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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Jun 13. 2021

카네이션이 날 부끄럽게 만들 줄이야

열여덟 번째 기록

    1년 동안 일했던 학원을 덜컥 그만둔 이유는 업무에 권태가 느껴지는 바람에 색다른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 왔듯 세상 일이 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음을 명심했어야 했다. 호기롭게 알바몬을 깔고 관심 있는 곳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메리카노도 못 만드는 나에게 카페 알바 자리가 선뜻 들어올 리가 없었고, 그렇게 나는 두 달째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한 방구석 휴학생이 되어버렸다.


    어찌어찌하다 베이커리에서 연락을 받았지만 근무 환경에 경악을 금치 못해 오래 일하지 못했다. 도저히 음식을 파는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위생 상태에 인성을 밀가루랑 같이 반죽해 버린 건지 폭언을 일삼는 점장, 그리고 근로기준법 따위 죽 쑤어버린 복지. '다시 보니 선녀'라고 했던가. 그만뒀던 학원이 얼마나 좋은 근무 환경이었는지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그만둘 때는 온갖 비아냥과 욕을 한 바가지로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고작 그게 무서워서 계속 일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요식업에 호되게 데이고 나니, 결국 다시 학원가를 찾게 되더라.


    돌고 돌아 정착한 곳은 이웃 동네에 있는 학원이었다. 이전에 있던 학원에서는 학생들 시험을 봐주는 일을 주로 했었는데, 여기는 많아봐야 10살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이기 때문에 업무가 상당히 달랐다. 셔틀에 동승하여 아이들 승하차를 도와주는 게 주된 일이었고, 비는 시간에는 학원 청소나 간단한 서류 업무를 하면 됐다. (학원 셔틀 알바한다고 말했더니 셔틀 '운전' 알바로 착각하고는 면허 딴지 얼마 안 됐는데 써 주는 데가 있냐고 놀라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모든 곳이 그렇듯 처음 한 달 동안은 그야말로 바보였다. 인원 체크도 제대로 못하고,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복사기는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다 보니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만 굴뚝같았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한 달 정도 지나니 업무가 몸에 익어서 전보다는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 물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하루도 빼먹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역시 나태는 인간의 본성인 건가.


    업무는 완벽히 숙지했지만 아이들 마음까지 숙지하는 건 무리였다. 아이를 돌보는 동안에는 한순간이라도 눈을 뗄 수가 없다는 말 솔직히 반신반의했는데 이제는 맹신한다. 진짜.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하는 게 아이들인 것 같더라.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고, 문이 열리자마자 뛰쳐나가고, 그러다 밀고 밀리고 넘어지고... 어디 이것뿐이겠나. 누구 하나라도 앉고 싶은 자리를 고집하면 아무도 셔틀을 못 탄다. "지금은 뒤에 친구들도 타야 되니까 우선 아무 데나 앉고, 다음에 여기 앉자."라고 회유하면 자리를 양보하는 아이들도 있는가 하면 끝까지 자리를 비키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그럼 자리가 떡하니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보조 좌석을 펼쳐야 된다. 나도 나름 고집 센 성격으로 자랐기에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어렸을 적 부모님과 선생님들에게 한없이 죄송해질 따름이다.


    아이들을 타이를 때는 목소리 높이지 말고 짜증 내지 말자고 늘 다짐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아주 가끔 있다. 줄을 서지 않고 도로변으로 뛰어가서 셔틀을 먼저 타는 아이들이 있는데, 셔틀이 갓길에 정차되어 있더라도 인도에서 자전거나 오토바이와 부딪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매번 단호하게 타이르는 편이다. 하지만 자주 통제를 벗어나는 아이들에게는 단호함이 되려 예민함으로 변해 타이르는 게 아닌 잔소리를 하게 된다. 그 이후부터는 말을 잘 듣지만, 사실 그렇다고 마음이 편치는 않다. 괜히 잔소리를 했나, 한 번만 더 차분하게 타이를 걸 그랬나. 퇴근길마다 후회하며 내일부터는 더 친절하게 대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5월이 되었고, 스승의 날이 다가왔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한 아이가 나에게 카네이션을 건넸다. 그 아이는 원체 베푸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저 내가 '선생님'이라 불리기에 카네이션을 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조그만 카네이션 하나가 새삼 크게 느껴졌다. 이렇게 부족한 나라도 선생님이라 생각해 주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지더라. 내가 과연 카네이션을 받을 자격이나 되는 걸까.

    아이들은 모든 게 궁금할 시기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해야 10년 정도밖에 안 살아봤지 않나. 20년 넘게 산 나조차도 세상에 모르는 것 투성인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되 아이들의 호기심을 존중할 것. 몇 개월간 일하며 내 나름대로 굳어진 마음가짐이다.


    내일도 다시 출근이다. 출근길은 싫지만, 막상 출근해서 아이들을 만나면 그 귀여움에 녹아내릴 수밖에 없다. 내일은 아이들의 말에 조금 더 귀 기울여야겠다. 그렇게 원하던 자리에 앉혀 주기도 해야 되고. 부디 내일은 아이들의 웃는 모습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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