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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My November 1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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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씨 Nov 19. 2024

친구

11월 19일






차가운 공기를 뚫고 별빛과 달빛이 따스하게 우리를 비춰주던 날 밤, 아무도 없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너와 함께 마셨던 맥주 한 캔의 시원함이, 두 볼과 귀를 빨갛게 만들었던 차가운 바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날의 공기가 그리운 것인지, 그 시절의 우리가 그리운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그때, 그 모든 것이 너와 함께여서 참 좋았다.







고등학교 생활 중 점심시간은 가장 설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4교시가 마칠 시간이 다가오면 선생님 몰래 졸던 친구들도 스르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다. 꾸벅꾸벅 졸던 나도 앞친구 등을 방패 삼아 손거울을 꺼내 거울을 보며 얼굴을 점검한다. 4교시가 마치는 종소리는 유독 크게 들린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급식카드를 손에 들고 1층에 있는 급식실로 향한다. 급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날에는 매점에서 딸기우유와 초코빵을 사 먹었다. 급식이 맛있었던 날에는 스크류바 하나를 사서 입술로 돌돌 돌려 빨아먹었다. 그럼 입술이 립글로스를 바른 것처럼 촉촉하니 빨갛게 예뻐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스크류바를 입에 문채 친구와  운동장 나무그늘 아래 있는 벤치에 앉는다. 교복 남방 포켓에 넥타이를 꽂고 축구하는 남학생들을 구경한다.


모든 것을 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함께한 친구가 있다. 어제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드라마는 무얼 봤는지 수다 떨다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함께 들으며 흥얼거렸다. 집이 학교와 멀었던 친구는 늘 학교에 1등으로 도착했다. 항상 교실문을 열면 그 친구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길고 새카만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드리운 채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학교시간에 맞춰 오려면 매일아침 6시 30분에 오는 마을버스를 타야만 했기에 그 친게 오전 수업시간은 수면시간이었다. 래도 단 하루를 요령 피우지 않고, 지각하지 않고 매일같이 아침 버스를 타고 나오는 친구가 대단하기도 기특하기도 했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까지 우리는 늘 함께 걸어갔다. 30분 정도를 걸어서 도착한 버스정류장에서 친구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 나도 버스정류장 맞은편인 할머니집으로 귀가했다. 돈가스가 손바닥 두 개를 합친 만큼 컸던 장수돈가스에서 맛있게 밥을 먹고 나와 시내에 있는 100원짜리 당면만두를 20개나 먹고도 배가 고파 떡볶이 2인분에 순대 2인분까지 해치우고는 했다. 그래도 늘 우리는 배도 고프고, 수다도 고팠다. 집으로 돌아간 나는 친구와 또 통화를 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도 많았던지 우리들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세상에 혼자인 것만 같았을 때, 집에서조차 마음 붙일 곳이 없었던 나에게, 그 친구는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으며, 나의 대나무숲이었다. 친구와 어제 티브이에서 보았던 드라마를 마치 우리의 이야기인 것처럼 한참 이야기하다 보면 집에서 일어났던 아빠엄마의 싸움쯤이야 그저 한바탕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는 했다. 유행하는 노래를 함께 들으며 함께 불렀다.


그래서 웃을 수 있었다.








나보다 결혼을 먼저 한 그 친구는 시집도 멀리 가버렸다. 이제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친구와 예전처럼 매일 만나서 수다를 떨 수도 없고,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던 때처럼 함께 먹으러 다닐 수도 없다. 그래도 괜찮다. 친구는 세명의 귀한 생명을 키워내는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니까. 나 또한 한 생명을 키워내는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니 우리 한눈팔지 말고 우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자주 만날 수 없지만 마음과 생각이 맞는 친구는 멀리 있어도 텔레파시가 통하나 보다. 우리의 인생에서 아이들을 키워낼 시간들이 지나가고 그 아이들이 커서 세상에 혼자 섰을 때, 우리 함께 예전처럼 달 밝은 밤, 별빛이 무수히 비춰주던 그 날밤처럼 놀이터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 하자며 로를 토닥인다. 늘 힘내서 으쌰으쌰 밝은 에너지로 해내는 친구를 보면 참 든든하다. 서로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 말하지 않아도 그저 맥주 한 캔 기울일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멀리 있어 자주 만나지 못해도 우리는 존재만으로 서로에게 믿음이고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 어떤 일이 있어도 늘 내 편일 친구, 나의 친구로 와줘서, 나와 그 시간들을 함께 해줘서 참 고맙다.




이미지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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