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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사람 Feb 09. 2023

묏자리

깜빡거리며 막 불이 들어오려 하는 가로등도, 이제서야 뒷고개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려는 주홍빛 노을도, 뉘 집 새낀지 왕왕 거리는 조막마한 강아지도 그 어느 것도 신경 쓰지 말아라.


그저 바람에 살랑살랑 몸을 맡긴 채 죽ㅡ 걷다 보면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언제나 날 반겨준다. 사실 언제나 이렇다고 이 집 빵을 먹어본 건 아니다. 이 마을로 이사 온 지 벌써 넉 달이 지났건만 그냥 '담에는 꼭 먹어 봐야지' 하고는 돈을 가지고 온다는 것을 까먹는다. 아이러니하다. 언제나 카드는 가지고 있었지만 가게 문 앞에 대문짝만 하게 '카드는 안받읍니다'하고 쓰여있으니 매번 입맛만 다실뿐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이 가게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운영하시는데, 손주가 카드기계 사용하는 것을 알려드렸으나 귀찮게 뭐 그딴 고철덩어리를 만지작거리고 앉아있냐며 할아버지께서 완강히 거절하셨다고 한다. 이 빵집골목에는 낡은 한옥집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다. 나란한 한옥 집들 사이에 이미 몇몇 빌라들이 들어서면서 아련한 옛 추억의 형태가 조금 일그러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낡은 흠집사이에 그리움이 잔뜩 끼어있다.


 하루는 엉금엉금 기어가는 개미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애들 딴에는 무지 빠릿하게 가는 중이였겠지만 그래봐야 개미떼다. 줄 맨 끝에선 막내 뒤를 이어 내가 개미라도 된 듯 쫄래쫄래 따라가 보았다. 개미 줄은 사람들 없는 틈을 타 빵집 골목으로 들어가 어느 한옥집 문틈새로 뽈뽈뽈 기어들어갔다.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틈새로 갓 태어난 새끼고양이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끼기긱 거리는 널따란 대문을 열자 사람의 손길에서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집 기둥마다 어떤 시절의 추억이 여리여리한 거미줄과 함께 묶여있었다.


그곳은 다른 한옥 집과 달리 유난히 낡아있었다. 누가 봐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었다. 비록 낡은 나무 냄새에 퀴퀴한 먼지 냄새가 자꾸만 재채기를 유도했지만 폐 속에 자리 잡은 작은 먼지 입자들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많이 외로운 건가 싶다가도 고작 이 정도로 마음이 녹는 걸 보면 당장에 애인이라던가 힐링이 필요한 건 아닌가 보구나 싶었다.


 위로받고 싶은 날 이곳을 찾아오면 누군가 날 다독여주는 느낌을 받았다. 노란 솜털을 다리에 비벼대는 고양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외로울 때 고양이가 말벗이 되어주었고 자잘하게 피어있는 풀꽃들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어쨌든 이곳은 나를 보듬어 주었고 나는 이곳으로 자주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니었지만, 이곳을 들릴 때마다 누군가 다녀갔던 흔적이 언제나 남아있었다. 빈 참치 캔, 아직 반이 남은 새모이 봉지, 바닥에 널브러진 몇몇 사료 알갱이들... 동네의 동물을 사랑하는 캣맘 중 한 분이겠거니... 생각했다. 밥은 내가 챙겨 주면 되니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으면 더 좋을 듯싶었다.


빈 참치 캔에 반사된 햇빛이 반짝반짝거리다가 내 안경으로 반사되어 눈이 부실 때, 고양이 주제에 강아지풀 같은 꼬리를 가지고 그르릉 거리며 내 무릎에 볼을 비벼댈 때, 낡은 나무 기둥 사이에 새롭게 돋은 새싹에 새벽이슬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때-그럴 때마다 나는 이곳이 내 묏자리라면 죽어서도 따스하려나 생각하며 현생의 답답함을 털어냈다. 현생의 답답함. 나는 무엇이 그렇게도 답답한 걸까. 싸진 않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밀리지 않는 월세, 혹여나 조금 밀려도 재촉할 생각 없는 부유하고 인심 좋은 주인집 아저씨 아니 그러면 뭐 하나 나는 결국 안전한 보금자리 하나 없는 길고양이 신세인걸. 아아 모래먼지가 되어 햇살 좋은 날마다 반짝이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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