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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Sep 26. 2022

멋있는 꼴찌가 되는 법

꼴찌 전담이지만 즐겁게 크로스핏 하기

 살면서 꼴찌를 해본 기억은 없다. 아무리 못해도 중간은 갔다는 게 나의 자부심이고,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막 크로스핏을 시작한 이 비루한 종이 인형은 좀처럼 박스*의 꼴찌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남들이 내가 전담 꼴찌라는 걸 눈치챌까 봐 부끄러워서 코치의 눈을 피해서 요리조리 요령을 부렸다. 요령을 부려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와드*를 남들과 비슷한 시간에 끝내고 싶었다. 누군가를 이긴다는 바라지도 않았다.

* 박스: 크로스핏 체육관을 박스라고 부른다. 크로스핏이 처음에 컨테이너 박스 같은 곳에서 시작된 데서 유래되었다.

* 와드(WOD: Wokrout Of the Day): 오늘 수행해야 할 운동을 뜻한다. 보통 다양한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로스핏에서는 매일 새로운 와드로 운동한다.


 하지만 두 세 사람이 팀을 이뤄하는 팀 와드에서는 요령도 피우지 못했다. 팀 와드가 예고된 날이면 나와 팀이 될 불운한 사람을 어떻게 위로할지부터 걱정해야 했다. 오늘 기록은 나 때문에 하위권에 머물게 될게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과를 대신해서 열과 성을 다해 나의 팀원을 칭찬을 했다.


"얼마나 하셨어요? 진짜 잘하시네요! 멋있었어요!"


 가슴에 손을 얹고 칭찬은 진심이었다. 물론 내성적인 성격의 평소 나였다면 속으로만 생각하고 내뱉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나의 민폐를 희석시키고 싶어 쌍 따봉을 마구 들이댔다. 근육 고래들이 칭찬에 춤추느라 나의 실력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나의 크로스핏 여정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는 듯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든 일이 있었다. 우리 박스에는 중장년층 회원분들도 있다. 그날도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고 더 마른 여자분이 수업에 참가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셨는지 사용하는 덤벨의 무게나 자세도 나와 비슷했다. 역시나 나는 와드를 수행하면서 일찍이 체력이 방전되어 요령을 부렸고 덕분에 그분보다는 빨리 와드를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요령을 부린 나와 달리 그분은 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동작을 수행했다. 속도는 느렸지만 흔들리지 않는 자세에서 의지가 느껴졌다. 속으로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주변에서도 응원의 외침이 들리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파이팅!'을 외쳤다. 다들 아는 것이다. 저 사람이 지금 얼마나 힘든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얼마나 힘겹게 이겨내고 있는지를. 그렇게 모두의 응원을 받으며 그분은 끝까지 모든 동작을 수행하고 장렬히 뻗어버렸다.


 꼴찌도 그렇게 멋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날의 응원을 통해 사람들이 꼴찌를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잘하는 사람도 못하는 사람도 기록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차피 힘든 건 다 똑같다. 다들 그렇게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며 함께 발전해나가고 있을 뿐, 누가 더 우월하고 누가 더 못난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못 할수록 응원받고, 도전할수록 멋있어지는 운동이 크로스핏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꼴찌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당분간 꼴찌를 벗어날 수는 없으니 어차피 꼴찌라면 그분처럼 멋있는 꼴찌가 되자고 다짐했다.


 나는 당분간 행복한 꼴찌를 자처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가끔 코치님이 내 바벨의  무게를  한없이 내릴 때면 내가 그렇게 부족한가 싶어 자신감도 함께 내려간다. 어쩔 수 없다. 나는 아직 그냥 종이 인형에서 크로스핏 하는 종이 인형이 됐을 뿐이니까. 그래도 지금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입 회원들이 오고, 꼴찌는 벗어난 것 같다. 아마 뒤에서 두 번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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