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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브 May 27. 2022

10. 와인 박람회에 가다

프랑스 하면 역시 와인과 치즈 아니겠어요?  

내가 생각했을 때 프랑스에서 가장 가성비 좋은 술은 와인이다. 맥주는 가볍고 시원해서 좋지만 개인적으로 가볍게 혼술을 하고 싶은 날에 생각나는 술은 아니다. 한잔으로는 모자란감이 있어 금방 두세 잔을 마시게 되고 배가 쉽게 차올라 가볍게 저녁을 먹으며 혼술을 하고 싶은 날에 생각나는 술은 아니다. 맥주는 날씨 좋은 날 늦은 오후 18시쯤 아페리티프로 가볍게 테라스에서 마시고 싶은 술이다.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서 유명한 Cidre(사과주)는 달달하고 가벼워서 좋지만 맥주와 비슷한 이유로 자주 찾게 되진 않는다. 그밖에 도수가 높은 럼, 위스키는 비싸기도 하거니와 나에겐 너무 쓰고 식사 중에 함께 곁들이고 싶은 술은 아니다. 보드카는 대학 초창기 시절을 떠올리게 하며 이젠 이름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린다. 다만 와인은 적당한 도수와 미묘하게 다른 맛들로 음식과 함께 한두 잔 곁들여 먹기 안성맞춤이다. 20대 후반에 들어서며 슬슬 생존을 위한 운동을 시작하고 몸에 좋은 음식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그렇다고 술을 끊지는 않는다.) 술은 파티에서 부어라 마시며 취하기 위해 마시는 개념보다는 하루를 부드럽게 마무리하고 긴장을 푸는 정도로 점잖아졌다.

위의 글을 보면 내가 와인에 대해 뭔가 아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프랑스에서 지낸 5년의 기간 동안 내가 마셔본 와인의 대부분은 슈퍼에서 구매할 수 있는 3유로에서 7유로선의 와인들이다. 3유로 이하 와인은 보통 음식에 쓰이거나 와인향보다는 알코올 냄새가 더 많이 나고 매번 달갑지 않은 숙취를 선사해 절대적으로 피하고 있다. 다만 3유로-7유로선에서는 종종 가성비 좋은 와인들을 찾을 수 있다.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물론 비쌀수록 맛있는 와인이 많은 건 당연하겠지만 이때까지 나에게 와인이란 그저 저녁에 홀로 한두 잔씩 식사에 곁들이는 식주 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적당히 타협점을 본 게 3유로-7유로선의 와인들이다.

최근 동네에 와인 박람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분명 다양한 와인들을 얼마 안 되는 입장료에 맛볼 수 있는 건 좋을 테지만 소믈리에들처럼 향을 구별해가며 마실 정도로 와인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와인은 술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박람회에 갈 생각은 크게 없었다. 분명 흥미로울 거라며 박람회에 가자고 며칠을 설득하는 마리가 어디에선가 공짜 티켓을 얻어오는 바람에 결국 못 이기는 척 박람회에 가게 되었다.


박람회 입구에서 1유로를 주고 와인 시음에 필요한 잔을 구매할 수 있었다. 마리, 시몽 그리고 마르세이유에서 브레타뉴로 다시 돌아온 보리스와 함께 잔을 들고 박람회에 입장했다. 내가 현재 지내고 있는 프랑스 캥페르는 규모가 작은 도시기 때문에 보르도 와인 박람회에 비한다면 초라할 수 있겠지만 예상보다 넓은 전시공간에 꽤나 다양한 지역의 와인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가본 와인 박람회는 사실 와인 마라톤에 가까웠다. 한 진열대 당 한 와인을 가볍게 맛보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레드와인, 화이트 와인, 로제 와인, 탄산 레드와인, 탄산 화이트 와인, 샴페인 등을 가격별 그러데이션으로 시음할 수 있었다. 물론 다 마실 필요는 없고 몇 병만 골라 맛봐도 문제없고 시음 후 남은 와인을 따라 버리거나 뱉을 수 있는 통도 각 진열장마다 배치되어 있다. 파리나 보르도처럼 규모가 크고 유명한 와인 박람회에서는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맛을 본 후 뱉어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만 가격별, 와인 종류별, 지역별 와인을 비교해볼 수 있는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끌려오듯 왔지만 왠지 분위기에 휩쓸려 와인 마라톤에 기꺼이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박람회에 들어서자 Alsace지역의 와인을 판매하고 있는 두 무슈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어이 거기 젊은이들, 와인 시음해볼래? 우리는 당연히 Oui avec plaisir! (당연하죠!)로 대답했다. 약 7유로에서부터 비싸게는 30유로가 넘는 와인을 시음해볼 수 있었고 가볍게 식사할 때 마시는 와인과 초대 손님이 있는 파티가 있는 날에 어울리는 와인들을 소개해주었다. 가장 쇼크였던 건 샴페인이 아닌 탄산이 있는 레드와인과 화이트 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샴페인보다는 당도가 적지만 탄산이 있어 목 넘김이 부드럽고 가벼웠다. 여름 늦은 오후 작은 정원이 있는 친구네 집에서 가볍게  마시기에 딱 좋은 그런 느낌의 와인이었다. 첫 진열대부터 약 7종류의 와인을 시음했다. 얼굴이 점점 뜨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사실 우리의 박람회 목적은 와인 구매보다는 시음에 가까웠지만 결국 맛 좋은 와인의 시음은 구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마음에 들었던 와인의 이름과 가격을 체크해 둔 뒤 다음 진열대로 옮겨갔다.

이번에는 아비뇽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진열대의 무슈와 마담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방금 전 시음했던 와인들보다 농도가 짙고 타닌의 떫은맛이 강한 와인들 이였다. 알자스 지역 진열대의 와인들이 여름 친구들과의 바비큐 파티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번 지역의 와인은 겨울 크리스마스 가족들과 함께 모여 마시는 와인 같다고나 할까. 사실 나는 레드와인을 가장 좋아하면서도 타닌이 너무 강한 와인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다만 너무 부드러운 레드와인도 내 취향은 아니다. 살짝 쿵 떫은맛이 느껴져야 와인을 마신다라고 뇌가 인식하는 것 같다. 아비뇽 와인들은 그런 맛에 중간에 있었다. 살짝 떫지만 그 떫은맛이 살짝살짝 목구멍을 건드리며 부드럽게 흘러들어 갔다 그리고 동시에 취기도 부드러운 곡석으로 함께 올라가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꽤나 취해 보이는 사람들이 진열대에 배시시 웃으면서 다가와 인사와 함께 잔을 내미는 모습이 보인다.

다행히 와인 박람회에 와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와인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치즈, 올리브, 소시 송, 잠봉, 빵 등 다양한 안주거리도 함께 시식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진열대에서 와인 시음을 마친 후 적적히 취기가 올라온 마리와 나는 와인 말고 다른 무언가를 위에 넣지 않으면 이 마라톤을 완주할 수 없으리란 것을 깨닫고 다음 시음대를 향해 가는 시몽과 보리스를 뒤로 한채 안주거리를 찾아 나섰다. 첫 안주거리는 올리브유였다. 다양한 올리브유에 관심이 있는 척 다가갔지만 사실 올리브유에 찍어먹는 빵을 먹기 위함이었다. 다만 올리브유가 와인처럼 이렇게 다양한 맛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향긋한 올리브유, 조금 떫은 올리브유, 시큼한 올리브유 등. 맛에 다양함을 이렇게 적은 시간 동안 한 번에 느껴보는 건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다음 안주거리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던 도중 버섯을 판매하고 있는 상인이 우리를 불러 종이컵에 크림 버섯리조또를 담아 건네주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크림과 향긋한 버섯향이 코와 입안에 어우러지며 위장은 물론이거니와 온몸을 녹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 맛은 필시 저녁에 레드와인을 부르는 맛이다. 이후 다른 진열대를 돌며 소시송과 치즈를 조금씩 시식했지만 배가 차지 않았던 우리는 결국 샌드위치 하나를 구매했다. 푸아그라를 값싼 파테(Paté)마냥 바케트에 치덕치덕 발라놓은 난생처음 먹어보는 샌드위치였는데 (생각보다 맛있었다.) 덕분에 한껏 머리 위에서 춤을 추듯 위로 올라가던 취기를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세 번째 와인 진열대는 부르고뉴 지역의 와인이었다. 한 마담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는데 신기하게도 푸근해 보이는 마담의 인상과 그녀가 판매하는 와인은 무척 닮아있었다. 와인 패키지는 꽤나 검소하고 심플한 편이었다. 타닌이 강하지 않은 대신 넓고 깊은 풍미가 있고 목 넘김이 매우 부드러웠다. 가격 역시 다른 진열대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었다. 17시, 와인 박람회가 끝나가기 10분 정도 각자의 원픽이 있는 진열대에 돌아가 와인을 구매했다. 나와 마리는 결국 세 번째 진열대의 부르고뉴 와인의 유혹에 넘어가 큰맘 먹고 지갑을 열었다. 대체로 와인에는 일주일에 5유로 이상 돈을 쓰지 않는 나지만 내 기준 거금인 12유로짜리 와인을 구매했다. 더불어 각자 치즈와 잠봉을 한 덩어리씩 구매했다. 시몽은 구매한 와인 중 하나를 기꺼이 오늘 저녁을 위해 열겠다고 함께 저녁을 먹자 제안했다. 평소 같으면 마리와 시몽네에서 자주 밥을 먹지만 오늘은 박람회에서 그나마 거리가 가장 가까운 우리 집에서 저녁을 함께 먹기로 하였다. 각자가 구매한 치즈와 잠봉을 꺼내 조금씩 접시에 담았다. 시몽은 첫 진열대에서 구매한 와인을 열었다. 부드럽고 구수한 치즈와 쫄깃한 잠봉에 와인을 마시며 모두들 와인으로 만들어진 파도에 서핑을 하듯 슬슬 취기에 미끄러졌다. 15시에 시작한 와인 마라톤은 그렇게 23시에 막을 내렸다.

부어라 마시는 술자리가 아니라 함께 맛을 음미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조금씩 나누어 먹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조금 더 투자하고 조금씩 더 깊게 알아가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 모든 것을 나누는 것. 이런 순간들은 삶의 질을 높인다. 단순하게 행복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내가 프랑스에 돌아오고 가장 크게 변하고 있는 점은 이런 것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조금 더 깊게 느끼는 것. 그것을 남용하지 않고 삶에 중간중간 끼어넣어 행복의 균형을 맞추는 것. 결국은 와인 박람회에 가길 정말 잘했다고 느꼈다. 왜 사람들이 좋은 와인을 찾아 음미하고 구매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날 숙취가 조금 걱정됐지만 이상하게 전혀 숙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와인과 즐거운 시간의 마법인 걸까.


그날 박람회에서 구매한 와인은 바로 마시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는 곁에 두고 바라보며 저 맛있는 와인은 반드시 어울리는 음식을 해서 제대로 마셔주리라 하고 기다렸다. 어느 날 저녁 제대로 분위기를 내보겠다 결심한 뒤 큰맘 먹고 소고기 한 덩이를 구매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와인을 열었다. 나를 위해 구매한 선물이 와인이라니 꽤나 근사한 일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 사치는 꽤나 이롭다고 느꼈다. 나는 음식을 먹으며 천천히 느릿느릿 와인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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