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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의 과거

행복은 지금, 여기, 이 순간

by 유자씨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망망대해 위 두꺼운 얼음조각이 떠다니는 아주 추운 바다였다. 나는 바닷속에 빠져 살려달라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내 팔과 다리가 몸부림칠수록 몸은 더 깊이 가라앉는 듯했다. 그 순간 저 멀리서 어떤 한 사람이 돌고래처럼 빠르게 헤엄쳐 나에게 왔다. 허우적거리는 나를 구해 육지로 데려다주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눈을 뜬 나는 내가 침대 위에 누워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생각난 꿈속의 그 사람.

나를 구해준 사람은 지금 나의 남편이었다. 나와 신랑이 6년 동안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 전 내가 꾼 꿈이었다.




우리 부부는 초, 중 동창생이다. 그저 같은 학교를 나온 동창생일 뿐 학교를 다닐 때는 서로 잘 몰랐다. 그러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스무 살이 다가오는 설렘과 함께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 어떤 조건이나 환경과 상관없이 서로를 그 사람 자체로 바라보며 만날 수 있었던 순수한 시절이었다. 불같이 사랑하고 싸우고 헤어지고 눈물짓기를 반복하며 6년간의 연애를 했다. 그리고 6년간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대만에서 나의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웠고, 신랑은 호주, 말레이시아, 필리핀등 여러 나라를 다니며 자신만의 꿈을 키웠다. 대만에서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회사를 다니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6년 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결혼을 했다.


신랑은 사회체육학과를 졸업했다. 모든 스포츠를 좋아하고 또 잘한다. 그 모든 스포츠 중에서도 수영은 수영강사를 했을 만큼 잘한다.


그렇다.

내 남편은 과거에 수영강사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주말마다 수영장에 가면 신랑이랑 딸아이 둘만 들어가서 놀고 나는 밖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쉬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은 셋이서 함께 수영을 즐기게 되었다. 물속에서 딸아이가 몸으로 말해요 퀴즈를 내면 나와 신랑이 맞추는 게임을 한다. 물속에서 둘과 눈을 맞추며 웃음 짓는 그 순간만큼은 슬로모션을 걸어둔 것처럼 느리게 느껴진다. 신랑은 딸아이를 등에 태우고 고래가 되어 헤엄친다. 나는 깊은 물에 들어가 수업 때 배운 영법들을 연습한다. 신랑은 딸아이와 놀아주다 멀리서 내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세를 교정해 준다.


"팔꿈치를 들어 올린다고 생각하고 오른손은 멀리 왼손은 좀 더 안쪽으로 찔러 넣어봐. 오멀왼안 오멀왼안 오멀왼안.... 이렇게 생각하면서 한번 해봐."


내가 처음 수영을 시작했을 때 신랑이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수영을 잘하게 될 수밖에 없어."

"왜?"

"내가 있잖아."


든든했다. 평생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가 더군다나 물을 너무나도 무서워했던 나에게는 수영을 배우기로 마음먹은 것 자체가 정말 큰 도전이었다. 신랑의 그 한마디가 내 마음속 안전장치가 되어주었다. 무섭고 두렵고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붙잡을 수 있는 나만의 안전장치.


처음 수영을 시작했을 때 나는 맨 마지막 순번이었다. 물에 얼굴을 집어넣는 것조차 무서워했고, 물에 몸을 띄우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다. 몸에 힘이 들어가서 자꾸 가라앉거나 바둥거려서 물을 먹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물을 하도 많이 먹어서 아침을 안 먹고 수영을 갔는데도 수영이 끝나면 배가 불렀다. 한 달, 두 달... 초급반을 지나 중급반으로 올라와서는 첫 번째 또는 두세 번째 순서로 출발했다. 물에 얼굴 담그는 것도 무서워했던 사람이 맞냐며 나와 처음부터 함께 수업을 들었던 언니들은 내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고는 한다. 지금은 고급반으로 올라와 신나게 물속을 유영한다. 물속 출발도 해보고, 360도 퀵턴도 해보고, 다이빙도 하고, 오리발을 신고 잠영도 한다. 새로운 걸 배울 때마다 물도 엄청나게 먹고 때로는 무리해서 아프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만큼 금은 너무나 재밌다.




나와 신랑은 MBTI만 봐도 완전 상극이다. 나의 MBTI는 INFP(잔다르크형)이다. 나는 현실감각이 둔하고 몽상가적 기질이 많다. 즉흥적이고 내면의 갈등이 심해 감정의 기복이 크다. 사회적으로 학습된 외향형이라 처음 만난 사람과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낯을 엄청 가린다. 어색한 상황을 못 견뎌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마구 내뱉어 버리는 광대가 된다.


반면 신랑은 ESTJ(사업가형)이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잘 어울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타고난 센스와 입담을 가지고 있다. 현실적이고 솔직하며 화끈하고 직설적이다. 논리적, 관적으로 분명한 규칙을 중요시해 그에 따라 행동한다. 렇듯 우리는 MBTI항목 중 단 한 가지도 일치하는 게 없다.


그래서 우리는 로또다.


너무도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우리를 반반 섞어놓은 아이를 낳았다. 처음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문제들을 직면했을 때 감정이 먼저 앞서 버리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가 틀린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상대방이 모두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너와 내가 다르기에 서로가 만나 완벽한 인간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임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다. 서로의 빈틈을 채운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발견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어서 감사합니다.


너무나도 다른 성향이지만 동갑 친구인 우리는 같은 세대를 살아온 문화적 동질감이 크다. 한 번씩 둘이 동전노래방에 가서 우리가 그 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들을 부른다. 지금, 여기, 이 순간 함께 노래에 취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한 달에 한번 둘이서 청도 운문사 사리암에 오른다. 힘들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정상에 올라 그림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지금, 여기, 이 순간에 감사한다.


친정엄마가 오셔서 딸아이를 봐주시는 주말 아침에는 신랑과 둘이서 새벽 수영을 간다. 때로는 선생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애인처럼, 배우고 장난치고 헤엄칠 수 있는 지금, 여기, 이 순간에 감사한다.


접영으로 멋지게 나에게 오는 신랑을 바라보며 나는 우리가 헤어졌을 때 꾸었던 나의 꿈을 생각하고는 한다. 차갑고 무서웠던 망망대해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를 꺼내어 준 당신과 지금, 여기, 이 순간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행복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 있을 때 행복한지에 대한 나만의 데이터베이스를 누가 더 많이 그리고 풍부하게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정서를 가장 많이 느끼는 대상은 바로 사람이다. 그래서 관계와 정서적 행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지혜의 심리학>中 -김경일-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오늘도 나는 나만의 데이터 베이스를 쌓아간다. 그리고 지금, 여기, 이 순간을 감사함으로 살아가려 한다. 일상의 작은 감사가 모여 행복이 되고 그 행복이 이따금 만나는 고통을 이겨낼 힘이 되어주며 건강하고 옳은 판단을 할 수 있게 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P.S. 그대가 없는 나의 수영일기는 있을 수 없기에...
다 쓰고 보니 그대에게 보내는 러브레터가 되어버렸구먼.
허허.





메인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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