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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비디오

문화촌, 골목 끝 집

by 딸딸아들딸

주말에 가끔씩 아빠는 나한테 비디오를 빌려오라고 하셨다. 천 원, 이천 원을 받아 들고 동네 비디오 가게인 오색비디오에 가는 발걸음은 얼마나 설레고 가벼웠는지 모른다. 벽면을 가득 채운 수많은 비디오를 보면서, 무엇을 봐야 할지 어린 나이에 깊은 고민에 빠졌던 시간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빠는 항상 내가 보고 싶은 거 하나, 아빠가 원하는 거 하나를 대여했다. 나는 로봇들이 나와서 지구평화를 위해 싸우는 만화를 주로 골랐고, 아빠는 늘 액션영화를 골랐다. 그 당시에는 홍콩과 미국 액션 영화가 인기가 많았었는데, 아빠의 취향은 확고했다. 홍콩영화는 시시하다면서, 미국 액션 영화만을 선택했다. 배우 이름도 기억을 못 해서, 항상 비디오 가게 사장님하고 대화를 통해 비디오를 선택했다.


"그 3자 이마 나오는 놈 비디오로 줘요"

"아, 브루스 윌리스요? 다이하드 드릴게요"

"얼굴 긴 놈 나오는 걸로 줘요"

"아, 니콜라스 케이지요? 페이스오프 이번에 인기 많아요"


집에 도착하면, 나는 비디오 클리너로 한번 비디오 기계를 세척을 하고, 비디오를 틀었다. 그리고 6명의 가족은 TV앞으로 모여들어 각자 편한 자세로 누워서 비디오를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얼마가 또 지났을까, 아빠는 영화 보면 꼭 잔다고 비난하던 엄마의 코 고는 소리가 또 들려온다. 비디오가 끝난 후, 아빠한테 비디오 어땠냐고 물어보면 늘 이 소리를 반복한다. 시시하다고 별로다라고 비현실적이라고.


아빠는 비디오에서 들은 영어 대사 몇 개를 들리는 대로 외워서 썼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 2개 단어가 생각이 난다. 첫 번째는 "디메이스테잌", 사실 지금도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아빠는 저 말이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라고 하셨는데, 영어를 어느 정도 배워도 생각나는 단어가 없다.


또 다른 단어는 "비 사일런스", 조용히 하라는 말을 정확히 알고 쓰셨다. 아빠는 저 두 가지 단어를 조합해서 주로 엄마가 아빠한테 잔소리할 때 쓰셨다.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면서 액션 영화배우처럼 엄마한테 손짓과 음성으로 말했다. "디메이스테익, 비 사일런스"라고 말이다. 그러면 엄마가 저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면, 아빠는 뜻을 끝까지 안 알려주고, 비디오 분명 같이 봤는데 뜻도 모른다고 또 놀리셨다.


내 기억 속에 엄마, 아빠는 영화관에 가본 적이 없다. 정말 유명한 영화나, 부모님 세대가 좋아할 만한 영화가 개봉하면 한 번씩 영화 보러 가자고 해도, 엄마 아빠는 요지 부동이었다. 집에서 비디오만 봐도 자는데 영화관을 돈 아깝게 뭐 하러 가냐고 하셨다. 어린 시절 비디오가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추억인데, 엄마 아빠는 자식들을 위해 억지로 본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지금은 넷플릭스와 같은 OTT서비스가 정말 편하게 잘 되어있다. 합리적인 가격에 다양한 종류의 콘텐츠를 편하게 원하는 방법으로 시청할 수 있다. 비디오가게에 가서 비디오를 빌리고, 집으로 가져와서 영화를 보고, 또 반납을 하러 가는 일련의 과정과는 비교할 수 없이 편해졌다. 그런데 뭔가 모르게 조금 아쉽다. 비디오가게가 지금 하나도 없는 게 무언가 모르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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