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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영 Dec 25. 2020

크리스마스의 악몽


이브에 언니가 해준 음식을 먹으면서

언니 같은 남자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리도 잘하고 뒷정리도 잘하는 사람 없나?

지금 되게 좋고 즐거운데 남자친구도 있으면 더 좋겠는걸. 귤 까먹으며 한 생각이 툭 튀어나왔다.


“남자친구만 있으면 딱 좋겠는데. 오빵오빵! 오빠 집 가용! 근데 도대체 어디서 만나나.”

설거지를 하던 언니가 대꾸했다.

“알았으면 이러고 있겠니?”


나는 머리를 쓸어내리며 식탁에 엎어졌다.

“남사친은 많은데 왜 남친은 없는 건지 언니는 알아?”

“몰라.”

“난 알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왜 안 생기는지.

친구에게 건물주라는 말만 듣고 아무 정보 없이 만난 남자는 뭐 먹고 싶냐며 근처에 맛집을 하나씩 읊는 내게 말했다.


“날 것은 싫고 곱창은 못 먹어요”

“엇 그럼 닭발, 족발은요?”

“동물의 발까지 꼭 먹어야 되나요 (머쓱)”

“그럼 주로 밖에서 뭐 드세요?”

“돈가스에... 제육볶음?”


그때 일이 바빠서 서촌으로 와달라고 부탁했었는데 그가 서촌에 처음 와 본다기에 좋아하는 영화감독의 서촌 에세이집을 사서 들고 갔었다. 나도 못 읽어본 건데. 책 좋아하냐는 물음에 일 년에 한 권 읽을까 말까라고 했지만 그래도 줬다. 뭐라도 쥐여보내고 싶었다. 퇴근 후엔 주로 누워있다는 그는 결정적으로 취미가 없었다. 건물주지만 밥은 내가 샀다. 그가 화장실 갔을 때 몰래 계산했다. 얻어먹었으니 맛있는 밥 사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다음번에도 눈 딱 감고 만났으면 되는데 그걸 못해서 아직 이러고 있는 걸까.



또 다른 소개팅은 1초 지현우에 키 크고 어깨가 아주 넓다는 남자였다. 무려 1초 지현우에 키도 큰데 어깨도 넓대! 한껏 기대에 부풀어 본 사진 속 남자는 지현우는 모르겠고 키는 커 보였다. 그와는 성수동에서 만났는데 스타일도 깔끔하고 실로 몸도 좋아 보였더랬다.



“쉴 때는 주로 뭐하세요?”

내가 물었다.

“영화…… 보는 거 좋아해요.”

“오! 저도 영화 보는 거 좋아하는데.”

“그... 집에서 보는 거 말고 있죠. 심야에 비 오는 날이면 더 좋은데 슬리퍼 딱 신고 차 타고 집 근처 CGV에 가서 혼자 보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 적막감. 고요함.”



그는 걸어서 5분 거리지만 꼭 차를 타야 한다고 덧붙였다.


“근데 왜 꼭 비 오는 날이에요?”

“오늘 같이 흐린 날 좋아해서요. 천둥번개 치고, 폭우 쏟아지고 그런 날 밖에 나가서 비도 맞고 그러거든요. 아 맞다. 태풍! 태풍 오는 날은 너무 좋고요!”



우리가 만난 날은 건물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강하고 흐린 날이었는데 밖을 보는 그의 눈에서 빛이 났다.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또라이인데... 그날도 밥은 내가 샀다. 그냥 꼭 사고 싶었다.


그다음부터는 친구들도 오기가 생기는지 어딜 가서 착해 보이는 남자면 소개, 좀 멀쩡하다 싶으면 소개를 시켜줬다.

착해 보이는 남자는 정말 착하기만 해서 사는 얘기만 들어주다 온 적도 있고, 멀쩡하다 싶은 남자는 나보다도 더 귀여워서 보호해줘야 할 것만 같았다. 나보다 귀여우면 안 돼!



혹시 내가 싫어서 다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그러면 내가 불쌍해지니까 그건 아닌 걸로 하겠다. 한 번의 만남으로 섣불리 판단하는 건가 싶어 두어 번 만나보기도 해 봤지만 아닌 사람은 아니었다. 어떤 해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없는 게 만성이 된 거라고 했지만 이대로라면 내년 크리스마스도 꼼짝없이 언니와 친구들과 보내게 생겼다. 나는 사실 지금도 좋고 즐겁다. 즐거운데 이러다 다들 가고 나만 남으면 어쩌지 싶은 거지.



설거지하는 언니를 두고 귤을 까먹다가 말했다.

“난 이렇게 언니처럼 다 해주고 치워주는 남자 만날래. 가정적인 남자.”

“아무것도 안 하시겠다?”

“정확해.”

“가정적인 남자가 아니라 가사를 잘하는 남자여야겠네.”

“아 그런가? 바꿀게. 가사 잘하는 남자 만날래.”

“할 수 있음 해보든가.”



못한다. 괜찮은 남자는 유부남이거나 곧 유부남이 될 거거나 게이다.

후식을 챙겨 TV 앞에 앉았다. 요새 넷플릭스에서 핫하다는 오리지널 시리즈를 봤다. 사람들이 욕망으로 인해 괴물로 변하는 이야기였다. 내가 괴물로 변한다면 없는 짝도 만들어 내는 괴물이려나. TV 속 사람들은 저들끼리 죽이고, 살리고, 연대하고, 싸우느라 바빴다. 나도 ‘코로나 시대와 딱 맞는 콘텐츠 구만’하며 방바닥을 기어 다니기 바빴다. 피가 난무하는 영상에 언니는 보다 말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런 걸 본다니’했지만 같이 세 시간을 연달아 봤다. 이브가 지나고 크리스마스였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피칠갑된 사람들이 잔상으로 남았다.

악몽을 꿀까 싶어서 최애 배우인 양세종 사진을 몇 장 보고 잤는데 꿈에 나왔고 그와 소개팅을 했는데 내가 차였다. 뭘 잘 못했는지 말은 해주고 가던지! 이게 악몽이랑 뭐가 다른 말인가. 이어 꾸려고 다시 잤다.

이번엔 3:3 미팅이었다. 미팅에서 누가 내가 좋다고 번호를 따갔는데 잠깐 내 친구랑 얘기하더니 내 친구가 더 재밌어서 좋다고 하는 게 아닌가. 재밌어서! 재미 찾다가 골로 간다. 걔는 소주를 세병씩 마신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친구도 좋아 보였다.

 “그래 너네 다 해! 난 괜찮아!”

그러다 깼는데 아 시* 꿈.

이 글은 크리스마스에 꾼 악몽으로 시작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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