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충청남도청 구 본관
대전역 광장 앞 가로축으로 쭉 이어진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큰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바닥을 기준으로30cm 정도 노출된 지대석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는 타일로 마감, 지붕은 코니스(cornice)가 단순화된 형태다. 특징적인 구성은 아니지만 중앙 부분은 주변공간보다 약간 높게 올려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부출입구 상부 창문에는 발코니가 있고 창문의 위치는 현관을 중심으로 외관의 균형 및 구조적 내구성을 고려한 듯 균일한 크기의 수직선상으로 고르게 배치되어 있다. 얼핏 봐도 모더니즘 양식이 충실히 반영된 이 건물은 근대건축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으나, 내부에 들어서면 아치형태의 천정과 아르데코풍의 난간 등의 미학적 특징을 발견하고 나면 호기심이 자꾸 솟아오른다. ‘역사’가 남겨진 건물 ‘대전 충청남도청 구 본관’의 모습이었다.
캐빈린치(Kevin Lynch)는 문화재가 시각적 랜드마크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상징적 랜드마크의 역할도 수행한다고 했다. 문화재 및 대표적 건물들은 그 자체가 지닌 전통적인 분위기와 역사성으로 인하여 누군가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스스로 나름대로의 상징성과 이미지를 지닌다. 근대건축물 또한 시각적이고 상징적인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위해 장소성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자리에 위치한 건물의 핵심적 결정기준은 ‘대전역 앞 직선 도로와 맞닿은 토지’였다. 즉, 과거 대전의 식민지 도시화에서 이 직선 도로의 공간적 중요성과 부지의 장소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중앙로’라고 불리는 대전역 앞 직선 도로는 대전시가지가 대전천 서쪽 은행동과 선화동으로 뻗어나가 도심 형성의 모태가 된 가로였다. 대전역 앞 형성된 시가지 서쪽으로 왼쪽으로 1 정목(현 중동)과 2 정목(현 은행동), 오른쪽으로 목적리(木尺里) 사이를 관통하는 직선 가로가 표시된다. 이 가로는 원래 1912년 10월 대전역에서 공주 도청소재지로 통하는 가도로 개설되었다.
대전시가지는 대전역 주변 원동, 인동, 중동 일대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해 주변으로 대전경찰서의 전신인 '한성영사관경찰 대전순사주재소'를 필두로 1907년에 대전우편국과 대전소방대, 1909년에 대전재판소 등의 관공서가 설치됐다. 그리고 일인거류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대전어채시장(현 중앙시장)은 대전역 앞 시가지가 서쪽으로 확장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렇게 1912년 대전교 가설과 함께 공주가도가 개설되면서 대전시가지는 은행동 대흥동, 선호동 방면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대전역 앞 직선 도로가 대전가지 확장의 기본 축을 형성하면서 대전의 상징 가로로 부각된 것은 1929년 대전신사가 대흥정에 건립되면서부터다.
일인거류민들은 현 대흥동 성모여고 자리 구릉지에 대규모 신사건립을 주도했다. 원래 일제는 대전역 개설 이후 1907년 대전역 동편 소제동에 대전신궁을 세웠다. 국권침탈 이전의 대전신궁의 기능은 주로 일인들의 결속과 단결을 위한 정신적 구심적 역할 정도였으나 국권침탈 이후, 신사의 의미는 차원이 달라졌고 이는 일제에게 군대와 관공서 배치만큼이나 중요한 식민정책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신사는 조선인들을 상대로 황민화 정책을 펼치는 데 있어 식민지 지배의 상징적 기능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대전신사 건립으로 대전역 앞 직선 도로는 기능적인 가로를 넘어서 대전지역 식민정책 수행과 유지의 척추에 해당하는 핵심 상징 가로가 되었고, 바로 이 상징 가로의 서쪽구간 도로 끝에 충남도청사 부지가 위치했다. 결과적으로 대전시가지 공간배치에서 도청사 부지는 배후에 새로 이전한 대전신사를 두고, 대전역과 뒤편 솔랑산 옛 대전신궁 자리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장소성을 지니고 있다.
도청사 본관은 원래 벽돌조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1960년 넓은 창을 지닌 3층으로 증축되었다. 외벽 마감재로 사용된 스크래치 타일은 당대 유행하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도쿄제국호텔과 유사하다.
건물 중앙은 관공서 건물의 목적에 부합한 충실한 구조를 보인다. 외관의 구조와 균형에 맞게 수직선상으로 뻗은 현관과 가운데 중앙 홀을 통해 올라가는 계단 정면에 배치된 창문으로 들어오는 채광은 중앙을 고요하고 집중하게끔 한다. 내부에 들어서면 독특한 몰딩의 아치와 떠받치고 있는 독립된 두 개의 기둥과 벽주들이 시선을 끈다. 이 건물에서 가장 화려하고, 장식적인 공간으로 이 건물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요소다.
긴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굉장히 안정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데 창문을 통한 채광으로 관청의 무거운 분위기를 밝게 하려는 의도와 내부의 구성과 형태가 외부와 거의 동일한 선상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관공서 건물은 일반 건물보다 더 건물의 목적에 부합되어 설계될 수밖에 없어 구조적으로 큰 특징을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건물의 벽면과 천장, 그리고 바닥의 그림이나 문양 등으로 상징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물론 일차원적으로 단순 건물의 장식적인 미학적 요소일 수도 있지만 앞서 이야기한 건물의 장소성과 목적을 쫒다 보면 도청사 문양은 단순 건축적 장식 요소였을까.
건물의 후면은 전면과 다른 진한 채도가 또 다른 무게감이 느껴지지만 주변으로 나무와 정원이 배치되어 있어 조용한 분위기와 함께 앞면의 권위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충남도청사는 일제의 식민정책이 문화정책을 거쳐 병참기지화 및 전시총동원(1931-1945)으로 변화하는 중요한 전환기에 건립되어 식민통치의 상징성이 강화된 건축물 중 하나다. 6.25 전쟁과 3층, 별관 증축을 이루며 지금의 모습을 가진 충남도청은 대전의 근대건축물 중 현존하는 관청건물로서는 갖아 오래된 것이자 대전이 근대도시로 발전하는 계기와 도시의 장소성을 담아내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도시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 우리 삶이 몸담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을 때, 인간은 자신과 함께 해온 이러한 건축물들과 다양한 대화를 하게 한다. 약속의 장소로, 추억으로, 역사의 가치 등으로.
글 | yoonzakka
사진 | yoonza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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