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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윤 Mar 06. 2024

무슨 대학교 나오셨어요?

대학이 주는 네트워크? 교육의 질? 자신감? 그것이 능력을 결정한다고 말하고 싶은 자가 있다면, 고작 그런 것으로 삶이 결정되는 인생을 사는 데에 오히려 반성해 봐야 하진 않은지 되묻고 싶다.


나는 서강대학교를 졸업했다. 야간 대학이 아니고 주간 대학이고, 흔히 생각하는 고등학교 때 공부해서 정시 혹은 수시로 입학하는 그 과정을 거쳤고, 지역 균형이 아니고, 연고대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 국숭세단 라인 중 두 번째에 속하는 대학을 나왔고, QS대학랭킹(보통 공인된 대학 수준을 가늠할 때 참조하는 사이트)에 따르면 500위권 밖의 대학이고, 연고대가 100위 전후권이니 수능 한 문제 차이로 아깝게 떨어졌다고 하기엔 연고대와 학교 자체의 국제적 네임밸류 차이가 상당하고, 성균관대와 한양대에는 의대가 있지만 내 모교엔 없고 이과생으로서는 성대 한양대가 낫다는 인식이 있으며, 문과는 아무리 그래도 서열 기준으로 서, 성, 한 아니겠냐는 끈질긴 논쟁이 오가는 학교를 나왔다.


한국, 한국, 이 한국은 명문대 올려쳐주기 문화가 상당하다. 고등학교, 길게는 중학교 때까지 공부 6년 한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것으로 아이들 인생이 결정되는 것처럼 메가스터디, 스카이에듀, 무슨 에듀, 종로학원, 대성학원, 청솔학원, 무슨 학원 강사들이 아이들을 겁박하고, 그 선생들이 내뱉는 말들이 경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학부모는 옳다구나 잘하신다 선생님을 모시고, 아이들은 팬심으로 그들을 추종한다. 나 때도 그랬고 요즘 심심찮게 입시 관련 유튜브 콘텐츠가 메인에 떠서 보고는 하는데 변한 게 없다. 오히려 심해졌다. 청소년들은 그 풀에서 경쟁하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여긴다. 나는 입시에 관심 있는 학생이다. 고로 깨달은 자다. 인생을 안다. 잘하고 있다.


아무도 그게 의미하는 진짜를 알려주지 않는다. 공부하지 말란 소리가 아니고, 목표가 있는 사람에게만 건강한 동기부여를 주라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패배자가 발생하는, 그러니까 위에 나열한 대학 라인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그 마저도 중경외시에서 아슬아슬하게 당당한 명문대 라인으로 끊길 이 좁은 나라에서, 그 줄 세우기를 신나라 해오고 있고 했던 게 우리나라의 어른들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재수, 삼수를 해서도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학생은 자기 학교 잠바를 입고 다닐 수나 있을까.


대학으로 마약을 한 것 같은 쾌락과 죄를 지은 것 같은 절망을 안겨주는 이 게임에서 그게 맞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주입하는 이 세태는 부끄럽게도 이어지고 있으며, 나도 그 시스템에서 내가 잘하고 있다고 착각했고, 과시하고, 합리화하고, 뭐 되는 줄 알았던 사람 중 하나다.


서강대 보다 경희대, 세종대, 중앙대, 이화여대가 순위가 높다.


우선 우리나라 기준의 대학 서열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단적인 예를 들면, 서강대를 나온 나로서는 호주의 멜버른 대학(QS 기준 14위)에 지원할 수 조차 없었다. 이유는 대학 랭킹에 따른 개별 최소 졸업 학점 때문이다. 내 졸업학점은 4.3 기준 3.14인데, 서울대(41위)를 나왔다면 3.00이 커트라인, 서강대 학교는 500위 밖 대학이기 때문에 3.30은 되어야 했고 지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아마 성균관대, 한양대, 아니면 경희대를 나왔다면 지원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나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학을 나왔다고 입학 담당자 앞에서 길게 늘어뜨려봤자 그건 한국에서만 통하는 소리지 아무런 효과가 없다.


연세대(76위), 고려대(79위), 서강대(509위), 성균관대(145위), 한양대(164위), 중앙대(494위), 경희대(332위), 한국외대(575위), 서울시립대(900위권)


서강대가 전혀 문과 기준 아래 대학이라고 일컬어지는 대학들보다 낫지 않다. 나는 수능에서 400점 만점 391점을 맞았는데, 언어 93점, 수학 100점, 영어 98점, 사탐 두 과목 50점으로 모두 만점을 받았다. 등급은 언어가 2등급 나머지가 모두 1등급이었다. 한 번도 이런 점수를 받아본 적이 없는데, 재수를 했고, 실제 수능에서 원점수 기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당연히 연고대를 갈 줄 알았는데, 수능이 쉬워서 모두가 잘 봤고, 리스크를 지을 수 없어서 서강대 인문학부에 지원했다. 대학 랭킹 기준으로는 절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서강대부터 한국외대까지는 서강대보다 좋거나 그게 그거거나, 적어도 캠퍼스도 작고 학교도 조용해서 재미없는 서강대를 갈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난, '서' 성한 중경외시라서 서강대를 썼다. 거길 나오면 좀 알아줄 것 같아서.


혹시 누가 위 텍스트를 읽고 다시 한번 랭킹 중심으로 대학을 머릿속에서 나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랬다면 내 글솜씨가 모자란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대학 프레임이란 건 기준과 상황과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목적에 맞게 입학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이 서열로 인해 올려치고 내려치고 맞고 틀리고 좋고 나쁘고를 나누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냐면, 당장 서울시립대의 영문명은 'University of Seoul'인데, 서울대의 'Seoul National University'와 어떤 외국 기업 및 외국인이 구분할 수 있을까.


물론 국내 유명 글로벌 컨설팅펌을 들어갈 것이라면, 보통의 명문 비즈니스 기업에는 타깃 스쿨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하니 서울대를 가는 게 맞다. 목적이 그것이라면. 그런데 그냥 내가 앞으로 뭘 할지도 모르는데 우선 좋은 학교를 들어가라는 선택은? 그만큼 무책임한 선택, 아니 조언이 없다. 나는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가면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들어갈 것이다. 아니면 한국외대의 어떤 어문 계열에 들어가 해외로 나갔을 것이다. 연세대 고려대의 거대한 축제 문화가 이 정도로 재밌는 것인 줄 알았다면 더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때 가지고 있었던 열망은 그저 서열에서 더 높은 대학 가기 그뿐이었다. 모두가 그랬다.


해외에서 엘리트주의(Academic elitism)를 풍자한 그림. 한국의 학벌주의보다는 해결 가능해 보인다. 학벌주의는 번역하면 "Hak-Bul-ism" 아닐까.
인도, 중국, 일본 그리고 또 어떤 아시아 국가, 그리고 한국 이 정도가 학벌에 집착한다. 다른 국가는 살만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경험 중심으로 사람을 관찰하기 때문에 학벌에 의존하지 않는다. 없다는 게 아니라 이 정도는 아니란 것이다.


공부라도 많이 하는 국가냐고 하면 우리나라는 학사 기준으로는 워낙 대학을 별 목적 없이 일단 입학하고 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이후 석사 또는 그에 준하는 Postgraduate 문화가 없다. 네덜란드를 예로 들면, 학사를 나온 학생 다수가 Master's degree를 졸업한다. 내가 여기서 굳이 영문명을 쓰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석사와 앞의 Master가 전혀 다른 개념으로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석사를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학사의 심화과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 전공을 새로 시작해 배움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경우, 우리나라가 아주 편법으로 학사생들에게 복수전공 학위를 주는 것과 다르게(취업에 유리하라고 그리 시스템을 만들어놨다. 본래 전공 수료 학점을 대폭 낮춰주고 타 전공을 이수하게 해 준다), 그들은 학사 후 다른 공부로 전공을 하나 더 수료한다.


한국에서는 대학생들이 어서 졸업해야 하고, 취업을 해야 하고, 효율적으로 하면 됐지 뭐가 어떠냐고? 대학이 대학 기능을 못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의미 없는 대학에 돈을 쓰고, 졸업하고도 학교를 숨기며 사는 문화가 바로 이런 기이한 문화에서 파생된 것이다. 타이틀 따기에만 급급한 이 문화는 실리도, 명분도, 실체도 없다. 그냥 무슨 대학 나왔다고 말하면 끝이다. 석사는 특이하고 연구원들만 들어가는 곳이라고 여긴다. 그러니까, 어떤 학사의 대학을 나왔는지만 중요하단 것이다. 그 꼬리표가 지독하게 삶의 임종 끝까지 따라가니 과정도 실속이 사라진다.


가장 처참한 기억 중 하나가 나 조차도 대학으로 사람을 지독하게 판단했단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외고를 나왔고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서울대, 연고대를 나왔다. 전부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그런데 가장 열정적인 국어 선생님이 두 단계는 차이나는 라인의 대학을 나왔다. 그게 학생들 사이의 소문이었다.


삼십 대 중반의 그 선생님은 심지어 수업시간에 이 얘기를 꺼내면서 정확히 무슨 얘기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너희들은 나보다 좋은 대학을 가라고 했다. 이 부끄러운 장면을 환기하기엔 너무 늦어버렸고 대체 왜 그랬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 자체가 진취적인 거라고 생각했다. 아 그래, 우리는 연고대 갈 거니까. 이래도 된다, 우린 엘리트니까. 한번 더 있는 경험은 재수학원에서였다. 재수학원 선생님들의 학벌도 서울대 연고대로 비슷했다. 그런데 어떤 언어 선생님 한분이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해준 말이, 그래서 자기는 입사 면접을 거칠 때 시범 강의도 했어야 했고, 학생들의 신뢰도 받지 못한다고 했다. 콤플렉스가 있어 보였고, 그 콤플렉스는 일리가 있었던 게 학생들이 실제로 그 선생님을 낮잡아봤다. 끔찍한 시선. 대체 마흔이거나 그 가까운 사람의 대학이 그의 당시 강의 실력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직장생활에서 마주했던 에피소드는 더 엽기적이었다.


일단 내가 앞선 글에서 소개한 인턴 경험 중, 별명을 붙이자면 여우, 그래 여우 과장 옆에 앉은 적이 있는데, 그는 지독한 학벌 콤플렉스가 있었다. 난 전혀 그의 대학이 궁금하지 않았다. 이미 나랑 열 살 정도 차이가 났고 그는 일을 잘했고, 정치적이고 기회주의자였지만 영업 사원으로서는 회사에 필요한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화 도중 전혀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알 게 된 지 한 달이 안 됐을 때, 


그는 본인 입으로 자기는 학벌 콤플렉스가 있다고 했다. 어떤 대학이었는지는 대충 기억나지만 적지 않겠다. 서울 소재의 무슨 대학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그가 적어도 학문적으로 똑똑하지는 않을 거라고 속으로 내려쳤다. 나는 쪽팔린 짓을 한 거고 그는 하지 않아도 될 자기비판을 했다.


나는 일상적으로 대학으로 사람 위아래를 나누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게 내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었고, 티 내지 않고 지냈다. 외고를 졸업한 내 동기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 당시 대학 이야기를 했다. 누구는 무슨 대학, 누구는 무슨 대학. 자연스러운 자기혐오, 평가, 자기 위로. 사람 급을 대학으로 나누면서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웃으며 잘 지내는, 실제로도 그다지 악의는 없는 그 사고방식. 아귀가 맞지 않은 그 불안정한 상태로 사회 경험을 하면서 우리는 망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그 과장은 무슨 이유에선지 점점 내게 히스테리를 드러냈고, 내가 퇴사하는 날 인사나 연락이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냥 자기보다 잘난 요소를 가지고 있는 신입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본인도 스스로 말했다. 내가 성격이 뭐뭐 맞아서 이렇다고. 내가 관찰했을 때 그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게 학벌 콤플렉스다. 대체 왜 그 열정적이고 유능한 사람을 정치꾼, 기회주의자로 만든 걸까. 무엇이 그를.



첫 정규직 직장에선 러브스토리에 학벌을 껴넣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 또래였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삼수를 했으나 수능 때 마킹을 실수해서 지금 대학에 갔다고 말했다. 사실 난 속으로 마킹을 실수했어도 본인이 가고 싶었다고 한 대학과 지금 간 대학만큼의 차이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왜 자꾸 학교 이야기를 하는지 이유는 알았지만 짜증스럽기만 했다. 그는 대학 때문에 무능하게 보일 자기 모습을 걱정하며 내게 계속 항변한 것이다. 내가 실은 그 정도 대학의 인간이 아니고 꽤 유능한 사람이다. 똑똑한 사람이다. 그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사람처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안일하고 나태한 태도로 여러 실수를 저지르다, 내가 퇴사하는 날 자기가 너무 대학생처럼 굴었다고 내게 사과했다. 난 그의 방어적이고 자괴적인 태도에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동료로 있는 게 힘들었다. 더 심하고 악한 마음이 생겨났다. 나도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줄 세우기에 세뇌당했고, 이 규칙에 따르면 나보다 위에 있는 자들이 있고, 아래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먹이 삼아 겨우겨우 자존감을 지탱해 가는 중인데, 이제 좀 벗어나려고 하니 대학 대학 얘기를 꺼내는 이 자를 만나 다시 그 본성이 튀어나오려고 하고, 그러고만 싶고 유혹당하고 내면에서 싸우고 혼자 난리를 쳤다.


자기가 무슨 동호회였을까... 만났고 짝사랑하게 된 사람이 있는데 그녀에게 고백하기가 참으로 망설여졌고 지금도 그렇다고 했다. 이유는 그녀가 서울대생이라서... 사랑 이야기를 쭉 듣고 열심히 응원해 주다 끝에 그 한마디를 듣고 난 맥이 풀렸다.


어떤 기관을 같이 방문할 일이 있어서 택시를 타고 가던 중 나눈 대화였다. 나는 학교에 연연하지 말고 당신의 잠재성과 비전을 그 사람에게 보여주면 충분히 어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이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그것은 그에게만 말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내 속에서 잣대를 들고 손바닥을 탁탁 치면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또 다른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만 좀 해라 제발.



어떤 직장에선 조금 덜해지기도 한다. 물어보는 것 자체가 무식한 짓으로 보이거나 상관 요소가 아닌 곳이 더러 있었다. 지금 직장도 그렇다. 신경 써가면서 자기가 모자란 것 아니냐고 자괴하는 신입 사원을 보기도 했는데, 차를 마시는 중에 그 얘기를 들어서 한 30분은 그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라고 열열이 응원해 준 기억이 있다. 이미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몇 년 전에 입학한 대학을 아직 까지도 왜 신경 쓰고 있냐고. 앞으로 만들어 나갈 이야기가 더 중요한 것 아니냐고. 대학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실제로 대학 수준이 분명하게 영향을 끼치는 학술 세미나라든가, 그것도 특정 전공마다 다양한 경우로, 거기서 얻는 네트워크나 기술 훈련의 질이 템플릿에 의해 평가받는 대단한 컨설팅 회사라든가, 그 정도가 아니겠냐고 했다. 똑같이, 너무 똑같아서 지루할 정도로 똑같은 삶을 산 사람들이, 수능 당일 컨디션과 10대 때 목적을 가지려야 가질 수 없었던 그 답답한 환경에서 수능 몇 개 더 맞을 것으로 되돌릴 수 없는 꼬리표를 다는 건 결국 자기 가족, 친구에게 칼을 대는 일이다. 그 칼이 마지막으로 겨누는 게 누구인가? 바로 나다. 미래를 부정하는 이 프레임을 당장 갖다 버려야 한다. 단 한 달만 세상 밖, 그러니까 한국이 아닌 곳, 의 진짜 일상을 누려보면, 알 수 있다. 경험과 실제의 실력을 중심으로 사람을 관찰하는 곳.


대학으로 평가하는 게 효율적이라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소리는, 인재 양성과 합리적인 직군 배분 시스템이 부재한 한국의 미진한 역사를 드러내는 치부다.


그걸 어쩔 수 없다거나 특성으로 여길 게 아니란 것이다. 사람을 어떻게 관찰해야 할지, 손바닥 위의 뜨거운 감자를 손 끝으로 신중하게 쥐지 못하고 아뜨뜨, 아뜨뜨 공중 위로 굴리고만 있는 우리. 그러다 큰 놈이 상태가 좋겠지 하고 속을 까보지도 않고 내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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