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집 손녀로 태어나 신선한 과일을 원 없이 먹으며 자랐다. 어릴 때는 과수원에 심긴 배나무, 사과나무, 포도나무, 복숭아나무, 앵두나무, 감나무, 무화과나무 등 여러 과일나무 사이사이를 뛰어놀았다. 그때는 이런 과일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커서 해외여행을 하다 보니 처음 보는 과일들이 많았다.
처음으로 동남아시아 나라인 말레이시아를 여행할 때 망고, 용과, 리치, 망고스틴, 람부탄, 파파야, 스타프루츠 등 처음 보는 달달하면서도 한국에서 먹어보지 못한 식감의 과일들을 접할 수 있었다. 맛으로 따지자면 망고가 과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만큼 단연 최고지만 가장 임팩트가 있었던 것은 단연 두리안이었다. 지금은 마트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과일들이지만 그때만 해도 마트에 가면 열대과일이라고는 바나나, 파인애플, 멜론, 오렌지 정도였다.
말레이시아 어학원에서 영어 공부를 할 때였는데, 함께 공부하는 한국인 동생들이 두리안을 먹어봤냐며 물어왔다. 말레이시아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두리안이라는 과일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도 꽤나 충격적인 과일이었는지 동생들을 통해 설명을 듣고 나서부터는 괜한 호기심이 불타올랐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두리안은 냄새가 지독한데 과육은 매우 부드러운 버터 같고 싱가포르에서는 두리안을 들고 지하철을 타면 벌금을 물어야 하며 호텔에는 반입 금지란다. 잉? 무슨 과일이길래 이렇게 까다롭지? 그리고 과일에서 냄새가 나면 얼마나 이상한 냄새가 나길래...? 나의 호기심 어려하는 눈빛을 보고 그들은 며칠 뒤 두리안을 들고 내 방에 찾아왔다.
"띵동"
"누구세요"
"누나, 두리안 사 왔어요"
"잉? 두리안?"
두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당시 급했던 영어공부에 빠져 잊고 있었는데, 두리안을 들고 현관에 서 있는 녀석들을 보는 순간 코를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겉은 징이 박힌 듯 뾰족뾰족 방어적인 태세를 하고 있던 두리안은 냄새조차 방어적이었다. 나에게 손대지 말라는 듯.
두리안을 사 온 동생들은 그때 고등학생이었는데, 능숙하게 두리안을 잘라 과육을 보여주었다. 적응하려나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냄새만큼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과육은 약간은 큰 애벌레 같은 형태로 노랗고 흐물흐물했다. 과육을 잘라먹어보라며 내 손에 쥐어주는 이 녀석들이 한국에서 갓 도착해 어리바리해 보이는 나를 놀리는 건 아닐까 살짝 의심하며 입 안에 넣었다.
"음~?"
기억이 오래되어 가물가물 하지만 부드럽고 달달하면서도 쫀득했다. 망고의 달달함과는 조금 다른 달달함이었다. 한 입 먹고 나니 냄새도 익숙해지고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녀석들이 사 온 두리안 1통을 나눠 먹으니 금세 바닥났다. 신기한 맛을 지닌 두리안. 다른 과일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지 않았는데, 나에게 두리안을 맛 보여주기 위해 용돈을 털어 사다 준 녀석들이 내심 고마우면서도 의심한 것에 대해 혼자 미안해했다. (나중에 녀석들에게는 맛난 저녁을 대접했다.)
암튼 의도치 않게 두리안을 접하고 말레이시아 생활도 막바지에 들 때 말라카로 여행을 떠났다. 일주일간 말라카의 게스트하우스 도미토리에 묵었다. 베드 한 개를 저렴하게 얻어 생활했던 이 숙소의 가장 큰 매력은 야외 샤워장이었다. 바위로 둘러싸인 샤워실은 오후 2시쯤 해가 뜨거울 때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면 안에 무지개가 생겼다. 바위 틈새로 수풀이 나 있었는데,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에 밖을 싸 돌아다니며 구경하러 다니다가도 더운 오후 2시가 되면 숙소에 들어와 샤워를 하면서 무지개를 감상하곤 했다.
게스트하우스인지라 숙소에 묵는 동안 게스트를 위한 파티가 종종 열렸다. 그중 하루 저녁에는 두리안 파티가 열렸다. 두리안 파티라니?! 게스트 3명과 호스트 2명이 참여를 한다고 했다. 동생들이 두리안을 선물해 처음 맛본 이후로는 접할 기회가 없었기에 나도 곧장 참여 신청을 했다. 약간의 회비를 내면 신청은 끝이었다. 말라카 여행을 하다가 약속한 저녁 6시에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두리안 파티라길래 두리안 몇 개 사서 나눠먹겠지 했는데, 도착한 부엌에는 두리안이 산더미였다. 이 두리안을 우리가 다 먹는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호스트 말로는 두리안도 각각 맛이 조금씩 다르단다. 그 맛을 음미하면서 함께 먹어보잔다. 안 되는 영어로 미묘한 두리안 맛을 서로 이야기 하면서 알아들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며 두리안을 나눠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두리안을 먹을 일이 또 언제 있겠어? 한국에 돌아가면 두리안은 이제 영영 못 먹을지도 모르는데.
두리안 맛은 정말 다 달랐다. 당시 영어를 일상생활에 쓸 때라 나름 가장 유창했던 시기였는데, 두리안의 미묘한 맛을 영어로 어찌어찌 표현하며 함께 여행하는 게스트들과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던 걸로 기억한다. 두리안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24년 가을. 포포 열매를 알게 됐다. 껍질을 깐 채 들고 있는 포포 사진이 처음엔 고구마 껍질을 벗겨놓은 건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처음 보는 포포 열매. 납작 복숭아 이후로 최근 첨 보는 낯선 열매였다. 겉은 초록색인데, 과육은 선명한 노란색. 무슨 맛일까? 설명이 있었지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아 바로 주문버튼을 눌렀다.
며칠 뒤 퇴근 하고 집 앞에 도착하니 문경에서 출발해 우리 집 앞으로 다소곳이 배달되어 있는 스티로폼 박스를 볼 수 있었다. 9월이 제철이라는 포포열매는 스티로폼 박스에 쌓인 채로 냉동팩과 함께 담겨 있었다. 박스를 집에 들여다 놓고 쉬면서레오를 기다리며 일단 씻고 저녁 준비를 했다. 조금 늦는다는 레오의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에 냉동 피자에 시바스리갈을 언더락으로 한 잔 마시면서 그를 기다렸다.
레오가 도착해 박스를 가리키며 이게 뭐냐고 묻는 말에 아차 싶어서 박스를 뜯기 시작했다. 응? 박스를 여니 기억 속의 향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자기, 방귀 뀌었어?" "아니, 박스에서 나는 냄새야" "박스?" 정말 그랬다. 하나씩 포장된 열매를 코에 갖다 대니 그 냄새. 기억 속의 두리안 냄새가 소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보다는 덜하다) 무슨 맛일지 너무 궁금해 바로 하나를 먹어보기 위해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안내지에 단단한 생과는 상온에 2~3일 정도 후숙하여 말랑말랑 해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으라고 쓰여 있었는데, 녀석들은 이미 껍질이 말랑말랑했다. 후숙이 되면 냉장 또는 냉동보관해 먹으면 된단다.
껍질을 까니 영락없는 고구마였다. 샛노란 자태의 과육. 먹기 좋게 자르려고 하는데 중간에 단단한 것이 있었다. 마치 큰 강낭콩 같은 형태의 씨였다. 씨를 제거하고 먹는데 약간 새콤하면서도 쫀득한 것이 두리안을 연상케 했다. 두리안보다는 좀 더 무른 느낌이 있긴 했지만. 오랜만에 맛보는 색다른 과일맛이었다.
이름이 왜 포포일까? 레오에게 "포포 먹고 싶으면 얘기해"라고 얘기하니 슬쩍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한다. "뽀뽀?" "아니, 포포말야." 이렇게 추억 속의 기억을 끄집어내 준 포포열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과일을 접하게 될까?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