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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Nov 09. 2022

장비빨 어디까지 세워봤니?

멈출 수 없는 장비 욕심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장비빨을 세우는 사람과 세우지 않는 사람.


 나는 장비빨을 세우지 않는 사람이다. 새로운 취미를 시작할 때 꼭 필요한 게 있다면 처음부터 비싼 장비를 사는 것보다는 중고거래를 이용한다. 아니면 가성비 좋기로 소문난 입문자용을 쓰는 편이다. 크로스핏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크로스핏 부상의 위험이야 고수들 그들만의 세상 이야기로 들렸다. 무게 얼마 들지도 못하는 사람은 다쳐도 얼마나 다치겠냐며 자신만만했다. 비싼 장비가 아무리 삐까번쩍해도 실력에서 나오는 간지가 진짜 아니겠는가. 그렇게 첫 몇 주간은 운동화 하나 달랑 가져가서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장비의 필요성이 온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작은 손목부터였다. 평소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게 당장 푸시업, 버핏 등 몸풀기 동작에서부터 손목이 뻐근하게 경고를 보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클린*, 스내치*같은 역도 동작을 한 날이면 하루 종일 손목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병원에 가야 할 정도의 통증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운동 중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손목 보호대가 필요할 것 만 같은 불길할 예감이 들었다.

*클린(Clean): 역도의 용상. 바벨을 어깨까지 들어 올리는 동작.

*스내치(Snatch): 역도의 인상. 바벨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


"여보, 손목 보호대는 있어야 될 것 같아"

"그렇지? 이왕 사는 거 좋은 거 사자! 이렇게 힘든 운동을 할 땐 말이야 비싼 장비를 사야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하게 되는 거야!"


 남편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랬다. 남편은 장비빨을 세우는 사람이었다. 내 입에서 장비를 사자는 말이 먼저 나오자 남편은 신이 났다. 그동안 내 눈치를 살피느라 참았던 장비 욕심을 채울 기회가 드디어 온 것이다. 내가 평소처럼 가성비를 따지고 있을 때 남편은 어디서 찾아왔는지 유명하다는 손목 보호대 목록을 내밀었다. 하나는 크로스핏 게임즈의 공식 후원사인 로그 피트니스, 하나는 역도 국가대표 선수들이 사용해서 유명해진 크리올로지. 둘 다 너무 전문적이고 고가인 제품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여보, 관절은 재생이 안돼!"


 그럴싸한데? 크로스핏이 관절 부상의 위험성이 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기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남편과 나는 초보자가 사용하기에 조금 더 편해 보이는 로그의 손목 보호대 하나씩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손바닥 보호대도 같이 주문할까? 배송비 아끼고 좋잖아"


 이 장비 귀신이 본색을 드러내네? 하지만 장비빨이 라고 타박하기에는 내 손도 나날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크로스핏은 반동을 이용한 철봉 동작이 많기에 마찰 때문에 손바닥 굳은살이 떨어지면서 상처가 나기 쉽다. 실제로 손바닥 상처가 박스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는 부상이었다. 또 그립이라고 불리는 손바닥 보호대는 저렴한 걸 잘못 샀다가 오히려 동작 수행만 방해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결국 핫하다는 빅토리 스텔스 그립을 주문했다.


 우리의 쇼핑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손목 보호대를 착용하니 확실히 손목 통증이 거의 사라졌다. 그립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탄마가루*를 먹여서 길들였더니 손바닥 상처가 훨씬 덜했다. 역시 취미는 장비빨인가? 우리의 장비 쇼핑은 끝날 줄 몰랐다. 곧이어 무릎 통증을 핑계로 무릎 보호대를 사고 손가락을 보호하는 훅그립 테이프에, 손바닥 굳을 살을 제거하는 콘커터까지 장비를 야금야금 늘려나갔다.

*탄마가루: 탄산마그네슘 가루. 땀을 흡수하고 미끄러짐을 방지해준다. 체조나 클라이밍, 역도 등의 종목에서 많이 사용한다.


 장비가 주는 안정감을 만끽하고 있노라니 다른 사람들의 장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검색과 쇼핑을 반복하다 보니 쇼핑 전에는 몰랐던 다양한 브랜드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길 봐도 저길 봐도 국산 브랜드인 와드프렌즈만 보였다. 분명 인터넷 카페에서는 해외 브랜드가 최고라고 했는데 말이다. 심지어 내 장비는 코치들이 사용하는 것보다도 더 고가였다. 매번 Rx'd*로 와드를 완수하는 박스 내 상위권들 사이에서나 간혹 해외 브랜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랬다. 나는 아직 내 실력에서는 진가를 볼 일이 없는 선수용 장비만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꼴이 된 것이다. 내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그림이었다. 하지만 이미 반품도 할 수 없으니 장비가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길러보자고 다짐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아마 2, 3년쯤?

*Rx'd: 처방대로 라는 뜻. 정해진 와드를 무게나 횟수의 수정 없이 그대로 수행하는 상급자용 난이도다. Rx'd로 수행할 수 없을 경우 무게나 횟수, 동작을 수정하여 운동하는데 이를 Scaled라고 한다.


 그렇게 우리의 장비 쇼핑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마지막 장비 쇼핑에 불을 지른 사건이 있었으니, 그 시작은 코치의 한마디였다.


"장비를 살려면 신발부터 샀어야죠!"


 크로스핏과는 상극이라는 쿠션감 좋은 러닝화를 신고 있는 우리 부부를 향한 코치의 강한 일침이었다. 이렇게 좋은 핑계가! 합법적인 장비 구입 허가를 받은 우리는 그 길로 신발 사냥에 나섰다. 신발만은 신어보고 사야 한다! 장비 귀신들은 이럴 때는 합이 잘 맞았다. 더 이상 살게 없었는데 또 살게 생기다니 신이 나는 것도 같았다. 나이키의 메트콘과 리복의 나노를 신어보고 결국 발바닥이 조금 더 푹신하고 저렴한 나노를 선택했다. 사실 이제는 실력에 맞는 장비를 사야겠다는 생각에 더 비싸고 더 기능이 좋은 메트콘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동안 열심히 한 우리를 위한 선물이야!"


 는 개뿔. 이제 핑계 대는 실력도 점점 늘어간다. 수강료보다 장비에 들인 돈이 더 많을 지경이다. 이게 진짜 마지막 장비여야 한다. 다음 쇼핑은 낡아서 도저히 쓸 수 없을 때 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까지 크로스핏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더 열심히 박스에 출석하자! 다음 쇼핑을 위해서! 응? 하지만 요즘 더블언더*를 할 때마다 자꾸 rpm 줄넘기가 눈에 아른거린다.

*더블언더(Double under): 이단 뛰기 줄넘기. 일명 쌩쌩이.


 세상에는 장비빨을 세우는 사람과 세우지 않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장비빨을 세워 본 사람과 세워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초보자가 갖추면 좋은 크로스핏 장비

1. 바닥이 평평한 운동화: 크로스핏 전용화로는 나이키의 메트콘, 리복의 나노 시리즈가 있다. 나노가 바닥이 조금 더 푹신하고 볼이 넓은 느낌이었다. 반면 메트콘은 바닥이 단단해서 바벨 운동 시에 더 안정적이라고 한다. 반스 같은 컨버스화도 많이 신는다. 입문자라면 컨버스화로 시작하는 것을 추천한다.

2. 손목 보호대: 크리올로지의 손목 보호대가 가장 유명하지만 붕대처럼 감아 쓰는 형식이라 초보자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로그의 랩 형태의 손목 보호대가 가장 보편적이고, 무게를 많이 치지 않는 초보라면 손목 가동성이 나올 있는 제품이라면 어떤 것이든 크게 상관없는 것 같다.

3. 무릎 보호대: 리벤지의 3mm 제품이 최고라고 손꼽히지만 가장 비싸다. 훅그립의 더블레이어 니슬리브도 가성비 좋기로 유명하다.

4. 그립(손바닥 보호대): 링이 아닌 철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면 금방 그립이 필요해진다. 빅토리 스텔스는 써보니 얇고 좋다. M2 그립, 마그네핏 그립이나 와드프렌즈의 스파이더 그립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손가락을 끼우는 제품보다는 프리덤 타입이 와드 수행할 때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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