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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Sep 14. 2022

종이 인형이 크로스핏을 시작한 이유

돈 내고 벌 받으러 갑니다

 표준의 근육량, 그것은 미디어에나 존재하는 인간미 없는 사람들의 얘기라고 생각했다. 평생 근육량이 표준을 넘겨본 적이 없지만 딱히 사는데 지장은 없었고, 남들에게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은 있어서 체력은 평균에는 미쳤다. 그래서 그냥 괜찮을 줄 알았다. 사실 체력이 아니라 자존심으로 버틴 악바리였지만. 그렇게 근육량 미달의 종이 인형은 남들도 그런 줄 알고 그냥 쭉 말랑말랑한 몸으로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산지 30년이 훌쩍 넘어 30대 중반이 되면서 드디어 사는데 지장이 오기 시작했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진작부터 몸으로 느끼고는 있었다. 그런데 건강검진에서 허리에 퇴행성 변화가 발견됐다는 소견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의사 양반, 그게 무슨 말이오? 퇴행성이라니! 내가 벌써 퇴행성이라니!


 간혹 컨디션이 안 좋으면 허리가 아플 때는 있었지만, 너무 오래 앉아 있는 탓이라고 여겼지 퇴행성 변화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가만히 있어도 여기저기 저리고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미디어는 한술 더 떠 나이가 들수록 근육량이 점점 더 줄어들면서 퇴행성 질환을 야기한다고 자꾸만 겁을 준다.


 내가 아예 운동을 안 했던 것은 아니다. 한 때는 스피닝에 빠져서 한동안 자전거 페달을 신나게 굴렸던 적도 있고, 유튜브를 보며 독학으로 헬스장의 기구들을 나름 깨작거리고 다니기도 했다. 달리기에도 살포시 발을 들여놔서 10km까지는 쉬지 않고 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 중 하나다.


 그런데 아무리 운동을 해도 근육량은 표준을 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유독 근육이 안 생기는 체질이라고 생각하며 포기하고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산 고바위 여고 Top 3 안에 가볍게 들법한 학교를 다니면서도 내 종아리는 알 없이 매끈하고 말랑했다. 당시에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어 생각해보니 '너는 웬만해서는 종이 인형을 벗어날 수 없다.'는 운명의 경고였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는 꼬부랑 할머니 말고 허리 꼿꼿한 할머니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근육량을 키워야만 한다.



열심히 운동을 알아보면서 몇 가지 기준을 세웠다.


 첫째, 나는 남편과 같이 운동을 하고 싶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남편과 같이 다니는 게 나의 빈약한 의지력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남편은 오랫동안 헬스를 해왔는데, 이제 혼자 하는 정적인 헬스에 질려서 새로운 변화를 원했다.


 둘째, 나는 마흔이 넘기 전에 종이 인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근육을 만드는 데는 PT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았지만 나 같은 초보는 제대로 된 동작을 수행할 수가 없어서 회당 비싼 수업료를 내고 기합만 받고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혼자 헬스장의 기구들을 깨작거리면서 훔쳐본 트레이너들의 모습이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았던 것도 큰 이유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은 가격이 너무 비씨지 않았으면 했다. 아무래도 너무 비싸면 꾸준히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던 중 집 근처에 가격이 합리적인 크로스핏 박스를 발견했다. 그동안 크로스핏은 가격도 너무 비싸고, 초보가 범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미지였다. 나 같은 종이 인형은 쇠질 하는 근육 고래들 사이에서 등이 터져 쫓겨 다닐 것만 같았다. 또 인터넷에 부상 위험을 경고하는 댓글은 어찌나 많은지, 없는 근육에 관절까지 성치 않은 몸이 되는 건 아닌지 겁이 났다. 하지만 주변에 경험해본 이들의 후기가 너무 좋아서 항상 궁금증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근육량을 늘리기에는 PT를 제외하고는 크로스핏만큼 좋은 것이 없어 보였다. 특히 남편과 같이 하기에 너무나 좋은 운동이었다. 결국 우리 부부는 집 근처의 크로스핏 박스에 무료체험을 신청했다.


종이 인형의 등을 터뜨려버릴 것 같은 쇠질 하는 근육 고래


 막상 무료체험 날이 되자 덜컥 겁이 났다. 나는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혼자 허우적거리다가 망신만 당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운 마음을 달래며 입구의 무시무시한 철문을 열자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는 코치가 우리를 맞이했다. 머릿결이 어찌나 좋은지 어느 미용실에 다니냐고 물어볼 뻔했다. 저렇게 섬세하게 머리를 손질할 줄 아는 남자라면 나의 허우적 거림을 이해해 줄 것만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됐다.


 수업은 스트레칭과, 오늘 수행할 동작에 대한 설명, 그리고 실제 운동 순으로 진행됐다. 생각보다 동작 설명이 자세했고 한 명 한 명 꼼꼼하게 자세를 교정해줬다. 무게를 줄이거나 동작을 약간 수정하는 식으로 레벨을 맞춰줘서 나 같은 초보도 완벽히는 아니지만 제법 그럴듯하게 동작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운동이 쉬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시작한 지 5분도 안돼서 내 몸의 모든 땀샘에서는 댐에서 방류한 듯 물이 터져 나왔고, 육지에 있는데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그날의 나는 허우적은커녕 파닥거리고 있었을게 분명하다. 그렇게 힘겹게 무료체험을 마치고 나와 남편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다! 이것이 우리가 찾던 운동이다! 돈을 내야 맛볼 수 있는 지옥의 근육통이다!


 온몸에 힘이 방전되어 어기적 거리며 집에 돌아오는 와중에도 우리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누군가 감시하지 않으면 절대로 혼자서는 도달할 수 없는 극한의 맛이었다.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온몸의 근육이 지르는 비명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 정도의 근육통이면 나의 종이 인형 상태를 벗어버릴 수 있겠구나. 돈 내고 벌 받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일단 의심은 접어두기로 했다. 남편도 헬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성취감에 전의가 불타오르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말 동안 우리는 엄청난 근육통에 시달려야 했다.


 고래의 먼 조상은 육지에서 살았다고 한다. 근력운동을 열심히 한 덕분에 고래는 바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폐활량을 얻게 된 걸 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크로스핏을 하다 보면 나도 언젠간 근육 고래가 되어 땀샘의 범람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근육 고래가 되기 위한 나의 크로스핏 여정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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