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과 고기와 양파, 감자, 카레가루만 넣으면 카레가 될까?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어린 시절의 앨범에 있는 가족사진을 많이 본다. 앨범을 보면 참 가족들과 찍은 사진들이 많아 보이고 어디 많이 놀러 다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는 정작 그 사진들 중에 기억나는 장면이 거의 없다. 내가 기억하는 건, 늘 주말만 되면 아빠는 친구들과 놀러 나가서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엄마는 매일 집안일을 하며 집에만 지내는 것. 한창 호기심이 많았을 나이에는 박물관에 가거나 캠핑을 가거나 멀리 여행을 가는 다른 가족들을 보면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방학이 끝나고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교실에 앉아 오랜만에 친구들이 방학 때 뭐 했는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족들끼리 어디 여행을 갔다고 하면 얼마나 그게 부러웠던지. 지금도 그 마음이 생생하다. 아무리 우리 가족들에게 같이 어디를 가자고 해도 부모님은 피곤하다는 말, 거기 가봤자 별로라는 말, 비용만 비싸지 볼 거 없었다는 말을 할 뿐 크게 관심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가족들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은 중학생인 나에게 4-5살 정도 될 무렵의 이야기와 사진들을 꺼내며 ‘네가 기억 못 해서 그런 거야. 어렸을 때 너희들 데리고 놀이동산이며 공원이며 얼마나 많이 갔다고.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 우리 가족도 많이 놀러 다녔어.’라고 말한다.
“제게는 가족이 포스트 잎처럼 언제든지 때었다가 붙었다가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가족이라면 그 이상의 끈끈한 유대감이 있어야 하는데 필요에 따라 때었다가 붙였다가 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존재예요.”
나는 어렸을 적부터 우리 가족이라는 말이 어색했다. 그 이유는 나에게 가족은 마치 감자와 고기, 당근을 썰어 넣고 카레 가루만 부어 놓은 상태를 카레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을 넣고 재료가 잘 어우러지게 끓여지는 과정이 생략된 이 카레처럼 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저 엄마, 아빠, 나, 형제는 피를 나눈 가족이니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함께 있을 뿐 정서적인 교류를 나눈 기억이 없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가족들은 옳다 아니다 하며 각자 자신들의 입장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을 내세우기 바빴고, 정작 이를 이야기하는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하고 수용해 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감정적인 소통은 물론, 의사소통 자체도 전혀 되지 않는 가족이었고 나에게는 절대로 통하지 않는 벽처럼 느껴졌다.
가족끼리 소통하는 자리를 만들자라고 하며 가족모임을 하자고 하지만 결국 그 자리는 아빠의 훈계하는 무대였고, 부모 사이나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를 봐도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지 않는데 우리 가족의 가훈은 늘 사랑이었다. 쓰러져서 응급실에 누워있는 나에게 내가 자신의 일을 중간에 그만두고 나오게 했다며 지적을 하던 아빠는 내가 유명한 대학에 합격을 하자 사람들에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라며 자랑을 한다. 배가 고파서 냉장고 문을 열기만 했는데 자신에게 밥 먹을 거냐고 묻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아이라고 낙인을 찍었던 아빠가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면 이해력이 느리고 고지식한 아이라고 소개하면서 정작 나에게는 “나는 너를 한 번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단다. 사랑한다.”라고 한다. 자살시도까지 생각했을 만큼 힘들어서 울고 있을 때 나를 손가락질하며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던 나머지 세 가족. 나는 이런 가족에게 정말 진심으로 마음에 와닿는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뭐랄까.. 정말 한마디로 드라이하네요.”
상담선생님의 이 반응은 그동안 내가 가족과 소통하려고 하면 몸으로 느껴지던 답답함과 숨 막힘을 명확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드라이한 집안. 정말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는 건조한 분위기. 내가 정말 가족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은 진심으로 딸을 아끼는 마음으로 부르는 ‘우리 딸’이라는 말이었다. 처음에 나도 이런 가족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정신으로 소통이 되지 않는 가족을 내 몸과 같이 사랑했다. 잔심부름을 시켜도 화가 나지만 다 들어주면서 잘해주려고 노력했고, 엄마가 어린아이처럼 나에게 의지해도 마치 내가 엄마를 키우듯이 예뻐했고, 엄마에게 함부로 대하는 그런 아빠도 미웠지만 어떻게든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말도 예쁘게 상냥하게 하려고 노력했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상대의 입장에서 먼저 이해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하면 가족들도 이런 나의 노력처럼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분위기로 바뀔 줄 알았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가족은 변하지 않았고 그런 나는 나 혼자만 노력하고 있는 듯한 모습에 점점 입을 굳게 닫고 가족 안에서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항상 하루라도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가보지 않은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자주 갔다. 아무래도 차가 있어서 어디든 도심을 떠나 아름 다운 곳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힐링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어느 날은 나가 왜 그렇게 여행을 떠나는 건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윤아 너는 왜 그렇게 어디든 떠나고 싶었던 거야?’
‘차를 타고 떠날 때 어떤 기분이니?’
‘잘은 모르겠지만 마치 가족과 함께하는 느낌이 들었구나.‘
‘어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족들과 함께 있는 따뜻한 느낌을 원했구나 넌.’
나는 나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제야 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가족들을 보며 부러워했던 내가 원한 것은 가족들끼리 어디를 놀려가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가족들과 캠핑장에 가고, 아쿠아리움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며 자랑하는 친구들을 보며, 가족과 놀이동산을 가고 친척집에 가며 좋은 식당에서 맛있는 밥을 먹었다고 자랑하는 친구들을 보며 내가 바랬던 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인 혈연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고 받아주는, 서로 감정을 교류하는 그런 따뜻한 유대감이 아니었을까? 무의식의 나는 옳은 길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처럼 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가족에게 정말 필수적인 이런 정서적 유대감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는 핸들을 잡고 어디론가 달리고 있는 내 자신에게 이제 내가 너의 옆에서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주고 감정을 읽어주는 그런 따뜻한 가족이 되어줄 거라고, 이제 그만 떠나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