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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브 Mar 08. 2022

3. 잊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잊지 못할 장소와 추억 그리고 현재


 

개인적으로 여행에서 이색적인 풍경이나 먹거리를 찾아다니는 편은 아니다. 그런 것들에 큰 인상을 받는 편도 아니기 때문에. 하루 이틀 머물며 새로운 여행지를 이동하는 것도 물론 좋다. 하지만 그런 단편적인 여행들에서는 개인적으로 어떤 것도 담아 오지 못했다. 계속 지나가는 것들에는 의미를 담을 시간이 부족하다. 나는 오래, 천천히 바라보고 익숙해지고 그것을 받아들여 소화시키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 여행자는 한때 만족했던 행복한 경험의 외적 상황을 재구성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진정한 반복(회복)의 움직임은 내면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반해 여행자는 이러한 "외부적 변화"가 단순한 "기분 전환" 정도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키에르케고르의 <반복> 중(서문)

 * 한국어 서문 번역본을 찾지 못해 직접 번역하였기에 약간의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 le voyageur ne se préoccupe que de reconstituer les circonstances extérieures de l'heureuse expérience dont il a été une première fois gratifié. Il oublie que ces "changement extétieur" ne sont pour l'esprit que pure "distraction", alors que le mouvement de la véritable reprise doit s'effectuer au sein de l'intériorité.


갑작스럽지만 독자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은 예전에 본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을 좋아하는가? 이전에 갔던 여행지를 다시 되돌아 가본 적 있는가? 오래전에 들었던 노래를 다시 찾아 듣게 된 적 있는가? 오래 만나지 못한 친구를 다시 만난 적 있는가? 



 

잠깐의 고독을 느낄 새도 없이 "치즈와 와인이 너를 기다리고 있어 빨리 와!"라는 마리의 문자를 받고 서둘러 샤워를 한 뒤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챙겨 서둘러 마리네를 향했다. 19시 30분, 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다. 모두들 저녁을 먹으러 집에 들어갔나 보다. 파리나 리옹처럼 큰 도시가 아니라면 소도시들의 저녁거리는 매우 고요하다. 단, 어둠이 깔린 이 도시에 빛을 찾아 몰려든 나방들처럼 부글부글 사람이 넘치는 곳이 있다면 바로 동네 펍, 술집이다. 이 동네 토박이들을 만나고 싶다면 8시 이후 사람이 가장 많은 술집에 가면 된다. 


마리네 집에 도착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린 후 문을 열었다. 익숙한 가구, 은은한 꽃 향기와 책 냄새, 익숙한 얼굴들, 마리, 멜리스 그리고 시몽. 마리와 시몽은 연인이 된 지 4년이 되어간다. 시몽이 교환학생을 마치고 캥페르 보자르에 돌아왔을 때 마리가 1학년으로 학교에 입학했다. 파티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들은 한눈에 반해(Coup de foudre) 연인이 되었고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과 입맞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지만 안심이 된다. 시몽과 마리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추후에 이야기해볼 예정이다. 애정 하는 이들에 대해서.


시몽이 다정하게 안아주며 나를 맞이 해준다. 익숙한 온기. 나를 부를 때 항상 성과 이름으로 같이 부른다. "윤지 윤!" "자 와인 한잔 받아! 너의 귀환을 축하하는 축하주야!" 돌아오는 길이 너무 길어 피곤했던 건지 사실은 억누르던 감정이 솟구치고 있었기 때문인 건지 와인 한잔에 몸이 녹으며 볼이 붉어진다. 와인처럼 붉은 무언가가 마음에서 일렁이는 것 같다. 내가 이곳에서 그들을 만났고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파티를 하고 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는 이곳에 얼마 남지 않은 친구들. 이런 환영이 없었다면 분명 이곳에 돌아온 이유에 대해 고뇌하며 불안한 저녁을 쓸쓸히 보냈을 것이다. 고마워, 이곳에 아직 있어줘서, 나를 기억해줘서 고마워. 


한국에서는 거의 치즈와 와인을 먹은 적이 없었다. 프랑스에 와서 처음 맛본 치즈는 상상한 것만큼 꼬리지 않았다. 부드럽고 찰지다. 어떤 건 좀 딱딱하고 고소하다. 부드러운 치즈를 살짝 딱딱한 빵에 얹어 먹으면 그 맛이 최고다. 치즈 하나를 입에 두고 와인을 호록 마시면 그렇게 대화가 시작된다. 이런 즐거운 시간은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묻는다. 마리는 보자르에서 마스터 마지막 과정에 논문 심사를 앞두고 있다. 시몽은 나와 같은 해에 졸업해 지금까지 작가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언젠가 그가 이렇게 사석에서 만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아티스트가 될 거라는 직감을 항상 가지고 있다. 멜리스는 학교를 그만두고 알바를 하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2년 반 동안 그들의 삶에도 크고 작은 변화와 기회들이 오고 갔다.

그동안 한국에서 내가 했던 일들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전공분야와는 크게 접점이 없는 분야에서 일하며 열심히 돈을 모았다. 이곳에 돌아오겠다는 이년 동안의 집념이 가장 큰 함정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함정에 푹 빠져 버리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돌아왔다. 


와인을 두 세잔 정도 마시니 취기와 함께 피곤이 몸을 덮는 것만 같다. 노곤해지는 몸, 점점 꼬이는 혀. 마리는 항상 식사 또는 수와레(Soirée)가 끝나갈 때쯤이면 커피 또는 차를 준비한다. 내가 피곤한 게 눈에 보였는지 달달한 차를 끓여 건네주었다. 이제야 온몸에 긴장이 풀린다. 


캥페르의 저녁은 다른 도시에 비하면 위험한 편은 아니지만 요즘은 예전보단 뒤숭숭해졌다며 시몽이 에어비엔비까지 함께 동행해주었다. 걸어가는 길에 쓸데없는 질문들만 늘어놓았다. 이를테면 날씨, 학교 교수님들의 근황, 친구들의 근황 같은 질문들. 

이곳에 오고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왜 이곳에 돌아왔을까. 왜 이곳이어야 했을까. 냉정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친했던 이들을 다시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다. 그랬다면 휴가를 내고 잠시 프랑스에 다녀오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행복했던 과거(유학시절)를 현재로 되돌리고 싶어 하는 걸까. 현재를 회피하고 싶었던 걸까. 요즘 젊은 사람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아무개 회사에 취직한 후 퇴직해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거나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그런 유행에 동참하고 싶었던 걸까.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폐쇄적인 반복의 달콤한 함정에 빠져버린 걸까. 잊고 싶지 않았던 건 그때의 나 자신이었을까. 이 여행의 끝에서 나는 어떤 대답을 얻게 될까. 그리고 그 대답에 인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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