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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스페인 정전

세상이 멈추면 보이는 것

by Youmi Sa

제가 스페인 집에 있을 때마다 스페인 역사에 기록될만한 좀처럼 흔하게 벌어지지 않는 사건들이 벌어지는 거 같습니다. 2020년 초의 Covid lockdown (estado de alarma)가 그랬고 이번 주에 벌어졌던 2025년의 4월의 봄 스페인 나라 전체의 정전 (Apagón - blackouts)이 그러했습니다.

2020년 4월 코비드로 전 세계가 멈췄을 때 저는 바르셀로나에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유럽에서 코비드로 인한 사망지가 많아서 최고 수준의 락다운 (estado de alarma)를 했지요. 집에서 한 블록 거리 안에서만 이동이 가능했었고 그것도 에센셜 한 (그로서리 쇼핑, 병원, 약국) 활동만을 허용했습니다. 경찰이 블록 코너마다 서있었으며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벌금을 매겼지요. 시간이 지나며 락다운이 강도가 줄어들고 2년 정도가 지나자 다시 사람들의 시계는 정상 속도로 움직였고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왔지요.

그리고 5년이 지난 2025년 4월 비슷한 시기에 다시 한번 스페인의 시계는 멈췄습니다. 이번에는 나라전체의 전기, 통신, 결제 시스템이 오후 12시 30분에 동시에 마비가 된 것입니다. 삐비빅, 집의 두꺼비집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었을 때 저는 막 요리를 끝내고 점심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빌딩에 전기가 나갔나 보다 잠시후면 돌아오겠지 싶어서 별 마음의 요동 없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테이블 정리를 하고 강아지 산책을 하러 나갔습니다. 평상시와 달랐던 점은 제 핸드폰의 모바일 시그널이 잘 안 잡히고, 메신저를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 역시 별 큰 문제가 아니지 하며 식사 중에는 대수롭지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길을 나가보니 평소와는 다른 길과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희 빌딩뿐만이 아니라, 옆의 건물 더 나아가 도로의 모든 상점, 그리고 길 건너의, 또 길 건너의 거의 제 눈에 담을 수 있는 모든 곳의 전기가 나가있고 사람들이 웅성웅성 건물 밖, 가게 밖으로 나와있더라고요. 참 이상한 하루다 싶었지만 좀 있으면 전기가 들어오겠지 싶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금방 돌아오겠다는 생각은 기우였고 전기, 통신은 3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어 다시 집 밖으로 나갔고 배터리로 작동하는 라디오를 둘러싸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가까이 가서 물어봤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시나요?... 그중 한 청년이 말하더라고요. “포르투갈과 스페인 나라 전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전이 일어났고 전기가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 하.. 당혹스러웠습니다. 마치 코비드 락다운 기간의 답답함이 deja-vu처럼 밀려왔고 식은땀이 났습니다. 일단 집으로 돌아와서 발코니의 의자에 앉았습니다, 저희 집은 사실 낮에도 불을 켜지 않더라도 전면의 창이 커서 햇빛이 집안으로 환하게 들어오기에 전기가 나갔지만 사실 집만 보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지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발코니에서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못 읽었었던 여러 요리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어디서 들어봤던 ‘혼돈 속의 여유, 혼란 속의 평화’라는 말이 이렇게 와닿을 수가 없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길을 문득 바라보니, 어떤 사람들은 칵테일을 만들어 바깥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 햇볕을 즐기며 마시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라디오에 음악을 켜서 춤을 추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돗자리를 펴서 일광욕을 하듯이 누워있더라 말입니다. 세상이 멈추고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어둠이 찾아오니 마치 사람 안의 배터리가 켜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저희 구역은 다행히 정전이 일어난 지 4시간 뒤인 4시 반 정도에 전기가 복구되었고, 바르셀로나는 구역마다 시간차가 있었지만 새벽 12시 즈음이 되자 거의 99프로의 전력과 통신을 서서히 복구가 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아직 이 온 나라의 동시 정전의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멈추자 사람들이 켜지는 이런 재미난 경험은 아직도 강렬하게 제 머리에 남아있습니다.

이 사상초유의 나라 전체의 정전이 일어난 다음날 저녁 저는 예루살렘 아티초크 (=뚱딴지=돼지감자)를 이용한 수프를 만들었습니다. 정전 때문에 피해 입은 상점이 많았는데 특히 제 단골 유유&요구르트 집처럼 냉장식품이 많은 곳은 더더욱 그럴 것 같아서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우유와 oveja (양) 요구르트를 사 와서 수프 만들기로 했습니다. 제철 재료인 뚱딴지는 당뇨에도 좋아서 차로도 덖아 먹는데 저는 파이와 수프로도 자주 해 먹는 재료입니다.


레시피는 이러합니다. 뚱딴지 400g을 감자 필러로 껍질 벗긴 후 큐브모양으로 자르고 양파 반 개도 다지고 마늘 7개 살짝 힘으로 누른 후 통으로 넣고 치킨스톡 1L와 루꼴라 한 줌 다져서 뚱딴지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끓입니다. 커다란 볼에 그릭요구르트 (저는 양 요구르트 사용) 350g이랑 달걀 1개 섞은 후 조금씩 수프를 요구르트에 한 국자씩 섞습니다. (Splitting 방지). 그 후 다시 냄비에 부어서 5분 정도 부르르르 끓이면 끝입니다.

따뜻한 수프를 마시며 오늘은 바쁜 일상 속에 우리가 잊고 있는 즐거움은 무엇인가. 온 세상이 멈췄을 때 사람다움이 살아나는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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