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그림일기]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새 신을 신고 달려보자 휙휙
단숨에 높은 산도 넘겠네
신발 사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발이 콤플렉스라서. 내 발 사이즈는 250mm, 여성 기성화 상한선에 걸쳐 있다. 그러니 신발 가게 진열대 위에서 위풍당당 모습을 뽐내는 귀엽고 예쁜 신발에 눈독을 들여봤자 별 소용이 없다. 일단 내 사이즈로는 아예 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손님 이건 주문 따로 하셔야 해요), 운 좋게 사이즈가 있다고 해도 내 발을 신발에 넣어보면, 상상했던 그 모습이 안 나온다(패션의 완성은 얼굴, 신발의 완성은 발). 게다가 용기를 내서 신발을 신어보려 할 때마다 보게 되는 점원의 반응도 별로 마음에 안 든다(손님 생각보다 발이...). 아니 저도 제가 이렇게 자랄 줄 몰랐거든요, 대꾸해주고 싶은 걸 꾸욱 참는다.
사실 누가 봐도 그렇다. 발 길이가 이 정도로 길면 키가 한 170cm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내 키는 163cm. 그것도 남보다 늦게 꾸역꾸역 대학생 시절까지 자란 키다. 그렇다고 평생 키에 비해 발이 컸던 것 같지는 않다. 그냥 평범하게, 남보다 키가 작았다. 뭐 아마 발이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게 크지도 않았지 싶다. 적어도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발에 대해 고민해본 일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마법처럼 발 길이가 쑤욱 길어진 날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어느 날이다. 어린 시절 나는 잔병치레를 안 하는 대신 1, 2년에 한 번 꼴로 호되게 아프곤 했다. 그날은 심한 열감기로 밤새도록 앓고, 학교에도 가지 못한 채 거실 소파에 축 늘어져 있었다. 병원에 가자고 했던가 밥을 먹으라고 했던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엄마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너무 어지러워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을 바라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무릎 아래로 삐죽이 나온 내 발이 영 낯설었다. 가만히 발을 바라보다 깨달았다. 어제까지 이 각도에서는 볼 수 없던 발 뒤꿈치가 쑤욱 뒤로 나와 있었다.
"엄마, 나 발 뒤꿈치가 갑자기 튀어나왔는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진짜야. 어제까진 안 이랬는데 갑자기 길어졌어."
"무슨.... 진짜 그런 것 같네?"
그 뒤로 내 발이 어떻게 자란 건지는 모르겠다. 그날 길어진 건 뒤꿈치였는데, 성인이 된 지금 내 발을 보면 발가락이 참 길다. 발가락이든 발꿈치든, 그날 이후 내 발은 쑥쑥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된 뒤로는 늘 '키에 비해 발이 큰 여자애'였다.
그런 이유로 평생 신발 욕심이 별로 없는 내 머릿속에 몇 달 동안 동동 떠다니던 신발이 있다. 발에 꼭 맞는, 새하얀 운동화. 미운 내 발도 좀 작아 보이게 감싸주고,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든 신이 날 만큼 가볍고 편안한 운동화. 몇 주 전 잠 안 오던 밤, 스마트폰으로 웹서핑을 하다 꼭 그 상상처럼 생긴 운동화를 발견했다.
이건 사야 해.
그래서 망설임 없이-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에-운동화를 샀다. 며칠 뒤 기다리고 기다리던 운동화가 집에 도착했다. 다행히 신발은 발에 맞춘 듯 꼭 맞았다. 따뜻한 봄볕 쬘 때 신고 다녀야지. 새하얀 운동화를 신발장에 모셔둔 채 몇 주를 더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 운동화 개시.
칙칙한 회색 아스팔트 위로 하얗게 빛나는 운동화가 눈에 들어올 때마다 신났다. 걸어갈 땐 일부러 흘깃 내 발을 훔쳐보며 걸었다. 어디로 무슨 일을 하러 가든 신나게 폴짝폴짝 뛰어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여간해선 부를 일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파알짝) 도심 한복판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저녁 늦게까지 사무실을 지켰다. 온종일 책상 그림자에 묻힌 채 바닥에 붙어 있던 내 운동화. 퇴근길에 더 하아얗게 빛났다. 약 오르게.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신고 나간다. 새 신이든 헌 신이든 이렇게 발에 꼭 맞고 마음에도 꼭 맞는 신발을 만나긴 어려우니까. 이 신발이 헌 신이 된 뒤에 머리가 하늘에 닿을 수도 있고, 단숨에 높은 산을 넘을 수도 있잖아. 때 타면 칫솔로 박박 닦아 새 신처럼 만들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