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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Nov 20. 2017

외로운 시계탑 하나

어쩌면 또 하나의 랜드마크가 되었을지도 모를

직물회관(수키엔니체) 뒤로 보이는 뾰족 솟은 탑을 향해 걷는다. 직물회관 왼편 끝에 다다르자 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크라쿠프 구시청사 탑(Town Hall Tower).

폴란드어로 라투슈초바 탑(Wieża Ratuszowa)이라고 하는 이 시계탑은 과거 크라쿠프 시청사의 유일한 흔적이다. 하얀 돌과 붉은 벽돌이 불규칙적으로 뒤섞인 것은 아마도 보수의 흔적인 듯싶다. 오랜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오면서 많은 풍파를 겪었나 보다.


약 70m 높이의 탑은 광장 어디에 있어도 잘 보이지만 얇고 가느다란 로켓처럼 생긴 것이 어쩐지 외로워 보인다.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에서, 성 마리아 성당과 직물회관이 많은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을 때 구시청사 탑은 직물회관 뒤에서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 왠지 그 모습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 불의의 사고만 아니었다면 성 마리아 성당, 직물회관, 시청사, 이렇게 셋이서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의 랜드마크 삼총사가 되었을 텐데...


직물회관 뒤편으로 모습을 드러낸 구시청사 탑
크라쿠프 시청사의 원래 모습

 

지금은 크라쿠프 시립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구시청사 탑은 여전히 크라쿠프의 대표 관광 명소이기는 하다. 하지만 실제로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탑의 사진을 찍거나 혹은 탑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는 것에서 그친다.


이처럼 외롭게 시계탑만 남겨진 사연은 이렇다.

19세기경 크라쿠프 의회는 시청사 건물 중 일부인 곡물창고를 철거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철거 간에 시청사까지 파손이 되면서 결국 시청사 전체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후 홀로 남겨져 무용지물이 된 탑 역시 철거를 하려 했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무산되어 현재는 시립 박물관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사연을 알고 나니 왠지 더 외롭고 처량해 보인다.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에 난 탑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탑을 오르는 통로, 사람 한명 딱 들어갈 정도의 넓이다


1층은 원래 보물창고로 경비병의 귀중품과 휘장을 보관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매표소로 운영되고 있을 뿐 보물창고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위로 올라가는 좁은 통로로 들어가니 가파른 돌계단이 나온다. 탑 꼭대기까지는 계단이 총 110개라고 한다. 계단 가운데가 유독 닳아 있는 것이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오르내리며 발을 디뎠음을 말해준다.

탑을 오르는데 필요한 건 튼튼한 하체, 미끄러지지 않는 신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 양보의 미덕이다. 사람 한 명 딱 들어갈 정도의 넓이밖에 되지 않아 올라가는 도중 내려오는 사람을 만나면 둘 중 한 사람은 잠시 비켜서야 한다.

층간 사이 철창으로 보이는 구시가지 광장을 바라보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철창 사이로 들어오는 빛 때문인지 광장의 모습이 평온하고 따듯하게 느껴진다.



1층 위의 방은 크라쿠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 양식 인테리어의 방이라고 한다. 방에는 크라쿠프의 역사와 관련된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쉽게도 영어 설명이 없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옛 크라쿠프와 시청사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만으로도 대충 짐작이 간다. 아마 과거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의 모습과 시간에 따른 변천사이지 싶다.


크라쿠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고딕양식 인테리어로 꾸며진 방


2층은 과거에 레스토랑으로 운영되었던 방이라고 한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어 어두컴컴한 방을 로맨틱하고 신성한 분위기로 만든다. 쟁반 같은 접시에 주먹만 한 고기 한 덩이 놓고, 칼질하며 와인 한 잔 즐기기에 딱 좋은 분위기다.

3층은 벨베데레 스타일의 방으로 안에는 중세시대 시의회 의원들의 복장이 걸려있다. 머리 없는 마네킹에 걸려 있는 모습이 음산하다. 악령을 부르기 위해 모인 검은 사제들 같다고나 할까?



110개의 계단을 모두 올라 드디어 꼭대기에 도착했다. 사면으로 작은 전망대 있다. 돌계단을 밝고 올라야 볼 수 있는 전망대 밑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성 마리아 성당이 보이는 방향의 전망대가 상대적으로 줄이 길다. 난 사람이 없는 쪽부터 먼저 공략했다.


구시청사 탑 전망대 위에서 바라본 크라쿠프는 따듯했다. 3월 말, 우리나라 초겨울 날씨에 여려 겹을 껴입은 내 옷차림이 무색하게도 내 눈에 들어오는 크라쿠프의 모습은 온화한 초봄 같다. 완연한 봄 말고 아직은 꽃들이 덜 피어난 초봄. 알록달록 화려하고 선명한 색보다는 은은하고 옅은 파스텔톤. 그렇기에 자극적이지 않다. 휘황찬란한 간판과 네온사인에 지쳐있던 내 눈이 모처럼 휴식을 취한다.


난간에 살짝 기대어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크라쿠프를 바라본다. 기분이 아주 평온하고 좋다. 이래서 여행에도 휴식이 필요한 것 같다. 이 곳까지 오기 위해 110개의 돌계단을 밟은 보람이 있다. 중세시대에서 시간이 멈춘 크라쿠프처럼 지금 이 순간, 나의 시간도 멈추었으면 좋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시청사 탑을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 찾는 사람이 더 많아질수록 크라쿠프에서도 이 곳을 더 집중적으로 유지, 보존하지 않을까? 어쩌면 무너졌던 시청사 건물이 다시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다시, 탑을 내려간다.

아쉬운 마음에 한층 한층 내려갈 때마다 보이는 따듯한 크라쿠프를 눈에 한번 더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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