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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by 유자씨




글을 쓰고 싶어 질 때는 대체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이다. 어지러운 집안을 청소하듯 나에게 글을 쓰는 행위는 마음속을 청소하는 것과 같다. 있어야 할 곳을 정해주고, 자기 자리를 못 찾고 헤매고 있는 마음속 감정에 이름을 붙여 제 자리를 찾아준다. 그렇게 어지러웠던 마음이 정리되고 나면 조금씩 명확해진다. 무엇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그 마음이 어떤 생각으로 이어졌는지, 그 생각이 어떤 행동으로 이어졌는지 분명해진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글쓰기였다. 내가 줄 수 있는 힘을 꾹꾹 눌러 담아 기대와 노력을 다해 썼다. 그러나 글은 쓰면 쓸수록 마치 운동과 같아서 몸과 마음의 힘을 빼야지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힘을 뺀다는 것은 무엇일까.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그에 부응하는 어떤 기대감을 버려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닌 7~80%만 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마 계속되는 시도와 실패 속에서 나만의 수치를 찾아가는 과정이 힘 빼기 그 자체가 아닐까. 계속해서 쓰다 보면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나는 68.9%의 노력만 할 거야. '라는 정확한 수치가 몸과 마음에 새겨질 수도 있지 않을까.

못하겠다.

아니, 잘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못할 것 같다.

아니, 시작하면 또 잘할 수 있을 거야.

도저히 못하겠다.

아니, 일단 하면 어떻게든 해낼 거야.

일단 시작하면 그동안 마음속에서 들끓어 오르던 수많은 고민들은 잠재워진다. 주사위가 던져졌기 때문이다. 마음속 뚜껑을 열어 들여다봤을 때 가장처음 떠오른 것은 굵은 기억의 조각들이었다. 인생에서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고 힘들고 슬픈 기억의 덩어리들과, 너무 행복하고 즐겁고 좋았던 기억의 덩어리들을 꺼내어 글로 옮겨내고 나니 마음속에 숨어있던 잔잔한 이야기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뒤죽박죽 섞여 서로 무엇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던 덩어리들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간 것처럼 마음에도 각각의 방이 생겨났다.

'너무'라는 부사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마음속 감정이 어느 정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들어가고 뒤섞여있던 큰 기억의 조각들이 자신의 공간을 찾아 들어갔을 때, 아주 작은 것들이 부유물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너무'의 기준이었다.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너무 빨리 가려고 하지 마.'

'너무 슬퍼하지 마.'

'너무 힘들어하지 마.'

도대체 '너무'는 얼마 큼이란 말일까. 나의 '너무'와 상대방이 내뱉은 '너무'의 온도가 다를 텐데. 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예민하게 굴지 않으려고 한 것일 수도 있는데, 상대방은 자신의 기준에서 '너무'를 붙인다. 결국 '너무'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기준이 아닌 말을 내뱉는 사람의 기준인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 만약 온도계가 있다면 나의 '너무'와 상대방의 '너무'의 온도를 구분할 수 있다면 너무 힘들어하거나, 너무 상처받거나, 너무 아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에게 '너무'라는 부사의 의미는 '치우침'이다. <너무의 온도>는 치우치지 않고 나만의 중심점을 찾아가기 위한 나만의 마음눈금표 같은 에세이다.

과연 이번 여정의 끝에서 나는 또 어떤 마음을 마주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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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