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이상한 포인트에서 남자를 다시 만날지 말지 결정하곤 했다. 여태까지 만난 열 한명의 남자는 따로 놓고 보면 겹치는 게 하나도 없어 보였는데 모았더니 공통적인 사항이 몇 가지 있었다. n번째 남자를 n번 만나기까지 이끈 n가지 이유를 중요도 순으로 나열해보았다.
대화 ★★★★★
귀여움 ★★★★
다정함 ★★★
적극성 ★★★
비전 ★★
흔히 말하는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관심사가 비슷해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거나, 유머 코드가 비슷하거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같거나. 반대말은 '궁금하지 않은 사람', 반대 상황으로는 '지루하다'가 있을 수 있겠다. 나는 궁금한 게 많아서 자꾸 물음표를 던지게 하는 사람이 좋았다. 열정적으로 좋아해 본 게 없거나 인생의 비전 같은 게 없으면 흥미가 안 생겼다. 리더십 있는 남자를 좋아하더라고 내가.
최근 만난 열 번째 남자는 키 181에 공무원, 비흡연자에 술도 안 좋아하고 친구도 많이 없는 참한 남성이었는데 할 수만 있다면 내 머리를 내려쳐서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한 다음, 알고 보니 우린 결혼을 약속한 사이요! 그리고 이어지는 결혼식장 입장 같은 전개로 중간단계 뛰어넘고 결혼하기 딱 좋은 조건의 남자였다. 그런데 대화는 빈곤한 남자. 연락도, 만남도 미지근했는데 왜 자꾸 보자고 하는 건지. 나는 결혼이 아니라 연애를 먼저 하고 싶었으므로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간 남자는 어땠을까?
A.
팝콘 터지듯 벚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 벚꽃을 보러 가야 하니 차를 빌리겠다는 남자의 말에 극구 사양하며 손사래를 쳤더니 그가 그랬다. "아! 누가 사귀재!? 그냥 벚꽃 좀 같이 봐주라! 나 벚꽃 보고 싶어!" 결국 렌트를 해서 벚꽃을 보러 가자는 곳이 남산이었는데 남산 위에는 벚꽃이 봉오리만 맺혀있었다.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던지 머쓱해하는 그를 놀리기 바빴다. 내가 스무 살이었으면 이 오빠를 만났을 텐데 서른이라. 귀엽고 다정해서 좋았는데 그게 다여서 끝났다.
B.
엎드린 남자의 등위로 몸을 포개 눌렀더니 앓는 소리로 “으아 햄버거…” 하던 순간 그 남자가 귀여워 보였다. 물론 그가 순진하다고는 안 했음. 매사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도 좋았는데 콘돔을 끼면 안 선다고 했다. 왜 다른 면에서는 그토록 자신만만하고, 콘돔 앞에서 작아지는지 의문. 근데 그걸 또 당당하게 피력해서 뒷목 잡게 했다. 왜 피임의 책임과 걱정이 여자만의 몫이어야 할까? 그와는 한순간 관계가 끝났는데 그에게 쏟는 시간이 아까워졌기 때문이었다.
C.
만난 지 3시간 만에 내가 마음에 든다던 그는 대뜸 자기 팔뚝을 만져보라고 했다. 한사코 거부했는데도 한 번만 만져보라기에 콕 찔러보았는데 그냥 그랬음. 좀 주물러 볼 걸 그랬나? 그는 뿌듯하게 웃으며 "어필할 게 이거밖에 없어서"라고 했다. 어이없게 웃겼지만 플러스는 아니었음. 그보다는 처음 보는 차를 시키고 먼저 맛보라고 밀어주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음식은 그럴 수 있는데, 음료까지는 몸에 베여있는 센스 같아서. 적극성, 개그감, 자기 확신이 MAX였던 그는 자꾸 내가 자기를 재는 거 같다고 했다. 겨우 두 번 만났는데 재고 따질 게 있나요? 그는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졌다. 일찍 알아서 다행이었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과 열한 명 만나본 내가 깨달을 수 있는 두 가지 사실.
첫 번째. 내가 남자 보는 눈이 개똥이다.
두 번째. 괜찮은 남자는 눈 좋은 언니들이 다 선점했다.
아, 연애를 너무 오래 쉬어서 감도 안 잡힌다. 요즘 같은 세상에, 요즘 남자를 만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오랜만에 남자 사람들과의 데이트라 혀가 얼얼할 만큼 달고, 시고, 짠맛을 찾았으나 그게 내가 좋아하는 맛은 아니었다. 자극적인 건 몸에 해롭지 않은가. 건강한 몸, 건강한 정신! 이제는 건강을 챙겨야 할 나이가 됐다.
나는 감을 믿는 편이라 첫인상이나 느낌으로 사람 판단하기를 잘한다. 그리고 그 점을 가장 경계하기도 하는데 만나면 만날수록 진국이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 첫 느낌을 보란 듯이 전복시키는 사람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한두 번 만남으로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람을 만나도 뭉근하게 오래 보고 싶다. 요즘은 더 그렇다. 사골 같은 아니면 평양냉면, 그것도 아니면 소금 빵 같은 사람 어디 없나. 첫맛은 밍숭 해도 자꾸 먹으면 감칠맛 나는 사람, 어디 없습니까?
n가지 이유를 대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 없습니까?
없다고요? 네. 제가 아직 못 만난 걸로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