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촌, 골목 끝 집
어렸을 때 TV에서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도심 골목 주택가를 배경으로 하나의 단독주택에서 세 가족이 살아가면서 겪은 에피소드들을 재미있게 방송한 서민 드라마이다.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없지만, 우리 집도 한 지붕 세 가족이 살았었기에, 그 드라마의 제목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우리 집은 주택가 단지의 골목 끝으로 가서, 그 골목의 끝에 있는 집이었다. 배달음식이나 택배를 주문하면 항상 우리 집을 잘 찾지 못해, 그분들에게 항상 죄송한 마음이 있을 정도로 찾기 어려웠었다. 그 작은 집에 세 가족, 14명이 모여 살았다. 1층 우리 집에 엄마, 아빠, 그리고 우리 4남매 딸딸아들딸, 2층 집에 살고 있었던 신혼부부와 어린 아들, 별채에 손주들 학교 때문에 시골에서 올라온 할머니와 4남매까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좁고 작은 집에 참 많은 사람이 살았었다.
글로만 보면 우리 집이 엄청 크고 집주인 행세라도 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내가 태어났을 즈음에, 엄마는 집을 대책 없이 계약했는데 수중의 돈을 다 모아도 돈이 모자랐다고 했다. 그래서 두 집에게 전세금을 받아 집을 겨우 사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환경이 참 좋았다. 엄마가 말하길, 나는 어렸을 때, 심심하면 할머니 별채에 가서 놀다가, 또 심심하면 2층 또래 아이와 놀다가, 또 심심하면 가족들과 놀다가 나름 바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우리 골목에는 정말 많은 가족이 함께 살았다. 옆집 김사장 아저씨, 옆집 2층에 건우형, 건택이형네, 앞집 조 선생님 가족, 대각선 집에 석종이형 가족, 두 집 건너면 같은 학교 다니는 은지, 광택이형네 가족, 그 옆집에는 누나 친구 인영이 누나, 동원이형 가족, 그 옆집엔 학교 후배 선영이, 민영이 등, 한 골목에 사는 가족들이 저녁이면 골목 평상에서 모여서 이야기 나누고, 오다가다 안부를 묻고, 같이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그 시절 문화촌 골목은 참 정겨웠고, 사람 냄새나는 곳이었다.
따뜻한 골목에 비해 우리 집은 많이 추웠다. 실제로 추웠다. 어렸을 때 시골 부잣집에서 태어난 엄마는 결혼 후에 정말 악착같이 절약하면서 살아왔다. 아빠가 외벌이 었던 탓에 4남매를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겨울에 연탄 값을 아끼기 위해 아빠, 엄마, 딸딸아들딸은 안방 한 곳에서 모여 겨울을 보냈다. 부엌, 거실, 화장실이 너무 추웠다. 화장실이 너무 추워 가기 싫어서 소변을 참은 적도 있었다. 친구네 집은 연탄보일러가 빵빵한데 우리 집은 맨날 춥다고 불평불만을 토로할 때마다, 엄마는 내복과 외투, 이불을 줬다. 그런데 그때는 나는 방안에서만 있어서 몰랐다. 결국 추운 부엌에 있는 사람은 엄마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나는 늦둥이 아들이다. 엄마랑 아빠는 큰 누나와 작은 누나, 딸 둘을 낳았는데, 원래 더 이상은 자식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아선호 사상을 가지셨던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내가 세상에 태어났고, 아들을 낳아서 너무 행복했던 아빠, 엄마는 아들을 하나 더 가지고 싶었는데, 결국 여동생이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딸딸아들딸, 4남매가 완성되었다.
큰누나는 우리 집에서 큰(언)니라고 부른다. 작은 누나도 마찬가지다. 짝(은언)니라고 부른다. 큰니, 짝니는 나하고는 나이차이가 제법 있는 편이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 일 때, 큰니는 대학생, 짝니는 고등학생이었으니, 내가 꽤 늦둥이인 편이다. 거기에다가 나랑 2살 터울인 여동생이 있으니, 큰니와 여동생은 16살 차이가 난다.
이런 가족 구성원과 집안 환경은 우리 가족에게 소통의 힘을 주었다.
우리 가족은 각각 개그욕심이 있는 편이다. 좁은 공간에서 여섯 식구가 모여 살았으니,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재미가 없었으면 안 되었고, 단체생활의 센스가 필요했으며, 눈치 싸움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집 밖에 나가면 돈이다"라는 엄마의 구호아래 대부분의 주말에는 우리 가족은 집 안방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나는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것이 너무 심심했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가족들한테 물어보면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 심심해.."
"부엌 가서 소금 먹어"
포기하고, 큰니에게 놀아달라고 청해 본다.
"큰니, 심심해.."
"잠깐 나와볼래? 부엌에 재미난 거 있는데"
라고 따라나가면 소금을 주었다. 짝니한테 놀아달라고 청해 본다.
"짝니, 심심해.."
"나 주머니에 장난감 있는데, 잠시만"
라고 주머니를 보면 소금이 있었다. 나만 당할 수 없어 동생에게 물어보았다.
"야, 심심하지?"
"오빠, 엄마가 심심하면 소금 먹으래"
과연 이해는 하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아빠를 찾아가 본다.
"아빠, 심심해.."
"얘들아, 아직 소금 안 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