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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Apr 01. 2020

눈물에 엄격한 사회

세 번째 기록

 나도 모르게 눈에 땀이 차올랐다. 눈물이 고였다는 얘기다. 이유인즉슨 심심풀이로 보던 영화의 한 장면에 깊은 감동을 받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 같이 울지는 않았다. 난 어른이니까. 베갯잇에 눈물 자국 아직 안 말랐다. 눈에 찬 땀 때문에 흐릿한 시야로 영화 감상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땀이 아니라 눈물이라고 왜 말을 못 해! 나이가 몇인데 아이들 보는 전체 관람가 애니메이션을 보고 눈물을 흘리나. 눈물 찔끔 흘려가며 봤던 겨울왕국2는 애니메이션으로 안 쳐주나 보다. 참, 영화는 심심풀이로 봤던 것보다 훨씬 걸작이었다. 영화 '코코' 추천드린다. 담담한 척. 누가 자꾸 끼어드는 기분인데... 아무튼, 오늘의 문화생활 끝.




 다행히 본인은 이중인격이 아니다. 그저 영화를 보고 난 어젯밤 생각의 흐름일 뿐이다. 이는 영화의 슬픈 장면을 보면서도 습관적으로 눈물을 참았던 내 모습으로부터 물꼬를 튼다. 나는 언제부터 눈물을 참았을까. 생각해보면 열두 살 때 짱구 극장판을 보러 가서도 시큰해져 오는 콧잔등을 애써 진정시켰던 것 같다. 아니, 그보다어렸을 열 살 즈음에 내키지 않는 그림을 억지로 그리면서 짜증이 담긴 눈물을 참았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눈물이 많은 성격이었던 탓에 언제부터인지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눈물을 참았는지에 초점이 옮겨진다. 약해 보일까 봐? 아님 창피해서? 이건 내 생각인데, 아마 우리는 울면 안 된다고 배웠기 때문일 거다.


다 큰 애가 우냐. 어린애도 아니고.
찌질이들이나 우는 거야. 울지 마.
남자가 돼서 눈물 보이면 쓰나.


 아이들은 이런 말을 수시로 들으며 큰다. 나도 그랬고, 내 부모님도 그랬을 것이다. 원체 눈물이 많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꾸만 내 성격을 미워했다. 울지 않으려 해도 절로 눈물이 나는데, 그럼 나는 태어나기를 찌질하게 태어난 건가. 다른 애들은 왜 눈물이 없을까. 역시 내가 이상한 거네. 이제 죽기 살기로 눈물을 참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감성적인 성격으로 얻은 게 꽤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 감성 덕분에,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데도 말이다.


 여태껏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 눈물은 미성숙의 증거라고 여겨진다. 비보 앞에 흘리는 눈물을 제외하고 말이다. 아이들이 즐겨 부르는 크리스마스 캐롤인 '울면 안 돼' 있지 않나. 그 짤막한 노래에 울음을 부정하는 노랫말 투성이다. 머리가 크고 보니 의문이 생기더라. 왜 울면 안 되는데? 울면 왜 선물을 안 주는데? 산타 할아버지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시네...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민증 잉크가 '갓' 마른 '갓' 어른으로서, 어릴 때일수록 감정 표현에 솔직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른이 되면 어차피 숨겨야 할 감정, 어릴 때나마 실컷 표현하는 게 맞지 않나. 물론 알고 있다. 작디 작은 아이들에게도 나름의 사회가 있고, 그 곳에서도 눈물은 약점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른의 세상이 먼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눈물을 눈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상대방이 눈물을 터뜨리면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갈래는 두 가지로 나뉜다. 머쓱한 듯 괜히 상대방을 타이르거나, 어색하더라도 따듯한 손길로 상대방을 위로해주는 것. 전자는 언제나 우는 이를 탓하며 상황을 무마시킨다. 나이를, 성별을, 때로는 미래를 언급하며 울음을 창피한 것으로 간주한다. 고등학생이나 돼서 우냐. 남자가 울면 안 된다. 저렇게 눈물이 많아서 사회생활 잘하겠냐. 그 땐 몰랐는데, 이젠 그런 말들이 이상하게만 들린다. 일말의 감정조차 용납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다. 너무나 당연한 감정 표현인데 말이다. 눈물에 공감해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울까. 얼마나 속앓이를 했길래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릴까 하며 따듯하게 한 번 안아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다행히 사회는 조금씩 바뀌고 있는 듯하다. '울면 안 돼!'에서 '가끔은 울어도 돼.'로 향하는 발자국을 종종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나는 '울면 안 돼!'가 뇌리 속에 콕 박혀 버린 어른이 되었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눈물을 마냥 부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참으면 병 난다. 눈에 고이는 땀도 종종 시원하게 배출해줘야 하는 법. 다만 눈물을 무기로 삼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과장된 감정 내지 거짓 눈물로 동정을 얻어보고자 하는 사람들. 가끔은 이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눈물에 엄격해진 것은 아닌가 싶다.


 어른이라고 완전히 성숙한 존재는 아니더라.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나누는 건 사실 성숙이 아니라 미성숙의 정도일지 모른다. 그러니 어른이라고 눈물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들 숨길 뿐이다. 하품하는 척하며 눈물을 숨기고, 눈이 간지러워서 비비는 척하며 눈물을 닦아낼 뿐이다. 그러다 정말 힘든 날에는 방에서 이불 덮어쓰고 소리 없이 울기도 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다들 그렇게 살아가나 보다. 이 울보 찌질이가 어른들의 수고에 응원을 보낸다. 그리고 감히 말씀드린다.


 가끔은 울어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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