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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브 Mar 14. 2022

4. 종료된 과거를 종료하기

Tourner la page, 다음 페이지로 넘기기 




각자에게는 각각의 종료 방법이 있다. 컴퓨터 전원 버튼처럼 한 번의 터치로 강제 종료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무언가를 마무리 짓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만약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을 계속 상기하며 되풀이하고 있다면 과거의 기억 또는 추억이 현재 자신에게 가지는 의미를 깨닫고 종료를 위한 반복을 이행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종료를 위한 반복은 곧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는 일과 같다. 프랑스어 표현 중 Tourner la page (페이지를 넘기다)라는 말이 있다. 보통 연인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미련을 버렸다, 완전히 그를 잊었다, 라는 표현으로 쓰인다. 이 반복의 제스처가 중요하다. 언제든 다시 또다시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자유. 


마리와 시몽네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날 아침에 간단히 짐 정리를 하고 점심을 먹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매운 라면을 끓였다. 아껴두려고 했는데 눈앞에 보이는 라면은 참을 수 없다. 창밖을 바라보니 여전히 날씨는 흐리고 곧 비가 올 것 같다. 그런데도 왠지 밖에 나가면 거리의 모든 사람이 나를 들고 헹가래를 하며 나의 귀환을 축하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몸은 숙소에 머무르라고 하지만 우선 밖에 나가고 싶다. 



Moulin Vert으로 향했다. 물랑베르는 캥페르 중심가에서 가장 가까운 큰 공원이라 할 수 있겠다. Cineville영화관을 넘어 쭉 걸으면 왕복 30-40분 정도의 가벼운 산책을 할 수 있다. 마실 것과 간식을 챙겨가면 기분 전환하기 딱 좋은 코스다. 유학시절에 질리도록 이곳으로 산책을 왔다. 기분이 좋은 날, 슬픈 날, 날씨가 좋아 그냥 어디든 나가고 싶은 날, 머리가 복잡한 날 이곳에 왔다. 그리고 항상 같은 벤치에 앉아 정면에 있는 큰 나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웅장한 클래식 음악을 틀고 보온병에 쌓온 와인을 마시거나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정리했다. 한국에서 이곳을 자주 떠올렸다. 일을 끝마치고 지쳐 돌아온 날 저녁이면 이곳에서의 고요함과 고독함을 떠올렸다. 막상 다시 돌아오니 크게 새롭지는 않다. 그때의 나는 현재에 비하면 생각보다 더 복잡했었던 것 같다. 그때처럼의 고독한 사색은 이미 지난 과거가 되었다. 나는 그 당시의 나를 생각하고 이곳에 돌아왔는데 지금의 나는 꽤나 단순하게 변한 것 같다고 혼자 중얼거린다. 변함없이 평화로운 물랑베르. 



유학시절 잠깐 서로 호감을 느끼며 만났던 친구가 있다. 한국에 돌아오기 두 달 전이었으므로 서로를 알아 갈 수 있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는 종종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는 더 이상 이 관계를 이어 갈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렇게 흐지부지 서로의 관계를 놓아야 했다. 그럼에도 한국에 돌아오고 일 년 동안은 그가 그리워 견딜 수 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나 자신의 의지로 이야기를 끝낸 것이 아닌 체념으로 그를 내 삶의 밖으로 밀어냈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리움의 감정은 조용히 식어갔지만 무언가 제대로 끝맺지 않은 듯한 찜찜함이 마음속에 잔여 하고 있었다. 

 

공원을 산책하던 도중 내가 다시 캥페르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그가 메시지를 보냈다. "프랑스에 돌아왔다면서, 축하해!" 뜻밖의 메시지에 잠시 놀랐다. "어제 도착했어!"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럼 지금 뭐 하고 있어?" 나는 Moulin Vert에서 산책을 하고 있다고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는 이 근처를 지나가는 중이라고 했고 우연히 2년 반만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이곳에 돌아오면 이 작은 도시에서 한 번은 그를 우연히 마주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이야. 


크게 마음이 동요될 줄 알았지만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그의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언제 내가 한국에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 나누며 잠시 이야기를 했고 친구와 이미 약속이 있었던 그는 차를 타고 떠났다.
 


  우리는 지난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다. 더 이상 지난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음을 느꼈던 것 같다. 이미 종료된 과거의 일을 되살려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동안 잔여 하고 있던 해소되지 않은 무언가가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미 예전에 페이지를 넘겼다. 굳이 같은 이야기를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닳을 만큼 닳을 때까지 읽어 모두 외우고 있다. 그리고 그 페이지에는 더 이상 읽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다음장을 넘겨 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 써 내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었는데. 이곳에 돌아온 이유를 하나 찾은 것 같다. 나는 이곳에 과거를 재현하기 위해 돌아온 것이 아니다. 이제야 인정할 수 있다. 나는 이곳에서 새롭게 새로운 챕터를 써내려 가고 싶다. 완벽히 종료된 과거를 인정하고 새로운 페이지를 써내려 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과거는 돌아오지 않지만 여전히 우리 기억 속에 존재한다. 종료된 과거일지라도 온전히 이 과거를 끊어낼 수는 없다. 다만 과거를 완벽히 재현할 수 없음을, 같은 추억을 다시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즉 종료된 과거를 종료시키고 새로운 페이지를 써내려 나가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이곳에 돌아와서 느낀다. 단순히 이곳에서의 행복했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곳이 왜 나에게 소중했고 이곳이 나의 인생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왜 이곳에 대해서, 내가 만난 사람들과 만날 사람들에 대해서 써내려 가고 싶은지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이 잠시 멈췄던 나의 삶을 다시금 앞으로 이끌어줄 원동력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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