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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영 May 30. 2021

아이보다 하루만 더

"장애아이보다 먼저 죽어도 괜찮게.."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게 해 주세요.. “

슬프다 눈물이 흐른다.

내가 떠나고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장애 아이의 걱정과

아이가 떠나고 다음날까지 나는 철저하게 ”엄마“로만 존재해야 할 것만 같은 의미의 문장이다.


과연, 장애 아이보다 하루 더 엄마가 산다면, 아이와 나는 행복할까?     


아이의 장애를 알고 난 뒤, 대부분의 부모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과정을 거친다.

나 역시 ”아닐 거야 “ 했다가, ”나한테 이러냐고! 무슨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나의 신께 따져 묻는 기도를 드렸다. 그저 ”늦되거니, 내성적이라 사회성이 부족할 뿐이야 “라는 말로 부정도 했고, ”아빠 닮아서 많이 욱할 뿐인걸 “하면서 아이의 ”폭력성“을 못 본 척 자기 합리화도 시켰다. 또한, ”애착관계가 잘 안돼서 그럴 뿐이야 “하면서 ”부적응“상태를 아이 키우기 힘들게 만들었던 남편과 시댁을 줄기차게 원망하면서 원인을 찾아 헤맸다.               



아이는 실제 또래보다 순수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것을 넘어서 현실을 감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즈음 빠져 있던 것은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이였는데, 아이는 야생의 환경에서 집을 짓듯 집안의 의자를 모아 이불을 걸쳐 집을 지었고, 하굣길에 쥐를 잡으러 여기저기 뛰어다녀, 정말 ”쥐 꼴“을 하고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우리 아이 정글에서 살면 참 행복할 텐데.. “라고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고개 저으면서 농촌에 연고도 없던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벌레라는 것을 떠올렸고 이내 ”나의 엄마 됨됨이“에 다시 한번 죄책감을 느꼈다.     


하루는 학교 앞 문구점에 아이 동생의 준비물을 사러 갔다가, 문구점 앞 대문짝 만하게 붙은 아이 사진을 보고 놀라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 그 사진은 cctv에 찍힌 아이 모습으로, 얼마 전에 사 입힌 카디건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거기서 아이는 ”새콤달콤 “사탕을 집어 드는 모습이었는데, 사진 밑에는 ”물건을 훔쳐간 아이를 찾습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순간 ”어서 집에 가서 그 카디건을 불살라 버릴까? “도 생각했었다. 아이의 문제행동이 깊어지자 주위에서는 이해보다 비난이 쏟아졌고, 위로보다 따돌림이 심해졌다.

그때 감정은 ”어디서 잘못된 걸까? “라는 원인을 찾지도, 소용도 없는 질문에 휩싸여 있었고, ”내가 열등한 존재라서 아이도 열등한 존재가 되었을까... “하는 열등감이 바닥을 치고도 뚫는 대책 없는 감정에 사묻혀 있었다.     


사회적 열등감에 갇힌 나는, 아이를 ”게임중독“을 만들어서라도 밖에 내보내지 않겠다는 다짐도 해 보았고, 아이를 장차 ”사회범죄자“로 만들 바에야 ”그냥 같이 사라질까? “ 하는 위험한 생각도 해 보았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하여, 아이는 이미 모든 ”사고“라고 하는 우리가 충분히 예상할 만한 ”사춘기 비행청소년 수준“의 사고는 모조리 쳤다.

”학교 땡땡이“ ”수업 중 돌연 사라지기 “ ”친구에게 주먹질하여 코피 내기“ ”여자 학우에게 쌍욕 하기 “................     

혼란 뒤에 ”인정“이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정은 처참했으나, 빠를수록 좋았다. 부정과 분노... 열등감으로 가득 차 우울의 나날을 지나던 중 나는 아이의 모습을 ”내려놓듯 “ 인정했다. 일반 아이들과 비교하여 그간 문제로 보였던 모든 행동 뒤에는 아이의 장애를 인정하지 않고 그저 ”이상하다 “고 내 몰기만 했던, 엄마와 학교와 주위 친구들이 있었음을 그때야 알게 되었다.     


장애 부모의 대부분은 그 인정이라는 것이 평생 되기 어렵기도 하다. 그런 예로 ”자폐성“으로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에게 ”공부라도 잘하면 무시를 덜 받겠지 “하면서 공부에 집착하는 가 하면, 지적 능력이 부족한 아이에게 ”2배, 3배로 노력하면 정상 아이처럼 된다 “는 얼토당토 안 한 잣대로 아이를 내몬다. 실제 아이는 사회성도 부족해 또래 관계에서 오는 열등감에 몹시 좌절을 겪고 있는데도, 위로받을 곳 없이 가정에서 조차 몰아낸다.     



장애 인정을 하고 난 뒤 상황은 급속도로 달라졌다. 아이는 특수학급이 있는 학교로 전학하였고, 복지카드를 발급받았다. 그리고 더 이상 학교에서 뛰쳐나오지 않았으며, 열등감으로 내 몰린 허기진 마음을 달래려, 물건을 훔치지도 않았다.     


더욱이 발전을 한 것은 ”나 “였다. 열등감을 내려놓게 되자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아이가 학교 적응을 시작한 이후로는 그간 ”5분 대기조“라 불릴 만큼 아이에게 24시간 얽매였던 나에게도 ”시간“이라는 여유가 돌아왔다.

그때부터 나는 ”특수 교육학“을 공부하고, ”사회복지학“ 과정을 밟아 나갔다. 또한 ”특수교육 보조교사”로 다시 사회에 첫발도 디뎠다.


이 모든 것이 아이와 ”분리“ 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아이는 더 이상 나의 ”일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고, 그 아이의 일곱 가지 무지개 색을 보고 난 뒤, 나와 아이는 독립된 삶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나의 목표는 ”초등학교 졸업“에서 ”고등학교 졸업“으로 바뀌어 갔으며, 이제는 ”20살 이후에 자립“으로 넓혀져 갔다. 실제 아이는 스스로 등교를 하고, 밥을 차려 먹을 수 있을 만큼 발전해 나갔다.     


아이보다 먼저 죽어도 괜찮은 삶을 만들어 보겠다 “는 나의 목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 모든 과정 속에 나와 아이의 행복은, ”공생“이 아닌 ”서로의 독립된 삶“으로 시작되고, 이어져 나갈 것이다.     









p.s. 수용하고 인정하였다 한들, 나는 아직 지적장애 아이를 잘 키우는 법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큰 아이 장애를 19년 지켜보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나름 육아에 노력하고 살아온 내 모습을 지켜본 친구들이 ”학교 부적응“문제, ”학교에서 사고 친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냐 “고 나에게 물어오는데, 답변은커녕 위로조차 제대로 못할 때가 많다.

나도 아직 이번 생에 장애아이 엄마는 처음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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