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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Sep 12. 2024

밤의 비엔티안에서

한밤중 로컬 차력쇼를 보게 될 줄이야

비엔티안 왓따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라오스 국민맥주 비어라오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조금이라도 빨리 맥주로 목을 축이고 싶어 입국심사를 기다리며 철새처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줄을 옮겨 다녔다. 그 결과 남들보다 더 빨리 통과하기는커녕 입국심사를 마쳤을 땐 내 뒤에 아무도 없었다는 가슴 쓰라린 전설. 어쭙잖은 철새가 될 바에야 인내심을 가지고 한 우물을 파는 게 인생 진리인가 보다.

철새의 말로, 다들 어디갔지? 벌써 다 갔나?

소소한 인생교훈과 함께 공항을 빠져나오자 습한 동남아 공기가 볼따귀를 때렸다. 이윽고 온몸으로 습기가 파고들었다. 뽀송했던 피부가 미스트를 맞은 듯 서서히 촉촉해졌다. 건조한 겨울나라(1월의 한국)에서 온 지라 처음에는 따듯하니 좋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금세 불쾌지수 수직상승. 어디든 빨리 에어컨 빵빵한 실내로 들어가고 싶어졌다. 이번 여행에서 총무를 맡은 니나킴이 택시를 불렀다. 일단 아내와 내가 먼저 선발대로 출발! 선발대에게는 막중한 임무가 있었으니, 먼저 예약한 숙소가 맞는지 확인한 후 다음은 근처 편의점에서 비어라오를 사는 것이었다. 공항에서 약 10분여를 달려 도착했다는 택시기사님의 말에 내리자마자 숙소 간판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외벽 어디에도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택시한테 당한 건가? 싶었지만 환하게 불이 켜진 로비 안을 보고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제야 어둠 속에 가려진 간판도 눈에 들어왔다. 기사님, 컵짜이 라이라이!(대단히 감사합니다!)

숙소 가는 길, 택시로 이동 중
원 비엔티안 호텔 One Vientiane Hotel

이제 비어라오를 구하러 갈 차례. 마침 숙소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 환하게 불이 켜진 가게가 보였다. 24시 편의점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에 이끌려 아내와 난 빛을 향해 직진했다. '미니 빅씨(Mini Bic C)'. 예상 적중! 들어가자마자 주류 코너로 돌진했다. 정갈하게 진열된 맥주들을 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났다. 다른 맥주들은 제쳐두고 비어라오만 공략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오리지널 비어라오 말고도 화이트, IPA, 다크, 골드 4종류나 있었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이건 또 못 참지! 여행하는 동안 반드시 종류별로 다 맛보리라 다짐하면서 일단 후발대원들의 주문을 받았다. 다들 예상치 못한 다양함에 잠시 선택장애에 빠진 듯했으나 여정으로 지쳐있는 만큼 확실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선택을 했다. 먹어본 맛인 오리지널과 안 먹어봤지만 어느 정도 호불호 없이 예상이 가능한 맛인 IPA와 화이트를 샀다. 라오스에서의 첫 쇼핑 완료! 맥주의 시원함이 사그라들까 무서워 빠르게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비어라오 구하기
비어라오만 있는 건 아니지만 라오스에선 역시 비어라오

숙소에 다다랐을 즈음 후발대인 니나킴, 배슨생, JYP도 막 숙소에 도착했다. 나이스 타이밍! 봉지에 한가득 담긴 비어라오를 보고는 다들 지쳤던 얼굴에 급화색이 돌았다. 배슨생 픽으로 선정한 숙소는 로비에서부터 깔끔함이 묻어났다. 비엔티안에서는 사실상 잠만 자는 일정이었기에 가성비를 위주로 골랐는데 룸컨디션 또한 나쁘지 않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로비 전경1
로비 전경2
기본에 충실했던 심플&깔끔st 룸

짐을 내려놓고 더 텐션이 떨어지기 전에 한 방에 모였다. 라오스 도착 기념이자 라오스 청춘여행의 시작을 자축할 시간. 그런데, 방에 병따개가 없다. 에이~ 설마. 이 방에만 없는가 싶어 내 방으로 가서 찾아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음... 그럼 로비에는 있겠지. 그래도 간판이 호텔인데 없겠어? 야심 차게 로비로 내려가 프런트에 문의했다. 직원은 찾아주겠다며 영업이 끝나 불이 꺼져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설마 식당에도 없는 건가...?' 돌아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도 커졌다.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표정과 함께 빈손으로 나타나는 직원. 난 바로 플랜 C를 위한 짱구를 굴리기 시작했다. '편의점에라도 가지고 가서 따와야 하나?', '하... 평소에 숟가락으로 따는 법이라도 배워둘걸.' 하는 갖가지 생각과 후회가 밀려왔다. (이게 뭐라고) 세상 꺼진 듯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날 보고 있던 직원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아니면 제가 따 드릴까요? 사실 병 두 개만 있으면 딸 수 있어요."

"네? 병으로 병을 딴다고요?"

"네^^"


살면서 이런저런 도구를 이용한 병맥 오픈쇼를 봐왔지만 병맥으로 병맥 따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설마 그냥 병을 뽀개버리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가능만 하다면야 현재로서는 최선이었기에 기대 반 의심 반으로 손에 들고 있던 비어라오 봉지를 직원에게 건넸다. 과연, 될까? 아니 제발 돼라~~~


뽕!


병맥으로 병맥을 따는 진귀한 광경. 사실 병뚜껑을 따는 원리는 다들 알겠지만 도구가 무엇이든 다 똑같다. 지렛대의 원리. 해서 병맥으로 어떻게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할까? 이게 될까? 하는 의구심이 컸는데 눈앞에서 너무나 쉽게 병뚜껑을 날려버리는 것을 보니 혹시 이 사람, 과학 영재인가? 아니면 술 좀 마실 줄 아는 주당인가? 하는 또 다른 합리적 의심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한 병은 어떻게 따요?"


그는 나의 돌발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따진 병뚜껑을 하나 집어 들어 기타 피크처럼 잡고는 뻥! 속이 다 시원하게 다 따 버렸다. 처음엔 방에 병따개가 없는 게 실망스러웠지만 뜻밖의 병맥 오픈 차력쇼를 보고 나니 오히려 좋았다. 아니었으면 몰랐을 병맥을 따는 새로운 방법. 축구 잘하면 다 형이 되는 것처럼 순간 형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땡큐 브라더! (엄지척)"


비어라오 오픈 차력쇼쇼쇼!




비어라오 각 1병씩. 짧고 굵게 라오스 청춘여행 자축 세리머니를 끝내고 배슨생과 난 씻기 전 밤 잠깐 밤마실을 나갔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숙소 주변 탐방을 꼭 하곤 하는 여행루틴이자 취향이 서로 딱 들어맞았던 것. 비엔티안에서도 거를 수 없었다. 자정을 넘긴 비엔티안은 클럽이나 펍을 제외하고는 모두 셔터를 내린 상태였다. 정말 잠깐 산책만 하러 나온 건데 나도 모르게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의 문을 열고 말았다. 사람들은 누가 들어오는지 신경도 안 쓰고 다들 한껏 그루브에 심취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청춘여행이고 뭐고 그냥 여기서 마시고 놀다 가고 싶었지만(사실 그래야 진짜 청춘여행인데), 내일의 체력의 비축해두어야 하는 마음만 청춘이기에 아쉬움을 뒤고 하고 돌아섰다. 다음이 또 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만 다음을 기약해 보며...

두둠칫, 두둠칫. 한잔 하며 놀고 싶었던 숙소 근처 바&클럽 (CCC Bar & Club Vientiane)
자정을 넘긴 비엔티안의 밤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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