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지붕 집의 앤>과 <앤의 꿈의 집>
나는 빨간색을 사랑한다. 언제부터였나 떠올려보면 어렸을 때 내 방 책장에 꽂혀 있던 <초록 지붕 집의 앤>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주근깨 가득하고 빼빼 말랐지만 초록색 눈이 반짝이는 빨간 머리 소녀를 무척 사랑하게 되었다.
2022년, 처음으로 고등학교에서 1년 계약을 맺고 고2 문학 수업을 맡았을 때 나는 열정만 가득하고 요령이 전무한 전형적인 초임 교사였다. 마음 속에는 빨간 머리 앤처럼 학생들을 사랑하는 교사가 되겠다는 포부가 가득 차 있었다. 때마침 교과서에는 <빨간 머리 앤이 하는 말(백영옥)>이라는 글이 실려있었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잘하는 일’을 택하라는 주제의 글이었다. ‘한때의 빛나는 재능이 훗날의 아픈 족쇄가 되는 경우를 종종 봐 왔다.’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보통 교과서에서는 ‘꿈과 열정을 좇아라! 청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느낌의 (붉은색으로 캘리그래피를 써야 할 것 같은) 긍정적인 주제의 글이 실리기 마련인데 이 지문은 T 100%의 뉘앙스를 품고 있어 신기했다. 본문 옆 학습 활동에는 <초록 지붕 집의 앤> 본문이 한 단락 실려 있어서 무척 두근거렸다.
교사라는 페르소나를 벗어나면 나는 아직 내가 철부지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데 그 사이 시간이 많이 흘러 세대가 바뀌어있었다. <빨간 머리 앤>의 내용은커녕 앤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학생들이 많았다. 막막했다. 내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작품 속에 담긴 깊은 문학성과 아름다운 문체를 학생들에게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망설여졌다. 게다가 본격적으로 가르친다면 시험 문제도 내야 했다. 앤으로 시험 문제를 낸다는 건 아이유의 <밤편지>로 시험 문제를 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나는 도망쳤다. 애니메이션 <빨간 머리 앤>에서 길버트가 앤에게 홍당무라고 놀리자 화가 난 앤이 길버트의 머리를 석판으로 내려치는 장면을 보여준 뒤 간단히 줄거리를 설명해 주고 끝내버린 것이다.
“그래도 이 짤은 다들 알죠 여러분? 앤이 길버트의 뚝배기를 깨는 장면. 그런데 이 둘은 나중에 결혼해요.”
(실제로 구글 검색창에 '앤 길버트' 키워드를 넣으면 '앤 길버트 석판'이 제일 상단에 뜬다.)
“네?!!”
"그리고 앤은 길버트에 대한 분노를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켜 전체 1등을 차지하고 장학금을 받아요. 이 에피소드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우선 라이벌의 머리를 내려쳐 처치한 뒤 다음을 생각하자."
"참아주고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안다. 저지르자."
"그게 아니지. 그리고 둘리가 아니고 권리야. 철 지난 유행어는 그만 좀 써라."
학생들의 반응은 나름 폭발적이었지만 앤을 웃음거리로 전락시킨 것이 슬펐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특성도 깔려 있는 복선의 회수 과정도 모두 자세히 알고 있었지만 <군주론>이나 <목민심서> 같은 작품을 가르칠 때보다 더 힘들었다. 너무 사랑해서 더 다루기가 어려웠다. 수업을 마치고 나니 5년 정도 경력이 쌓인 교사였다면 학생들에게 앤을 더 섬세하게 소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다 2023년, 시간제 기간제 교사로 같은 학교에서 재계약을 했다. 시간제 기간제는 총 8시간의 일과 중 7시간만 근무한다는 독특한 조건을 달고 있었다. 나는 7교시를 제외하고 1교시부터 6교시 사이에만 수업을 했다. 물론 월급도 근무 시간에 비례해 일반 기간제 교사의 80% 정도를 받았다. 특수성이 있는 만큼 한 학급의 담임을 맡지 않고 국어부에서 국어 기획 일을 맡게 되었다. 국어부는 국어 부장님과 사서 선생님과 나, 이렇게 세 명이 전부였다. 작은 교무실에서 하루종일 13명의 교사+틈틈이 찾아오는 학생들과 요란스럽게 지내다가 소규모 인원으로 교무실을 쓸 수 있게 되자 너무나도 쾌적했다. 수입은 줄었지만 퇴근을 일찍 하니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별을 겪은 뒤에도 먹고 살려면 열심히 출근을 해야 했다. 아직 나를 필요로 하는 곳, 내가 가야할 곳이 있다는 것은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내가 믿던 세계가 무너져내렸지만 어쨌든 두 발을 붙이고 설 땅 한 조각은 남아 있었다. '슬퍼할 기운을 끌어다 공부를 했더니 합격을 했다'는 친구 조이불의 조언을 따라 나는 수업 연구와 '빨간 머리 앤' 덕질하기에 몰두했다.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좋았겠지만 더 간편하고 즐겁게 애정과 관심을 쏟아부을 대상이 필요했다.
국어 기획 일을 하다 보면 수업에 필요한 책의 주문서를 작성할 일이 많았다. 주문서에 저자와 제목과 출판사, 정확한 정가를 입력해야 했기 때문에 교보문고 사이트에 자주 방문했다. 그러다 앤 시리즈가 새롭게 번역되어 전집으로 출판됐다는 소식을 보았다. 구판에서는 등장인물의 이름이 ‘레버카’, ‘일리저버스’ 등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몰입이 쉽지 않았는데 마침내 ‘레베카’, ‘엘리자베스’로 익숙하게 번역이 된 판이 나온 것이다. 권수가 10권이나 되는 데다가 풀컬러 양장본이어서 가격이 꽤 나갔다. 마침 학교 도서관에서 도서 신청을 받고 있기에 신청서를 썼다. 운영위원회 회의에서 통과가 되어 무사히 책이 들어왔고 나는 당당하게 첫 번째 대출자가 되었다. 그렇게 10권을 다 읽었다. 이번에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앤의 아이들이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0권이라는 긴 분량 동안 앤은 길버트와 결별 후 재결합, 결혼과 유산과 출산과 육아 등 어마어마한 일들을 경험하며 진정한 어른이 되고 가정에 최선을 다하는 멋진 어머니가 된다.(아이가 무려 다섯 명이다) 당시 사회상에 따라 결혼 후 일을 그만두긴 하지만 평교사에서 교장까지, 커리어에서도 모든 업적을 달성한다. 인생의 모든 통과의례를 거친 후에도 당당히 살아남은 앤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성숙한 인물이었다.
2024년이 된 지금, 다시 한번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작품을 가르칠 수 있다면 처음과 다르게 제대로 기획해서 수업을 할 것이다. 18살이나 먹었다며 어른인 체하지만 사실 아이들은 아직 순수하고 빈칸이 많아서 내가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게 정답인 것처럼 믿어준다. 빨간색으로 염색을 한 채 교무실에서 수업 준비를 하다 막혀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선생님! 선생님을 보면 빨간 머리 앤이 생각나요. 저번 수업 진짜 재밌었어요. 항상 열심히 준비해 오시는 것 저희도 다 알아요. 선생님이 저희 국어 선생님이라서 정말 좋아요."
라고 수줍게 말한 뒤 편지와 사탕 한 알을 쥐어주고 도망치는 학생들을 보면 마음이 행복으로 몽실몽실 차오른다.
그래, 기간제여도 나는 국어 교사다.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쓰기 보다는 육아휴직을 쓴 선생님의 빈 자리를 채우는 처지지만, 나는 잘 할 수 있으면서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얼마나 큰 행운인가. 수업을 하는 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학생들에게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그게 이론적인 내용이든 삶에 대한 교훈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캄캄한 밤 앞으로 나아가는 제대로 된 길을 알려주려면 내가 먼저 빛나야 한다. 손전등 같은 선생님이 되자. 조그맣게 혼자 다짐을 했다. 실연(失戀)이 아무리 나에게 시련을 주어도 나의 수업 실연(實演)을 막을 수는 없다.
실연 失戀
명사 1. 연애에 실패함.
실연 實演
명사 1. 어떤 일이나 행동을 실제로 해 보임.
2.연극 음악, 연극, 무용 등을 실제로 무대에서 공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