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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 Jun 09. 2023

사랑으로 그린 아름답지 않은 풍경들2.

영화 <케빈에 대하여> & <아이킬드마이마더> 비평문

#. 사랑으로 그린 아름답지 않은 풍경들2. 

가족, 우연의 만남과 필연적 사랑 사이        


홍자




   

 사랑하기 위해선 대상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사랑의 대상을 찾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자 가장 어려운 고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이 가족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족’이란 말은 혼재한 마음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로 다 지워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묶이게 되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리고,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확실한 이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감정은 수동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체험되는 것이기에 사랑을 느꼈다면 그건 사랑하기로 택한 결과이다. 늘 그런대로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마음이 아니다. 따라서 사랑의 방향이 정해져 있는 상황 속에서 이들은 서로 사랑하는 데 성공하거나 사랑을 노력하거나 혹은 사랑을 꾸며내며 살아간다. 우연의 산물로서 만들어졌으나 필연적으로 사랑해야 할 처지에 놓인 사람들.  나는 이들에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말과 ‘가족’이라는 단어를 걷어내고 그 안의 놓인 마음들을 들여다보려 한다.           




사랑에 실패한 이들, <케빈에 대하여>      


- 아들을 사랑하는 데 실패한 엄마, 에바     



  자식을 향한 엄마의 사랑, 모성애. 이것은 조건 없고 신성하며 깨지지 않을,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건드려서는 안 될 일종의 불문율처럼 생각되는 사랑이다. 에바는 그러지 못했다. 케빈이 생긴 이후 모험가로서의 자신의 삶과 새로운 곳을 여행하며 느끼던 즐거움, 주거 공간에 대한 취향까지, 스스로 행복감을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케빈은 에바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기적이었다. 엄마로서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정신적 고통과 사랑 없이 수반되는 육체적 노동 속에서 에바는 케빈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 대화할 수 있는 상대의 부재, 즐거움과 취미의 박탈, 마음 둘 곳이 없는 장소,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남편, 이 모든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에바는 케빈에게 엄마의 의무와 책임을 다했다. 하지만 결국 케빈을 사랑하는 것엔 실패했다. 그리고 아이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해서 그 원인을 케빈에게서 찾으려 했다. 너무 시끄러워서, 혹은 너무 조용해서, 아니면 또 다른 이유를 들어서 케빈을 ‘이상하다’고 생각해버렸고, 그렇게 자란 케빈은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사람들을 죽인다. 그리고 에바는 케빈이 다치게 만든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가 사는 곳에서 모욕과 폭력, 비난을 감수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다른 여느 부모와 달리 아들을 사랑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엔 그러한 아들을 키워낸 자신이 지어야 할 또 다른 책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이, 케빈    

 


  사람의 감정은 눈빛과 사소한 행동으로 드러난다. 미처 다듬어내지 못한 마음의 날것은 그렇게 의도치 않게 분출되고, 생각보다 타인의 행동에 예민한 아이들은 그런 것들을 쉽게 눈치챈다. 케빈은 동생을 임신한 엄마를 아빠보다 먼저 눈치채고 배우지 않은 숫자들을 셀 정도로 예민하고 영리한 아이였다. 아직 말을 미처 배우지 못했을 때 에바는 케빈의 눈을 똑바로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난 네가 태어나기 전이 더 행복했어. 너도 알지? 난 매일 아침 일어나면 소원을 빌어, 여기가 프랑스면 좋겠다고” 아마 케빈은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사람들은 끊임없는 피드백을 통해 배운다. 그리고 케빈이 했던 모든 행동과 그에 대한 에바의 반응, 무수히 많았던 그 피드백들 사이 사랑의 반응으로 돌아온 결과는 없었다. 단지 극적이고 자신에게 좀 더 관심을 주는 반응들. 혹은 밉살맞은 장난에 뒤따르는 폭력적인 대응들만 존재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빈은 엄마인 에바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다. 케빈은 에바의 부정을 바라면서 “익숙한 거랑 좋아하는 거랑 달라. 엄만 나한테 익숙한 거잖아”라고 말했으나 에바는 정곡을 찔린 듯한 표정을 보인 채 그 말에 부정하지 못했다. 아마 케빈은 이때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엄마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며 단지 가족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라고. 

 에바와 케빈이 너무 닮아서였을까? 무언갈 가지런히 늘어놓는 습관뿐만 아니라 서로의 모난 부분까지 닮아서, 마주치면 저항없이 부딪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들이 함께하는 대부분의 시간은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해보였다. 평화로웠던 유일한 풍경은 아픈 케빈에게 에바가 동화책을 읽어주었을 때 뿐. 이후 케빈은 그 동화책의 주인공처럼 화살 쏘는 게 취미가 되었다. 그러나 그 화살은 결국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다니던 고등학교의 학생들을 향했다. 사랑받지 못한 채 부유하던 마음과 자신을 은연중에 거부하던 에바에게서 받은 상처, 그것들을 에바를 제외한 모든 것을 향해 쏟아내면서 결국 케빈은 불확실한 희망을 거부하고 더 확실하고 완벽한 절망을 택하고만 것이다.


  서로 사랑을 노력하지만, 결국엔 최악의 결말을 맞이한 이들. 가족이 아니었다면 사랑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절망과 불안을 아들의 책임으로 돌린 채 끝도 없는 희생과 노동을 수행할 필요도, 무조건적인 사랑과 애정을 받지 못한 채 그러한 사랑을 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갈구할 필요도 없이, 서로를 좀 더 빨리 포기할 수 있었을 텐데. ‘혹시 우리도 평범한 가족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찰나의 희망이 매번 좌절되고 그때마다 조금씩 더 최악으로 치달아 결국 아무도 구제해주지 못할 곳까지 나아가기 이전에, 지금보다 덜 최악의 상황에서 막을 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에바는 이제 곧 성인이 될 케빈을 두고 나오면서, 그리고 케빈은 에바에 대한 증오와 울분을 무용한 감정으로 덮어놓으면서 이들이 가족이 되고자 했던 시간은 끝이 난다.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려 하지 않는 이들, <아이킬드마이마더>     


- 아들의 말을 듣지 않는 엄마, 산탈레밍    


  

  엄마인 산탈레밍은 아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아들의 질문엔 건성으로 대답하고, 그 대답을 쉽게 잊어버리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아들인 후베에게 대화를 하자고 말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들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어느 순간 평화롭고 시시한 대화를 하지 못하게 된 제 아들을 바라볼 때 산탈레밍의 마음속엔 마치 아들에게 돈과 음식을 가져다 바치는 하인 취급을 받고 있다는 불쾌감과 이혼으로 인해 한 가정을 책임지느라 아들을 방치했던 데에서 오는 미안함, 그리고 주위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자신에게 가시 돋친 말만 하는 아들에 대한 서운함과 화남이 한데 뒤엉켜 있다. 늘 평행선을 달리는 일방통행의 대화는 상대의 약점과 기분 나빠하는 말들로 구성된 싸움이 돼버리고, 그 승자는 대부분 ‘돈’이라는 최고의 카드를 쥔 산탈레밍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상처받는 것 또한 산탈레밍 자신이다. 그러나 후베가 학교에 자신의 엄마가 없다는 거짓말을 했을 때도, 집을 나가 2개월 동안 돌아오지 않았을 때도,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녹화 테이프를 봤을 때도, 서로 비밀 없이 지내던 후베의 아주 큰 비밀을 다른 사람 입에서 들었을 때도, 산탈레밍은 여전히 후베를 사랑하기에 후베가 도망친 ‘후베의 왕국’으로 찾아간다. 




- 엄마의 아들이 되고 싶지 않은 아들, 후베르트      

    

  

  후베는 어렸을 때, 아직 부모님이 이혼하기 전에 행복했다. 어렸을 때 산탈레밍과 후베는 모든 비밀을 공유하고, 서로 오로지 사랑만 하고,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후베는 말한다. “난 더 이상 엄마의 아들이기 싫다. 다른 누군가의 아들일 수 있지만, 엄마의 아들이긴 싫다.”라고. 대화의 시작과 끝을 모두 정해버리는 산탈레밍과 그 타이밍에 어긋나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만 쌓다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한 채 의미 없는 분노만 쏘아붙이기를 수십 번, 내면의 밀도 있게 쌓아 올린 엄마에 대한 증오는 산탈레밍이 보지 않는 곳에서만 분출된다. 전달돼야 하는 핵심적인 말들은 그렇게 후베르트 안에서 부유하고 있다. 그는 이 감정을 꺼내놓는 대신 엄마의 모든 행동을 미워한다. 음식 먹을 때 입에 묻히고 먹는 것, 매번 깜빡하곤 시치미 떼는 것, 엄마의 옷 취향, 머리 스타일, 그 성격 모두를. 그렇게 그는 자신 안에 쌓인 마음을 제대로 꺼내놓는 대신 엄마를 혐오하길 택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엄마와 사이가 좋은 안토닌을 보며 부러워하는 한편 본인들은 그렇게 될 수 없음에 절망하고 그 까닭은 모두 ‘최악’인 엄마에게 있다며 비난한다. 마치 엄마만 자신에게 맞는 사람이 된다면 자신도 다른 이들처럼 행복한 관계가 될 것처럼. 그러면서도 후베는 엄마의 사랑을 사랑하고, 또 그것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엄마가 본인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는 싸움으로 변질된 엄마와의 대화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 사용한다. 그리고선 엄마에게 상처 혹은 벌을 주기 위해 상대에게서 본인을 빼앗는다. 즉, 후베는 최후의 수단으로 ‘스스로의 사라짐을 연출’하거나 ‘가정’한다. 이 방식으로 ‘자신의 왕국’에 엄마를 초대한다.  


 사랑의 방향은 확고한데 사랑하는 방식을 배우려 하지 않는 이들. 그래서 이들의 대화는 도돌이표처럼 반복된다. 풀어놓지 않은 감정들은 늘 그렇게 서로의 마음에 쌓여만 가고 대화를 시작할 때엔 정말 꺼내야 할 감정 대신, 서로에게만은 아주 확고하고 쉽게 저버리기 힘든 선을 그어놓고선 그 선을 살짝이라도 건들 때마다 화를 내곤 한다. 보란 듯이, 아주 그러길 바랐다는 듯이. 예상했다는 듯이. 당신이 그래서 우리 사이가 이렇다는 듯이. 이러한 불통은 결국 상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그렇게 있을 거라는 확신에서 비롯된다. 후베가 정말로 산탈레밍에게 대화를 하자며 ‘자신의 왕국’으로 오라고 했을 땐 후베에게서 엄마가 도망가는 꿈을 꾸었을 때이고, 산탈레밍이 후베에게 가장 사랑 담긴 말을 했을 땐 후베가 ‘자신이 오늘 죽으면 어떡할 거냐’는 질문을 했을 때이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상대의 존재와 사랑에 익숙해져서 서로의 부재를 짐작하지 못한 채 살아가다가 서로의 존재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조금의 단서가 생기자마자 서로를 이렇게 간절히 붙잡는다.

 후베는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 게 모순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후베의 어린 시절 방치와 그로 인한 상처는 아버지가 되기 무서워서 본인을 떠난 존재에게서 비롯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죄책감과 비난은 자신을 사랑하고 끝까지 책임지길 택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모순이다. 아들이라는 자신의 존재가 무거워 버리고 떠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 사람의 책임 이상을 감수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받아야 할 것 이상의 모진 말들과 비난을 쏟아내고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모순이다. 어릴 적의 상처와 기억들에 갇힌 채 현실의 노력을 하지 않고, 주위에 사이좋은 관계를 볼 때마다 우린 왜 저렇게 될 수 없었는지, 나는 엄마를 사랑할 수 있지만 우리 엄마를 저렇게 사랑할 수 없다는 하찮은 이야기들만 늘어놓고선, 엄마가 삶을 살아오면서 취해야 했을 삶의 방식들과 취향들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듯 하찮게 취급하고, 마치 혼자 큰 것처럼 행동하면서, 엄마가 주는 조건 없는 단단한 사랑을 갈구하기에, 그러기에 결국 부른 ‘나의 왕국’이 엄마와 함께한 행복한 추억과 그 사랑으로 만들어진 곳인 것, 그게 바로 모순이다. 








가족과 사랑에 대한 두 가족의 이야기      


  세계와 합일되지 못하고 분리된 상태의 인지는 모든 불안의 원천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큰 욕구는 이러한 고독의 상태를 극복하려는 욕구이며 이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시도로서 ‘가족’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우리가 가족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그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사랑인지 불안해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서로의 손을 쉽게 놓지 못하는 것은 ‘가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이들을 가족으로 접합시키는 매개는 사랑이다. 그 사랑이 ‘성애’이든, ‘형제애’이든, ‘자기애’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사랑해서 필요한 것이든, 혹은 필요해서 사랑하는 것이든 그것 역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가족과 사랑은 명백히 분리되는 두 개의 단어라기 보단 단어 사이 어딘가 접점이 존재해서 아무리 철저하게 떼어내려 시도해도 잔재물이 남기에, 그래서 아무리 어긋나 보이는 가족이라도 함께한 시간 속에 사랑이 조금도 없었다고, 이들이 가진 모든 감정 중엔 사랑이 부재했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에바와 케빈, 산탈레밍과 후베르트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상처와 말다툼으로 얼룩져 있다고 해서 그 안에 사랑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앞서서 에바가 케빈을 사랑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한 것은 ‘보통’의 가족을 기준으로 이야기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비극 역시 이 ‘보통’이라는 공허한 기준에서 시작된다. 상대와 자신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보통’의 엄마 혹은 ‘보통’의 아들이라는 기준에 서로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거기서 오는 불일치와 불만족으로 인해 본인의 손으로 상대와의 관계를 망가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다’라는 말로 뭉뚱그려 대충 화목하고 평범한 가족의 이미지에 자신의 가족을 끼워 맞추는 대신, 다양하고 날 선 감정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가족이 된 이상 필연적으로 사랑해야만 한다면, 그리고 서로의 손을 쉽게 놓을 수 없다면 상대를 똑바로 마주하고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1) 에리히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1976),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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