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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소리를 지르는 이유

ep.08

by 유자씨




나와 당신의 거리는 얼마일까?


딸아이가 장염에 걸렸다. 더워진 날씨에 차가운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먹는 횟수가 많아진 탓이었다. 아침에 배가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장염인 것 같으니 찬 것, 유제품, 과일을 당분간 먹이지 말라는 선생님의 처방이 내려졌다. 병원에서 나와 아이를 등교시키기 위해 함께 간 학교 신발장 앞에서 1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엄마 앞에서 떼를 쓰며 울고 있었다. 엄마라는 단어를 목청 놓아 부르짖다가 바닥에 드러누워 팔다리를 파리처럼 파닥거려도 꿈쩍하지 않은 채 핸드폰만 보고 있는 엄마를 보며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러댔다. 그 모습을 보고 토끼눈이 된 딸아이를 교실에 올려 보내고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시간이 아침 9시 20분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아이의 학교와 운동장 전체가 훤히 보인다. 베란다 문을 열어두면 학교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소리도 아주 잘 들린다. 집으로 돌아와 환기를 위해 문을 열고 청소기를 돌리고 커피를 한잔 내렸다. 10시 30분이었다. 학교에서 만난 그 남자아이의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11시가 다되어가서야 절규에 가까운 소리가 잦아들었다.


아이의 엄마는 고작 1m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는데 그 아이는 엄마와 자신의 거리가 100km나 되는 듯 소리를 질러댔다. 무엇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아이가 엄마에게 느끼는 마음의 거리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나와 가까운 이가,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었으면 하는 이가, 나를 몰라줄 때 상대방과 내 마음의 거리가 멀어진다.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음에도 마치 산등성이 하나를 두고 있는 듯 소리를 질러 내 마음을 알아달라 아우성을 친다.








긴 연휴가 끝나고 학교에 가기 전날 밤, 딸아이가 내 옆에 누워서 말했다.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

"왜?"

"선생님이 소리 질러서."

"선생님이 왜 소리를 지르셨을까?"

"몰라, 수업시간에 남자친구들이 뒤돌아서 이야기하고 장난칠 때 선생님이 갑자기 공룡으로 변해."

"그렇구나. 학기 초에는 선생님이 엄청 착한 것 같다고 하지 않았어? 친구들이 장난쳐도 화 안 내신다고 했었잖아."

"응. 그랬는데 선생님이 변했어. 지금은 용이 불을 뿜는 것처럼 무섭게 소리 지르셔. 근데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나까지 같이 혼나는 기분이야. 그래서 너무 억울하고 싫어."

"그랬구나. 그 상황들이 싫을 수 있지. 엄마 같아도 싫을 것 같아. 뭔가 긴장되고 놀라기도 하고 그렇지? 그렇지만 선생님은 한 명이고 학생은 24명이나 되잖아. 그런데 선생님이 아무리 좋게 말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선생님도 엄청 힘드실 거야.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는 건, 상대방과 마음의 거리가 멀게 느껴져서란다. "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다고 말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신호였다. 이런 상황들로 인해 학교에서 있는 시간들이 불편하니 도와달라는 일종의 구조요청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 나는 아이에게 미션을 주었다. 선생님이 소리 지르시고 혼내실 때 알림장 뒤편을 열어서 그 상황을 간단히 적어보라고 했다. 그렇게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고, 소리 지르는 상대가 내가 아닌 문제를 일으킨 대상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미션을 받은 딸아이는 재미난 모험을 떠나는 탐정이 된 것처럼 금세 밝은 표정으로 학교에 등교했다.






나는 모든 것에 잘 참는 편이다. 아픔도 잘 참고, 힘든 것도 잘 참을 수 있다. 그렇게 참다 참다 내 마음의 인내심이 밑바닥을 드러내면 폭발한 화산처럼 소리를 지르고는 한다. 도저히 나도 감당할 수 없는 마음속 울분이 그동안 참았던 내공들의 기를 다 모아서 입을 통해 나온다. 그러나 소리를 아무리 질러도 기분이 나아지거나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밖에 안 되는 나 자신을 마주하고 더 심한 자책감과 비참함이 느껴지고는 했다.


이제는 참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그 누가 들어주지 않아도 혼잣말처럼 입 밖으로 내뱉는다. 내가 나를 잘 알아주기만 해도 그 울분이 없어진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나와 가까운 관계라고 해서 나의 모든 것을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나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나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관계에 대해 나와 동일시하고는 한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를 몰라줄 때 서러움과 분노를 폭발시키고는 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모두 서로 다른 개별적 존재일 뿐이다. 서로가 타인임을 인지하고 나면 그 모든 분노와 서러움이 가라앉는다. 되려 나의 마음을 설명하고 알아차리려 하는 행위들이 내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준다.


나와 나의 거리를 줄이고 타인을 타인으로써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

Pea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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