤다. 7시. 아직 네 시간이 남았다. 내 손에는 여권과 지갑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