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산업은행 대전지점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까? 담임선생님이 타조 알 크기만 한 캡슐을 품에 안고 교실로 들어오셨고 반 친구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나눠주며 말씀하셨다.
“지금, 현재의 너희들 그리고 20년이 지난 미래의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아 이 캡슐에 보관할 거야.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난 후 다 같이 꺼내서 확인해 보는 거야.”
우리 모두는 열 살의 나에게, 서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하고 싶은 말을 종이에 담아 고이 접어 한 곳에 모았고 학교 운동장 끝자락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우리의 이야기를 땅 속에 숨겼두었다.
이십 년도 더 지났지만 그 캡슐은 여전히 땅 속에 남아있다. 반 친구들과 다 함께 모여 우리의 이야기를 꺼내어 읽어볼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이미 알고 있었겠지. 그럼에도 그때의 우리의 흔적과 소망하는 이야기를 담아 소중한 추억거리를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근대 건축도 근대의 기억이 응축된 타임캡슐이라고 볼 수 있다. 2001년도부터 지정되기 시작한 등록문화재에 근대건축이 유독 많은 이유는 건축 공간 속에서 풍부한 역사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 건축물에는 파란만장한 영욕의 역사를 담고 있다. 역사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시간의 흐름은 공간에 흔적을 남기고, 사람의 이야기는 공간에 녹아든다.
대전역에서 중앙로를 따라 남쪽으로 목척교 방향으로 쭉 걷다 보면 좌측에 건물이 하나 보인다. 근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외관과 달리 내부의 모습은 내 예상과는 많이 빗나갔다. (구) 산업은행 대전지점은 현재 안경점 체인점으로 상업적인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었는데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나,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 거지?"
건물의 중앙 입구 정면에는 안경점 간판이 크게 걸려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첫인상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았다.
(구) 산업은행 대전지점은 1937년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 자본으로 운영되던 조선식산업은행의 대전지점으로 건립되어 광복 후 1997년까지 사용되었다. 조선식산은행 영선계가 설계, 오바야시구미의 시공으로 건립된 건물은 전시체제 속에서 채권 발행과 강제 저축을 통해 조선의 자금을 흡수하여 전쟁을 위한 군수산업 부문에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기도 하다. 1989년 본관 증축과 별관이 개축되었고, 당시의 일제강점기 관청의 분위기와 비슷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견고하고 근엄한 분위기와 가운데 현관을 기준으로 건물은 좌우대칭을 이룬다.
정면에서 볼 수 있는 2개 층에 걸쳐 있는 4개의 팔각형 기둥은 하부에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고 2층 상단에 화려한 테라코타로 수평 띠를 둘렀으며 상부의 4개의 동그란 꽃무늬 장식이 더해 건물의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19호인 (구) 산업은행 대전지점 건물은 2012년 공매를 통해 (주)다빈치 안경체인으로소유권이 넘어갔다. 2013년 건물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건물증축과 리모델링을 진행하여 안경사박물관이 들어설 예정이었으나 현재까지 건물은 상업적인 용도로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간단 요약하면 역사적 보존 가치는 높지만 민간 소유로 운영되어 역사적 의의에 대한 가치와 홍보는 물론 계획했던 박물관의 운영계획도 틀어지게 되었다.
사간이 지나 문화단체 등은 건물 보존을 위해 대전시에 매입 방안을 강구했지만 해당 지가의 가격이 계속 상승해 시에서 해당 건물의 매입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산이 되었고 당시 관련 공무원들의 퇴직과 옛날이야기로 전락해 버린 사건으로 더 이상 논의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만약 대전시로 소유권이 넘어온다고 하더라도 행정절차가 남아 있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는 일이 쉽지 많은 않은 상황이다.
10년이 지나도록 이 건물을 보며 살았던 지역민들도 이 건축물을 근대문화유산인지 조차 인식하지 못해 역사 속에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문화유산 환수 사업을 통해 건물이 시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로, 기억되고 새로운 이야기로 흐르는 장소가 되길 바라본다.
글 | yoonzakka
사진 | yoonzakka
내용 참고 | 대전광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