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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Oct 03. 2020

낙엽, 로맨스 그리고 나

1.

선선한 바람이 손 틈새로 흐르면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활짝 펴본다. 온몸 구석구석 찬 공기가 스치면 빙긋 웃음이 난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왔다.

가을은 고백의 계절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봄도 아니고 가을만 되면 이 계절이 주는 모든 것이 좋아서 좋은 걸 나누고 싶어 지고, 함께 보고 싶고 그러다 누군가 막연히 그리워진다. 사랑에 빠진 이는 더 깊이, 사랑에 빠지지 못한 이라면 어디든 퐁당 빠져버리고 싶어 지는 계절. 심장이 저릿하게 조여 오고, 대상 없이도 마음에 진동이 오는 순간은 가을뿐이다. 단연코 멜로의 계절이다.


드라마도 가을엔 멜로가 제일 재밌다. 굳이 멜로인 이유는 달콤 쌉싸름한 맛이 있어서다. 요 며칠은 TV 어떤 드라마를 봐도 두 남녀가 나와 사랑을 고백하기 바빴다. 부푼 마음이 한순간 터지듯 툭 흘러나오거나, 쌓이고 쌓인 마음이 넘쳐 제방이 무너지듯 절절한 고백들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키스신. 아이고 세상에! 사랑을 고백하고, 오해가 풀리고 나면 당연하다는 듯 입술을 맞대는 두 남녀를 보며 '어떻게 한 번을 안 빠지냐!' 싶지만 어느새 발을 동동 구르고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걸리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나 보다. 절정의 순간, 말로는 부족하고 마음은 보이지 않으니 가장 효과적인 전달이 아닐까. 정작 키스신이 없으면 제일 섭섭해하는 사람도 바로 나 같은 사람들일 테다.


나와 같은 드라마를 보는 회사 동료는 한참 드라마 얘기로 떠들다 자기가 작가가 되면 1회 1 키스신을 쓰겠다고 했다. 한 회에 한 번씩이 나요? 기겁하는 내 반응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이왕 하는 거 팍팍해야죠. 그래야 시청률이 오른다고요. 하여튼 아영 씨도 로맨스를 좀 써봐요!


말은 쉽지. 나도 막 이렇게 저렇게 팍팍 쓰고 싶다!




2.

그러고 보니 누굴 좋아한 적이 언제였더라. (덕질은 예외다) 좋아한다고 고백한 적도 언제였는지 까마득한 옛날이다. 취업하면, 자리를 잡으면, 돈을 좀 더 벌면, 잘해 줄 자신이 생기면, 코로나가 끝나면, 다음에, 다음에 하고 미루기만 했다. 그 기간이 몇 년이 되다 보니 연애 왜 안 해? 하고 물어오는 사람도 많고, 몇몇 친구들의 숙원사업이 나의 연애가 되기도 했다. 아마도 그들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사랑 없이 못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랑을 제외하고 나머지만 있어도 살 수 있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미루는 게 가장 쉬운 일이란 것을.

그래서 좋아하는 마음마저 미루고 미루어 어떻게 되었나. 키스신에 베개를 차면서도 굳이 본방송을 챙겨보며 부족한 감성을 채우고,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지난 시간의 무게가 한 번에 쿵 하고 떨어져 씁쓸해져 버리고, 면역이 약해진 마음이 겁나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작가가 사랑 앞에서 도망치면, 주인공도 도망치기 마련이다. 아니면 도망치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거나. 나와 전혀 닮지 않은 캐릭터들도 뒷걸음질 치며 떠나고 만다.

좋은 걸 보고 느끼고 그러나 나눌 수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태까지 나 혼자 잘 먹고 잘살았는데 갑자기 모든 게 무소용이 된 것만 같다. 그야말로 인생 노잼 시기. 이렇게 퍼석한 감성으로 로맨스를 쓴다고 하면 그게 바로 판타지가 아닐까.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떠올리다가도 로맨스 앞에서는 턱턱 막히니 방도가 없다. 상상은 좀 쉬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군. 역시 상상력이 풍부한 타입은 아니라서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콩을 심어야 콩이 나는데 내 땅은 척박한 황무지고......

발에 치이는 돌멩이도 비웃는 거 같다. 곧 떨어질 단풍잎들도, 나뭇가지도, 온 동네 마음 없는 것들은 모두. 쟤 좀 봐! 자기애, 가족애, 동료애, 우정에 인류애까지는 모두 하고 연애는 하지 않는 자. 가을이라 심장이 저릿한 게 좋다면서 사랑에 마음 다치는 건 피하는 자. 그러나 결국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말이야...... 사랑이야 하는 자, 그자 유죄! 라며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찔린다.


적당한 때가 어디 있다고, 마음에 다 차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잃을 것이 없었는데 섣불리 짐작한 것, 표현해보지 못한 것들이 떠오른다. 아끼다 똥 된 감정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이 켜켜이 쌓여 가을이면 안으로, 안으로 불어온다. 온몸을 통과하며 간다. 그래 가, 가버려! 다신 돌아오지 마!




3.

빙하는 다 녹아 간 대고, 여름엔 비도 무지막지하게 내리고, 겨울엔 역대급 한파라고 하고, 무엇보다 언제 코로나에 걸릴지 모르고, 다른 전염병이 와도 안 이상하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와중에 다들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거고, 나만 남고! 그러다 만약 바이러스까지 걸린다면!! 나 죽는다고 슬퍼할 연인 하나 없이 쓸쓸하게 병원에서 꼬르륵... 아, 안 돼!




4.

밤 기온이 내려가 이슬이 맺힌다는 백로를 지나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된 9월 어느 날, 내년에 결혼을 앞둔 친구와 함께 지난 3월에 예약해 장장 6개월을 기다린 점집에 다녀왔다. 먼저 다녀온 다른 친구 말로는 이년아, 저년아 막말을 한다기에 걱정 반, 도대체 얼마나 용하길래 하는 호기심 반으로 6개월을 기다렸다.

대망의 날, 혹시 만만해 보일까 봐 아이라인도 빡세게 그렸다. 신점이라면 이 전에 처참히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헛소리를 하면 잘 흘려들을 자신이 있었다. 이번이 내 인생 마지막 점이다! 다짐까지 하고 들어선 점집에서는 빡빡머리에 덩치가 꽤 있는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서 와. 숨 좀 고르고 준비되면 얘기해~


예상과 달리 상냥했다. 아저씨는 나를 아가라고 불렀다.

그럼 어디 한 번 들어볼까 싶어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이 아저씨 괜히 예약이 6개월 걸리는 게 아니었다.

우리 아빠 베리 농사짓는 것도 맞히고 (아빠 건강을 위해 허수아비 묻어야 한다고 했지만), 아빠가 허허실실이라 우리 엄마 평생 똥줄 탄 것도, 나 이사하는 것도, 글 쓰는 것도, 그게 소설도 아닌 극본이라는 것까지 맞혔다.


그리고 또 종이에 뭔갈 끼적이더니 읽어보라 했다.

종이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남자 XXX

29 XXX

30 XX

31 X??


나는 종이를 보다 말고 고갤 들어 아저씨를 봤다.

내 쪽으로 돌려진 종이를 슬쩍 아저씨 쪽으로 밀었다.


에이~ 아니죠?

왜 자꾸 웃고 그래. 이게 뭐겠어.

알아도 몰라요. 에잇...! 이거 아니잖아요!

너 제대로 된 연애 못해봤지?

아저씨! 사람을 뭘로 보고... 좀 되긴 했어도 다 해봤거든요!

그래, 근데 그거 사랑 아니었어. 우정이었지.


허, 참! 진짜 짜증 났다. 반박할 수 없었던 게 그랬던 것도 같아서였다. 우정에서 시작해서 끝엔 우정도 박살 났다. 이젠 기억도 잘 안 나는 옛날 옛적이지만 그래도 그게 다 우정이었다고 하면 진짜 억울하다. 사랑이 뭔데!


그래서 저 내년에도 없다고요?


분명 안 좋은 말은 흘려듣기로 했는데 자꾸 간절해지는 것이. 좀만 덜 맞았어도 내가 안 이러는데.


아니. 받아 적어. 용문산에 안개 걷히듯 어쩌고 저쩌고 인연 만나게 해달라고 써! 종이에 쓰고 태워! 묻어!


허수아비도 묻으라더니 종이도 태우라고 하고, 난 뭘 좀 하지 않고 잘 될 수는 없는 건가.

하도 빨리 말해서 절반은 못 알아들었다. 답답했는지 얼른 핸드폰 꺼내서 쓰라고 닦달을 하길래 불러주는 대로 메모장에 받아 적었다.

우이 씨, 나 이런 거 하기 싫은데!

용문산.. 안개.. 인연... 쓰방....


하기 싫음, 안 해도 돼. 빨리 만나고 싶으면 하라고.

내년엔 만나. 서른셋 안 넘기고 결혼도 해. 결혼하면 글도 트여. 네가 원하는 인생은 그때부터야.


진작 말해주시지. 말을 좀 두괄식으로 해주면 좋으련만. 과연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지켜볼 일이다. 안 묻고, 안 태울 거지만 그래도 용문산 막걸리 한 잔에 인연 만나게 해 주쇼 하고 두 손 모아 빌고 원샷은 했다. 여차 하면 종이 태우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되게 든든했다.









가을은 정말이지 어마 무시한 계절입니다.

모두 조심하시고

마음은 유보하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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