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달 동안 아이를 품는다는 것은 내가 생각한 것 그 이상으로 불편하고 힘든 일이었다.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씩 피가 비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계류유산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유산을 방지할 수 있는 호르몬 주사를 맞고 가능하면 많이 움직이지 말고 누워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직장을 다닐 때에는 집에 가만히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는데, 막상 집에 누워만 있으니 움직이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그렇게 지루하지만 불안했던 시간이 흘러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뱃속의 아이가 자리를 잘 잡고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계획에 없던 혼전 임신이었다. 두려웠고 무서웠다. 무엇보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힘들게 대만 유학까지 보낸 딸이 직장을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혼전 임신을 했으니 말이다. 커리어우먼을 꿈꾸던 나의 꿈은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성공해서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던 나의 바람도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마치 애써 맞추던 그림의 작은 퍼즐조각들을 싹 갈아엎고 다시 새로운 그림으로 퍼즐 조각을 맞춰나가야 하는 기분이었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많은 말들이 마음속에 떠다녔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과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너 시집 안 간다 그럴 줄 알고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몰라. 너 난소낭종 수술해서 왼쪽난소도 없는데 이렇게 소중한 아기가 와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울지 마... 우리 딸... 엄마한테는 네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게 최고의 행복인걸."
배가 더 불러오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아이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임신 6개월 차에 결혼식을 올렸다. 상견례부터 시작해 청첩장을 만들고 결혼식장을 잡고 결혼앨범 사진촬영을 하고 신혼여행준비까지 일사천리였다.
스무 살 어린 시절부터 6년을 만났고 6년간 헤어졌다 다시 만나게 된 신랑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와준 소중한 아이였다. 철없던 남녀사이로 만날 때와는 사뭇 다른 책임감과 무게감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임신 8개월쯤 되었을 때 불러온 내 배를 보고 사람들은 만삭이냐고 물었다. 임신 9개월 차엔 내 배를 보고 쌍둥이를 가졌냐고 물었다. 유독 양수가 많았고 배도 크게 불러왔다. 기존에 갖고 있던 나의 살들도 물론 한몫했겠지만 이건 마치 물이 가득 담긴 터지기 일보직전의 물풍선 같았다. 출산예정일이 다가올수록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고 화장실 가는 것도 불편했다. 자연분만을 원했던 나는 아이가 나올 신호를 보내길 하루하루 기다렸다.
아이를 뱃속에 품은 지 39주 3일째가 되던 날 밤 화장실에 갔다 나오는 순간이었다. 뱃속에서 '퐁-'하는 느낌이 들더니 양쪽 다리사이로 뜨뜻한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양수가 터진 것이었다. 신랑을 깨웠다.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꾸려놓았던 출산가방을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일사천리로 출산준비가 시작되었다. 양수가 터져서 도착했기에 빠른 분만을 위해 유도분만 주사를 맞았다. 골반이 얼마나 열렸는지 간호사님께서 수시로 오셔서 확인하셨다. 일명 '내진'이라고 하는 이 절차는 나를 패닉에 빠뜨렸다. 간호사님의 손을 팔꿈치까지 내 몸속으로 넣어 속골반이 얼마만큼 벌어졌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웠다. 내가 사람이 아닌 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확히 8시간 뒤 이 정도의 고통과 수치심은 완전히 잊힐 만큼의 고통이 찾아왔다. 간호사님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하셨고 의사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산모님! 힘주실게요. 힘!!!!!!!"
"호흡하시고 한 번 더 힘!!!!!"
"아기 머리 보이기 시작했어요. 한 번 더 힘주실게요. 힘!!!!"
난 분명히 젖 먹던 힘까지 준 것 같았는데 힘이 모자랐나 보다. 수간호사님께서 내 몸 위로 올라타시더니 갈비뼈를 힘껏 누르기 시작했다.
"산모님 지금이에요!! 힘주세요. 힘!!!!!!"
드라마에서 보던 출산장면은 산모들이 그렇게 소리를 지르던데 나는 어찌 된 일인지 소리가 질러지지 않았다. 그저 내 몸에서 힘을 줄 수 있는 모든 곳에 힘을 주며 눈물만 계속 흘릴 뿐이었다. 그렇게 영원 같던 시간 속에서 더 이상의 고통은 느껴볼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이 계속되었다.
"어이구, 공주님 떡대 봐라."
의사 선생님의 짧은 한마디가 들렸다.
'아, 이제 우리 딸이랑 만나는구나.'
간호사님이 아이를 내 가슴 위에 얹혀주셨다. 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의 태명을 불렀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아이를 안아보려 손을 대려는데 갑자기 의사 선생님께서 간호사분들께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셨다.
"아기가 안 울잖아요! 빨리 호흡기!!!"
10개월을 기다려서 만난 딸아이를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하고 떨어져야 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심각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었다.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이가 나오면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가 나온 뒤에도 태반이 나와야 했다. 태반이 나온 다음에는 아이가 나올 때 찢었던 회음부를 다시 꿰매는 절차가 남아있었다. 마취도 안한채 생살을 꿰매는데도 아무런 통증이 안 느껴졌다. 나는 그저 아이가 나간 문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반 산부인과에서 한 출산이기에 아이를 인큐베이터 시설이 있는 타 지역 대학병원으로 이송해야 했다. 병원에서 진단해 준 아이의 병명은 비일괄성 호흡증후군이었다.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없어서 산소호흡기를 달고 인큐베이터에서 일주일을 보내야 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이미 내가 알던 내 모습이 아니었다. 제대로 힘을 못준 나의 얼굴과 눈동자는 실핏줄이 다 터져 있었다. 토끼처럼 빨개진 눈에 계속 울기만 했던 터라 눈꺼풀은 두꺼비처럼 부풀어 올라있었다. 발목과 손목은 두꺼운 각목처럼 부어있었고, 아이가 나왔는데도 내 배는 그대로 부풀어 있었다.
아이를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몸조리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신청해 뒀던 산후 마사지도 받고 싶지 않아 연기시켰다. 아이가 아픈 게 꼭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내가 아이를 품고 있는 열 달을 제대로 보내지 못해 아이가 아픈 것만 같았다. 초기에 아이를 유산할 뻔했던 나의 무지함과 부주의 때문인 것 같았다. 안정기에 들었다고 안심하고 결혼식까지 진행한 나의 무모함과 어리석음 때문인 것만 같았다. 이 모든 것이 다 내 탓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가 입원한 대학병원은 내가 입원한 산부인과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 가야 되는 거리였다. 회음부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차로 이동해 아이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매일 면회시간에 맞춰 아이의 얼굴을 보고 온 신랑이 보내준 사진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졌다. 황달이 와서 마지막까지 애간장을 녹이긴 했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아이는 건강하게 병원에서 퇴원했다. 그 뒤로 2주간의 조리원 생활을 마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 진짜 실전 육아의 시작이었다. 이 작고 연약한 생명체가 움직이며 행동하는 모든 것이 다 신비롭고 신기했으며 경이로웠다.
딸아이가 태어난 지 6개월쯤 지났을까. 단순한 감기증상인 줄 알았다. 소아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였는데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호전이 안되자 소아과 선생님께서는 입원이 가능한 큰 병원을 가보라고 하셨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번엔 인큐베이터는 아니었지만 다시 또 입원이었다. 아이는 모세기관지염이었고 일주일간 병원에서 호흡기치료와 항생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퇴원한 지 3일 만에 다시 또 입원을 했다. 폐렴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와 함께 병원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와 아이가 다시 한 몸이 되어야 하는 일이어야 했다. 우는 아이를 업고 안고 병원복도를 걸어 다니며 달래고 재우기를 반복했다. 약을 먹이면 토하고 항생제를 먹고 설사를 했다. 내 손바닥 4분의 1 크기도 안 되는 아이의 작은 손등과 발등에 혈관을 찾아 바늘을 꽂았다. 자지러지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나도 울었다.
"엄마가 미안해..."
아이의 아픔이 차라리 나의 아픔이기를 기도했다. 그 뒤로도 세돌이 지나기 전까지 아이는 수차례 폐렴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유독 몸이 지치는 그런 날이었다. 생리 전이라 몸이 무겁기도 했고 기분도 처지는 날이었다. 등원준비를 하며 힘들어 보이는 내 모습을 보던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내가 미안해..."
"응? 왜? 뭐가?"
"엄마는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우리 먹을 맛있는 밥도 차려주고 청소도 하는데,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만 하고 엄마 도와주지도 않은 것 같아서 미안해..."
"그랬구나... 엄마가 힘든 모습을 보고 우리 딸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구나..."
순간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하고 싶은 것들을 즐겁게 하고 있을 때마다 나는 늘 아프고 힘들었던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는 내가 행복한 것이 엄마의 행복이라 했지만, 사실 나는 엄마가 행복해야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바라본 엄마는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보다는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아이에게 말했다.
"우리 앞으로 그런 마음이 들 때는 미안하기보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어떨까? 엄마가 집안일을 해주셔서 감사하고, 맛있는 밥을 차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이야. 그리고 엄마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면 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네가 가지고 논 장난감들을 스스로 정리한다던지, 네가 먹고 난 밥그릇은 싱크대에 갖다 놓는다던지 말이야."
"아 그래? 알았어. 엄마 감사해요! 사랑해요!"
"엄마도 우리 딸 많이 많이 사랑해!"
딸아이가 잠든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아이의 모습은 어찌 그리도 선명하게 보일까. 탐스러운 두 볼을, 동글납작한 콧방울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말랑하다. 아이의 동그란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딸아이 얼굴의 솜털이 내 코끝에 보송하게 느껴진다. 새근새근 잘도 내쉬는 한숨한숨이 어찌나 기특하고 예쁜지 잠든 딸아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이의 건강한 모습에 그저 감사한 마음만 들 뿐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는 나 어렸을 때 잠든 모습 보면서 무슨 생각했어?"
"엄마는 많이 울었지. 미안해서 울고, 예쁘고 기특해서 울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희생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함만 남겨주었다. 이제 마음속 무거운 미안함 들은 그만 흘려보내주고 그 자리에 감사함을 채우려 한다. 내가 온전히 행복해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도 행복해진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간다. 행복은 달콤한 솜사탕이 아니다. 달고 쓰고 맵고 짠 인생의 모든 순간이 어우러져 행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함으로 보내려 한다.
엄마,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감사해요.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키워주셨다는 것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이제 우리 더 이상 서로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졌던 미안한 마음과 어쩔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생겼던 모든 일들은 흐르는 시간 속에 보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