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생활이란 껍질을 깨고 밖을 내다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고, 대표이사나 임원 쯤되면 대단한 인사이트를 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들도 가장이고 흔들리는 기둥이고 정답을 모른다. 고독하게 사색하고 성찰을 통해 내 다음 발자국을 찍을 위치를 정하는 것. 그게 마치 죄처럼 여겨지는 게 지금 시스템이다.
내가 무슨 시민단체에 가입했고, 무정부 비자유주의 시장 경제를 옹호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크로아티아, 인도, 독일, 아일랜드, 미국, 호주, 캐나다, 여러 국제 친구들과 한국 사회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내가 몸 담그고 있는 이 사회가 어떤 수준인지 고찰해 보고 약점을 환기하는 글이다.
대기업에 입사하기란 실로 대단하고 이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겪어야 하는지 몰랐던 여정이었다. 포인트 중심으로 기억을 더듬자면 2019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주류 제조사에서 반년동안 인턴을 할 때 아무런 이유 없이 같은 팀 차장한테 회식 후 전화로 쌍욕을 들은 것(그는 만취 상태였고, 팀 점심을 매번 내가 예약했는데 순대국밥을 다른 국밥으로 주문해 뒀다고 정색을 했던 그.),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쓰는 메신저 어플의 개발사에서 처음으로 개최한 2020년 대규모 정규직 전환형 인턴십에서 조장을 맡아 고군분투했지만, 솔직하지 못한 대처와 젊은이들의 여러 정치적이고 날것의 이해관계에 치여 낙방의 쓴맛을 맛본 것. 코로나 시기까지 겹쳐서 별별 일을 정말 다 겪었다. 계약서 작성을 기준으로 보면 난 마지막 직장에 입사하기 전까지 10개가 조금 안 되는 회사를 거쳤다. 때로는 대접받고 때로는 무관심의 중심에 섰던 계약직 또는 인턴으로 3년을 살았다.
대기업이란 말을 자기 위로에 사용하는 경향이 예전보다 짙어졌는데, 네이버 검색창에 기업명을 넣고 검색을 눌러봐도 알 수 있듯이 중견기업과 대기업은 다른 기업군이다. 회계, 투자, 국민정서 이 세 개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는 듯한데, 나는 냉정한 사고방식을 가진 편이라
중견기업을 애매하게 대기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견기업에 다니지만 어디에 말할 때 대기업이라고 소개하고 싶은 자기 위로 심리가 강하게 묻어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중견기업 정규직 전환형 인턴을 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실제로는 대기업 입사가 아니기 때문에 환희를 앞둔 패배감을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되지 못했고 수십 개의 자소서를 써야 했지만.
어디 다니는지는 무엇을 의미할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것은 무슨 일을 어떤 복지에서 일하는지에 대한 관심이라기 보단 주변에게 당당하게 내 직업을 소개할 수 있는지, 자기소개 문구를 위한 치장거리다. 하버드, 예일, 연대 고대를 붙으면 그 자체가 기쁜 게 아니라 거기에 속해있다고 나를 소개할 수 있는 미래의 짜릿한 장면을 상상하며 성인식을 막 치른 학생들은 눈물을 흘린다. 그게 오 년에서 팔 년 정도 숙성되어 입시가 취업으로 바뀌면 대기업에 붙었다는 의미가 푹 익은 김치처럼 우리 속을 뜨겁게 적신다. 잘 익은 게 아니라 곰팡이가 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가면 그러한 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가 뒤섞여 모임을 갖기 때문에 서로 연봉 얘기는 잘하지 않게 되는데, 코로나 시기엔 다들 취업이 너무 어려워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Net=이것저것 다 합쳐서) 4,000만 원을 주면 갈만한 회사로 다들 생각했다. 그 문턱을 넘으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일단 나 취업했고, 나중에 이직할 거야라고, 첫 차로 새 차가 아니라 중고차를 샀으며 나중엔 꼭 새 차를 살 거라고 묻지도 않은 후술을 더하는 친구처럼 사람들은 그랬다. 나도 이 중 하나였다. 현재 직장 이전에 8개월 근무했던 첫 정규직 직장은 같은 금융권이었지만 처우나 복지가 기대한 것에 한참 미치지 못했고, 성과급 포함해서 연봉 4,300만 원 정도의 직장이었다. 여러 스펙트럼의 대학 출신의 동기들이 얽히고설켜 다니는 회사였고, 자기 대학 수준에 비해 이 처우가 불만족스럽다고 느낀 친구들은 모두 중고신입(다른 회사에 신입으로 재입사)으로 떠났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한번 더 입사해서 2,500만 원 정도 연봉을 높였고 복지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올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이냐. 대기업에 다닌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안도감이었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직장을 옮긴다.
왜 그렇게 대기업, 대기업, 대기업... 대기업이 중요한가? 일단 우린 의사, 변호사, 회계사가 될 수 없다. 그 길은 이미 접혔다. 회사원으로서의 삶이 전부다. 부업으로 카페를 할 수도, 네이버 스마트스토어에서 생활용품을 유통해 떼돈을 벌 수도, 열심히 글공부를 해서 작가로 데뷔할 수도, 아니면 지금 직장에 만족하고 가족 그리고 친구와 여기저기 여행 다니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모든 삶에 내가 어디를 다니는지가 너무 중요하다. 성공과 실패의 잣대가 흐릿하다고 거짓말하지만 우리는 그 시스템 아래 놓여있다. 숫자와 소속이 나를 대변하는 시대다. 하늘을 나는 초능력자가 됐다고 가정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이 웃긴 놀음을 지켜보자면 허무하다. 4,000... 7,000... 때로는 1억... 내 몸에 피가 흐르고, 젊고, 여러 욕망이 들끓고 사랑하고 싸우고 뻗어나가고 습득하고 성장하고 변화하고 바쁘고 침착하고 도전하고 좌절하고 다시 뛰어오르고, 격동의 삶을 고려하면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차이가 연봉이다.
삼성, 현대, SK, LG, 그리고 이외에 대기업이란 단어에 포함시키고 싶은 수많은 회사들. 우리는 왜 그 분투를 분단위로 하며 살고 있는가? 내가 다니는 회사가 실은 중견기업이지만 대기업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래서 설명하고, 버는 돈이 이 정도 되니까 사실상 대기업임을 어필하고 싶고. 대기업 계열사이지만 실제로는 처우가 그 정도는 되지 못해서 별 볼 일 없는 회사라고 생각하지만 어디 가서는 적당히 좋은 회사에 다니는 척 연기하는 것. 그 자체가 넌센스다.
내 자아가 기업인가? 기업이 내 삶을 사는가?
내 이름이 기업(김삼성, 이현대)이고 기업이 내 자아를 대변하도록 내 육체와 영혼을 빌려주었는가? 말 그대로 이상하다. 나라도 이런 체계에서 도태됐다고 느끼면 다 포기하고 삶을 등질 것 같다. 이 잣대가 계층을 나누고 사람에게 절망을 준다. 남 신경 안 쓰고 내가 만족하는 대로 살면 되는데, 무엇이 만족을 주는지 배운 적이 없어서 남이 주는 만족에만 흡착해서 사는 중이다. 대기업에 입사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가 있다. 오래 다닌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회사 다니지 말고 빨리 탈출해라. 그런데 그들은 탈출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말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문장이 있다. 회사 밖은 위험하다. 내 삶의 대부분을 책임져주고 있는 이 회사를 떠나선 안된다는 게 그들의 기저다. 그게 신입에게 전이되고 다 같이 구성원이 된다.
그렇다면 대기업이 아닌 사람에게 주어진 영광은 무엇이 있는가? 회사원이면서 중소기업에 다니는 자에겐 어떤 명예가? 당연히 그들에게도 삶에 대한 명예, 자긍심이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모두가 갖고 있는 아이러니, 그것을 밖에서 찾는다는 것. 시선에서 구한다는 것. 그것은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 힘들 게 만드는 이 한국은 도대체 왜 그렇게 대기업 대기업 하는 걸까.
나 보다 회사가 먼저 드러나는 이 비극적인 삶을 행복하다고 여기는 문화가 실로 비인본주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