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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국수와의 불편한 재회

세계로 뻗어 나온 K-진상 목격담

by 트래볼러

4일간 라오스 여행을 하며 먹었던 것들 중에 라오스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먹고 싶은 게 있냐는 질문에 우리 다섯 청춘들의 대답은 만장일치 도가니국수였다. 당시에 배가 제법 고팠었고 라오스에서 먹는 첫 음식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그만큼 임팩트가 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팩트다. 그래서 이번 라오스 청춘여행의 마지막 저녁 만찬으로 비엔티안의 도가니국숫집을 다시 방문했다.

이틀만에 재방문, 라오스 비엔티안 도가니국수

고작 이틀 만에 다시 찾은 도가니국숫집이지만 두 달 만에 온 것처럼 감회가 새로웠다. 노포 바이브가 넘쳐흐르는 외관, 야외 테이블에 놓인 빨간색 플라스틱 의자, 미소 짓고 있는 사장님 사진, 한글 메뉴판, 후각만으로도 깊이가 느껴지는 구수한 고깃국의 찐한 냄새까지 모든 게 다 반가웠다. 이틀 전 아침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장사가 잘 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내가 다 기분이 좋았다.

두 번째 방문인만큼 능숙하게 주문을 마쳤다. (마치 단골인 듯) 늘 먹던 걸로. 1인 1국수에 수육 두 접시, 그리고 비어라오 두 병. 여기에 이번에는 소주도 시켰다. 비어라오로 말아먹는 소맥의 맛이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무사히 끝나가는 우리의 여행을 자축하는 동시에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이틀 만에 먹어도 역시 대존맛!

다시 만난 도가니국수와 영롱한 수육의 자태도 역시나 반가웠다. 국물 한 스푼 떠서 츄릅, 면과 고기를 같이 집어 입속으로 호로록, 마무리는 라오스 대표 비어라오와 한국 대표 소주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특제된 소맥으로 깔끔하게 캬아~ 짜파게티에 파김치만큼이나 완벽한 조합이었다. 이 맛, 그리고 이틀 전 이 맛을 느끼며 행복했었던 기억도 되살아나 반가웠다. 하지만 반가움은 딱 여기까지. 갑자기 시베리아 기단이 들이닥친 듯 식당 안 공기가 갑분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데시벨 높은 한국어와 라오어가 번갈아가며 귀에 꽂혔다. 라오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사장님의 몸짓과 표정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난 분명 작은 거 시켰는데 큰 거 준거 아니야!?"

"*@&$*&#@^*&#!"

[아니요, 분명히 큰 거 시키셨어요!]


"내가 언제?! 너네가 주문 잘못 받은 거지!!!

(큰 그릇과 작은 그릇을 가져오며)"*@&$*&#@^*&#!"

[보세요, 이게 큰 거고 이제 작은 거예요. 손님이 드신 그릇은 큰 그릇이라고요!]


"(호통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그 따위로 장사하지 말어! 누굴 속여먹을라고!!! 내가 인터넷에서 너네 수법 다 봤어! 작은 거 시켜도 큰 거주고 큰 거 값 받는다고"

"(탁자를 쾅 치며)*@&%&@^%&^"

[어딜 그냥 가요! 돈 내고 가요!!!]


한국어의 주인공은 나이 제법 지긋하신 할아버지에 가까운 아저씨였다. 행색과 혼자인 걸로 봐서 여행자는 아닌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 그리고 나보다 나이도 많으신 어르신을 내 잣대로 판단하는 게 좀 그렇지만 딱 봐도 불통에 꼰대끼가 철철 넘쳐흘렀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시작부터 제대로 파헤쳐 봐야 알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쨌든 손님이 진상이라는 것. 손님으로서 컴플레인은 충분히 걸 수 있지만 명백하고 논리적으로 따져 의사를 전달해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는 것이 컴플레인인데, 아저씨는 그냥 화만 내고 본인의 감정만 거칠 게 내뱉었다. 컴플레인도 결국엔 대화인데 대화하려는 태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먹튀 하려고 일부러 저러나 싶기까지 했다. 물론 찐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 나의 근거 없는 의심이다.

뭔가... 구린 냄새가 난다. 아, 화장실 말고 그 진상




결국 그 진상은 돈을 내지 않고 갔다. 아니, 엄밀히 말해 화내며 싸우다 지쳐버린 사장님이 끝내는 그냥 가라고 내쫓았다. 과연 그 진상은 나가면서 속으로 내적 환호성을 질렀을까?

진상이 가고도 여전히 성이 머리끝까지 나 씩씩 거리며 숨을 크게 쉬고 있는 사장님께 다가갔다. 이런 상황에 차마 말을 걸기가 어려웠지만 우리도 다음 일정이 있기에 마냥 분이 풀리기만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기다린다고 금방 풀릴 문제도 아니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사장님...? 얼마예요?"


다행히 차분하게 계산을 해주셨다. 그런데 갑자기 다시 울화가 치밀었는지 우리에게 호소 섞인 넋두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 순간 사장님에게 필요한 건 공감과 지지이고 마침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 또한 공감과 지지뿐이기에, 신기하게도 알아들을 수 없는데 이해가 가 귀 기울이며 맞장구를 쳤다.


"^%$&*@%^&^$#*^#&!?"

[아니, 진짜 나쁜 사람아니예요!?] - 아마 이보다 더 강력한 표현이었으리라 -

"맞아요, 명백히 그 사람 잘못이에요. 저희도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냥 미친 사람 같아요."


AI로봇 같은 리액션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감정에 충실한 200% 진심이었지만 그래도 이역만리 라오스에서 자국민을 욕하는 게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나의 여행 경험상 세계 어디를 가도 '웨얼 알유 프롬?'이라는 질문에 '아임 코리안.'이라 하면 늘 환영받았기에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한국사람인게 부끄러웠다.

우리의 공감과 지지 덕분인지 사장님의 넋두리는 그리 길지는 않았다. 거스름 돈을 건네주실 때 표정을 보니 조금은 누그러지신 것 같았다. 비록 막판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는 했으나 끝이 좋으면 모든 게 다 좋기에 최대한 밝게 인사하며 가게를 떠났다. 부디, 모든 한국인이 다 저렇다고 오해하지 말아 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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