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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콩 Oct 24. 2024

그냥 이렇게 막 계약해도 되는 거야?(2)

  부부가 어린 딸과 함께 산다는 첫 번째 집은 사장님 말대로 햇빛이 아주 잘 들어 공기가 따스했다. 작은 방 안쪽에 놓인 침대에는 분홍색 이불이 덮여 있고 머리가 큰 동물 인형들이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거실에 있는 갈색 소파 위에는 자수가 놓인 천이 덮여 있었다.

“여기저기 신경을 많이 썼어요. 밤에 화장실 갈 때 편하도록 자동 점등되는 간접등도 설치했고요. 안방에는 액자 레일이 있어서 시계나 그림을 거실 수 있어요. 아이가 있어서 큰소리 나지 않도록 서랍 안쪽에도 다 충돌방지 스티커를 붙여놓았어요. 편하게 사실 수 있을 거예요.”

  집주인인 젊은 엄마는 피곤해 보였지만 친절하게 우리에게 집의 이모저모를 알려주었다.

“어머! 너무 깔끔하게 해놓고 사셨다. 젊은 아가씨 혼자 살기 딱 좋아보여요.”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부동산 사장님의 추임새도 빠지지 않았다.

  그 집은 정말 예뻤다. 드라마 속에서 그 어떤 권모술수가 일어나더라도 화목함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은 다정한 가족이 살 법한 집이었다.

“집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나오는데 어떤 위기감이 느껴졌다. 큰일났다. 처음부터 너무 훌륭한 집을 보고 말았어. 여기 가격이 꽤 높았던 것 같은데. 이제 다른 집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거야. 사장님, 어째서 이렇게 제 눈을 높여놓고 투어를 시작하신 건가요?

“그럼 두 번째 집도 가보실까요?”

  내 마음이 복잡하든지 말든지 사장님이 유쾌하게 말했다.


  두 번째 집은 첫 번째 집보다 훨씬 삭막했다. 우선 동향이라 해가 이미 저쪽으로 넘어가버린 후였고, 짐이 별로 없었다. 현관의 신발장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화장실과 작은 방, 왼쪽에는 방 2개가 연달아 붙어 있는 구조여서 거실까지 가려면 안쪽으로 꽤 걸어들어가야 했다. 이곳에는 젊은 남녀 두 명이 살고 있었다. 전세 세입자라고 했다. 사장님이 그들의 관계를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부부인지, 커플인지, 남매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남성 분이 무언가 작업 중인 관계로 여성 분이 집 안내를 해주었다.

“저희가 이사온 지 얼마 안됐는데 금방 또 이사를 하게 되어서요.”

  그녀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우리도 덩달아 조용하게 살금살금 집을 둘러보았다. 방 문은 모두 닫혀 있었는데 그녀가 한 개씩 문을 열어줄 때마다 퀘스트를 하나씩 깨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방에는 침대 없이 토퍼가 깔려있었고 회색 이불이 펼쳐져 있었다. 책상과 컴퓨터마저 무채색이었던 차분한 그 집에서 유일하게 색깔이 있었던 것은 거실 바닥에 놓여 있던 커다란 라이언 인형이었다. 샛노란 라이언의 새까만 눈과 눈이 마주치자 마치 절이나 교회에서 갑자기 사자 한 마리를 마주한 것처럼 인지부조화가 일었다.

“안녕히 계세요.”

  대학생 시절 교수님의 권유로 반강제로 다녀왔던 수도원 체험을 떠올리며 그곳을 나왔다. 왠지 이 곳에서는 금욕과 절약으로 점철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첫 독립이라는 단꿈에 젖어 있던 나는 내 취향으로 아기자기하게 뒤덮인 장밋빛 집을 꿈꾸고 있었기에 이곳의 회색빛 분위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때 엄마. 난 별로인 것 같아.”

“엄마는 마음에 쏙 드는데? 여기에 살면 좋겠어.”

“아니, 도대체 왜?”

“집이 깔끔해야지. 너도 집 사기 전까진 계속 이사다녀야 할 텐데 괜히 짐 늘리면 절대 안 돼.”

“내 방에 짐 많다고 맨날 뭐라 그러더니 이 정도는 돼야 엄마한테 만족스럽단 말이야? 아직 이삿짐 풀기 전 같은 상태인데.”

“나는 혼자 살면 모델하우스 같이 유지하고 살 자신 있어. 너 만약 외할머니 살아계셨으면 벌써 혼났다. 얼마나 깔끔하셨는데. 집에 먼지 한 톨 없었어. 나중에 집 지금 네 방처럼 무당집처럼 해놓으면 큰일 난다.”

  아니 뭐가 무당집이라는 거야. 무균실에 가까운 청결한 집 때문에 괜히 지저분한 사람이 된 나는 혼자 궁시렁댔다.

“그거 다 오늘의 집에서 별점 높은 걸로 산 거야. 유행템이라구. 첫 월급 탄 기념으로 샀던 건데. 교무실에서 선생님들도 꽃병 예쁘다고 칭찬해 주셨어.”

“교무실까지 무당집처럼 해 놓은 건 아니지?”

  기가 막혀 몇 마디 더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지향하는 엄마와 달리 나는 빨간 머리 앤의 방처럼 포근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갖는 게 오랜 꿈이었다. 때문에 크기가 다른 유리병 여러 개를 사서 꽃을 꽂아두었다. 물론 며칠 안 가 시들어 버린 생화 대신 조화가 그 안에 자리잡긴 했다.

“꽃병만 산 게 아니잖아.”

  엄마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자 이번에는 정말 할 말이 없어졌다.

“호호. 처녀일 때는 쓸모없는 것도 예뻐보이잖아요. 할 수 있을 때 다 해봐야죠.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 가지면 어차피 다 치워야 하는걸요. 어머니가 좀 이해해주세요.”

  사장님이 넉살 좋게 끼어들어 나를 두둔해주었다.

“맞아요.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더라구요.”

  엄마가 사장님을 따라 웃었다. 엄마가 말한 것은 소위 ‘지랄 총량의 법칙’이란 것으로, 어렸을 땐 울거나 떼를 쓰지 않아서 순하고 사랑스러웠는데, 다 키워놨더니 전에 안하던 미친 짓을 해대서 엄마를 충격에 빠뜨릴 때마다 언급되는 전문 용어였다.

“자, 그럼 세번째 집으로 가시죠!”


  세번째 집은 다른 아파트여서 차를 타고 가야 했다. 우리가 본 집과 두세 블럭 떨어진 곳에 있던 이곳은 이미 살고 있는 사람이 있어 생활의 흔적이 느껴졌던 앞선 집들과 달리 텅 빈 채 먼지가 조금 쌓여있었다.

“전자레인지나 화장실 거울에 필름 붙어있는 거 보이시죠. 입주하면 다 떼고 쓰셔야 해요.”

여기도 남향인지 거실에 햇볕이 가득했다. 방이 3개씩 있던 앞선 집들과 달리 방이 2개였다.

“여기에 침대 놓고, 여기에 책상 놓고 하면 딱 될 것 같은데요. 안쪽에 드레스룸도 있어요. 저기는 아가씨 혼자 살기엔 좀 컸는데 여기가 딱인 것 같네.”

“저도 동의합니다.”

조용히 둘러보던 아빠가 나지막히 말씀하셨다.

“자, 이제 다 봤으니 복귀합시다!”


  사장님이 기운찬 발소리를 따라 우리는 다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제 결정의 순간인가. 이렇게 잠깐 보고 2년 동안 살 집을 정해도 되는 걸까? 그 전에 예산은 충분한 걸까? 나 혼자 아파트에 사는 건 주제넘는 일이 아닌가? 여러 의문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부동산 사장님이 제일 앞장 서고 그 뒤를 엄마가, 엄마의 뒤를 아빠가, 아빠의 뒤를 내가 따라갔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집이 많은데 우리가 찾는 집 하나가 없겠어요? 호호.”


#엄마의 잔소리

집을 볼 때는 볕이 얼마나 잘 드는지를 제일 먼저 확인해야 한다. 햇빛이 잘 들어야 습도 조절이 잘 되어 곰팡이가 생기지 않는다. 겨울철 온도에도 큰 영향을 미쳐 난방비와도 직결되는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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