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바로 '소설 쓰기'이다. 라쿤데력 22585년에 '헤스르보'는 권태로움에 지쳐있다가 '재미있는 게 뭐가 있을까?'하고 고민했다. 그런데 실제로 이 고민은 한없이 지혜로운 자인 '커트 보니갓'이 영면에 들고 난 후의 일이었다. 절대적 진리라고 여겨지던 것들이 수많은 상대적 진리로 흩어져 버린 과정 속에서 탄생한 것이었다. 절대적 진리가 사라지고 나서 그들은 서로 모순되는 상대적 진리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렸다. 커트 보니갓의 생전에도 이야기 같은 것이 있긴 했지만 단지 그의 위대한 행적을 기록한 전기(傳記) 형식의 이야기뿐이었다. 그런 단순함은 그의 사후, 좌충우돌의 모험, 다양한 삶, 역사 속에서의 그들의 모습, 내면에 흐르고 있는 감정, 비합리적 행위와 그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 그리고 존재, 종교, 시간 등이 참신함을 넘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때 헤스르보가 방향을 제시했다. 소재는 앞으로도 무궁무진할 것이니 구애를 받지 말고 그냥 읽고 끄적여 보라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설은 미리 닦아놓은 길이 아니라 처음 가보는 길이기 때문이다. 실존하는 것을 아는 것과 직접 해보는 것은 큰 차이인데 헤스르보가 그 방향을 제시하고 실제로 실행했다. 유일한 쾌락이 잠을 자고 꿈을 꾸는 트랄팔마도인에게 소설은 꿈을 한없이 꾸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꿈은 꾸고 싶다고 꾸어지는 것도 아니고 꿈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 기억할 수 있다. 어떤 꿈은 허망한 환영으로 가득 차기도 하고 때론 변덕스럽고 뒤엉키는 것들의 집합이다. 처음에는 <우주청 풍기문란 소위 분과>에서 소설의 확산에 거세게 반대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거짓말쟁이를 양산하는 일이라 풍기문란을 해친다는 이유에서다. 마치 '마담 보바리'를 비난하며 그 책을 금지해야 한다고 했던 거랑 비슷하다. 이전에는 만나본 적이 없는 그런 종류의 여성을 처음 경험했을 때의 충격과 같다. 그런 의미로 소설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소설들은 희망보다 절망을, 교훈보다는 혼란을 낳아 맥을 빠지게 하는 것이라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어떤 소설가는 '소설은 무용(無用)하기 때문에 유용(有用)하다. 모든 유용한 것은 그 유용성 때문에 트랄팔마도인을 억압하지만 소설은 무용하므로 트랄팔마도인을 억압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무슨 말이냐하면 빵이 없으면 배고프다고 우리를 억압하고, 물이 없으면 목마르다고 우리를 억압하지만 소설은 무용하기 때문에 우리를 억압하지 않고, 억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런 거센 논란 끝에 <우주청 풍기문란 소위 분과>는 씁쓰레하면서 수동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러다가 헤스르보는 소설이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독자가 있을 때 가능한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글을 쓰는 행위를 완성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재미 삼아 무언가를 쓰고 누군가는 재미 삼아 읽어보는 체계가 마련되었다. 그 후 소설을 강력 지지하는 일단의 그룹(네르반테스, 필로베르, 팔자크, 피루스트, 토스트옙시키등) 이 생겨났다. 그들은 소설을 소설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소설의 보편 법칙은 없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미학적 법칙도 만들었다. 그리고는 미학적 법칙을 다시 해체하는 과정도 거쳤다. 그런 과정 속에서 소설을 통해 생생하고 연속적인 허구의 꿈이 가능한 것을 알게 되었음은 물론 소설 쓰기를 처음에는 현실로부터의 도피라고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소설 쓰기는 현실 속으로 필사적으로 곤두박질치는 일임을 깨달았다.
당시 소설은 천대받았던 장르지만 지금은 전 우주의 유행이 되었고, 6년마다 <온 우주 거짓말짓기대회>가 열린다. 이제는 우주인의 축제가 되었다. 축제의 현장에서는 '소설 쓰고 자빠졌네!'가 인사말이다. 또한, 트렌드에 뒤처진 상황을 빗대어 깔보는 표현으로 '소설도 못쓰는 주제에!'라는 말도 있다. 어떤 것도 소설보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다. 소설이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하게 된 이유는, 소설 그 자체나 소설의 형식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글을 쓰고 싶은 강렬한 소망이 그들에게 있었고, 글을 완성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간절함은 과수원에서 포도나무의 싹이 틔우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도 강렬했다. 뭔가를 그토록 갈망한 적이 없던 그들에게 신기루였다.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이가 죽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았을 때, 삶의 희망을 잃었을 때,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시달릴 때, 죽음의 공포를 느낄 때, 정체성에 위기가 올 때, 친구에게 버림받았을 때, 그리고 권태에 치여 죽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 지금의 나다. 글을 쓸 때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음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지고, 글을 쓰고 나서는 부활한 느낌까지 받는다. 그들은 소설이 점차 확산되면서 소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소설은 삶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어떤 소설은 그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소설은 기본적인 형식이 있지만 그들의 삶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그들의 생각은 표현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머릿속의 부스럭거리는 오만가지 생각 중 어떤 것을 가져와서 재량껏 바꿔 새로운 세상과 캐릭터를 창조한다. 그렇지만 글을 먼저 쓴 이들은 후대의 그들보다 이야기를 먼저 생각해 낸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쓴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독창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성장통을 겪고, 이념의 갈등이 있고, 욕망의 분출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있다. 뿐만 아니라 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야기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 몰래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과의 사랑이야기가 있고, 엇갈리는 사랑이야기가 있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수치스러운 이야기가 있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고난을 겪는 이야기가 있고, 아픔을 어루만지는 이야기가 있고, 천일동안 자신의 죽음을 연장하기 위해 밤마다 한편씩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고, 전당포 노파를 죽인 이야기가 있고, 큰 고기를 잡았지만 고기를 상어 떼에게 뜯기고 마는 노인의 이야기가 있고, 햇빛 때문에 살인하는 이야기가 있고, 퇴학당한 아이의 2박 3일 가출하는 이야기가 있고, 계급을 뛰어넘어 출세를 하려는 스무 살 소년이 출세의 정점에서 급전직하하는 사랑과 야망의 이야기가 있고, 구명보트에서 호랑이와 위험한 동거를 하는 이야기가 있고, 전염병을 피해 교외의 별장에 모인 10명의 이야기가 있고, 전염병으로 도시는 폐쇄되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결혼의 권태에 빠진 한 여인과 두 남자와 사랑 이야기가 있고, 달빛의 유혹에 빠져 은화의 빛으로부터 탈출하는 이야기가 있고,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하여 방 안에 갇혀버린 이야기가 있고, 삶이라는 면도칼의 날카로움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있고,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의 눈과 판단의 오만함으로 벌어지는 폭력의 이야기가 있고, 가난 때문에 사랑을 잃어버린 자가 사랑을 되찾기 위해 불법을 저질러가며 돈을 모아 그녀의 사랑을 되찾으려 했으나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있다. 이제는 이런 것들은 독창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솜씨 좋게 새롭게 만들 수 있다. 사건은 같을지 몰라도 등장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풍요롭게 만들고, 시대와 장소의 한정된 사슬을 끊고 보편적인 영속성을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소재와 형식은 다함이 없다. 그건 마치 원자가 핵과 전자로 구성이 되어 있지만 그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빈 공간이 있는 것과 같다. 온통 틈새이다. 원자와 원자 사이에도 빈틈 투성이다. 메꿀 수 있는 공간은 넓다. 풍부한 상상력과 세심한 표현력으로 채우면 된다. 다양한 형태의 별 의미 없는 어떤 순간을 가져와서 재량껏 바꿔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면 된다. 긴 우주의 역사에는 소수(少數)가 다수(多數)가 되는 혁명의 순간이 비일비재한데 소설이 딱 그렇다.
소설은 꿈에 빠져있던 트라팔마도인에게는 새로운 판타지인 것이다. 이 판타지에는 진실이 내포되어 있음을 나중에 알아챘다. 소설이 허구의 영역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진실이 발현되는 형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소설이 보편성에 기댄 사실을 말하거나 옳다고 여기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는 진실을 말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등장인물들의 행위나 사유, 시간의 흐름 속에 변하는 인물의 심리를 통해 진실을 드러낸다. 둘째는 설령 거짓을 말할지라도 빈틈없는 논리와 어조의 일관성으로 거짓으로 느껴지지 않는 경우이다.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실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는, 느낌을 독자가 가지도록 쓰고 수정하고 또 쓴다. 그러면서 새로운 부가적인 사실을 작가는 알게 된다. 일종의 음악, 리듬감이 글 속에 배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글에 꼭 맞는 단어의 선택부터 형용사와 명사의 이상적인 결합, 문단의 적절한 모양에서 드러난다. 글 속의 음악성은 이성적으로 판단이 되지 않는 직관이다. 셋째는 트랄팔마도인의 존재와 트랄팔마도인의 본질의 의미를 구체적인 모습에서 재발견하고 긍정하는 것으로, 이는 고차원적인 진실이다. 이는 존재와 본질의 선후관계에 대한 의문이고, 객관과 주관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의 시작이 되었다. 처음에는 객관적 사실이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생각했으나 차츰 그 당사자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가에 따라서 객관적 사실은 달리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절대적 진리보다는 상대적인 진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넷째는 소설에서 말하는 내용들의 합은 소설가가 생각한 의도와는 다르게 확대된다는 것이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경우도 많다. 작가의 의도를 초월하는 것이 왜곡이 아니라면 이는 기분 좋은 배신이다. 지금까지의 긴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전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세상의 진실을 묘사함으로써 허구가 실체와 진실성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만든 이야기가, 작가 스스로가 경험한 일이든,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이든,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 들은 이야기든, 다른 이들이 쓴 글을 참조한 것이든, 아니면 역사적 사실을 글감으로 재창조한 이야기이든, 소설은, 자신의 내면을 만나는 공간이자 낯선 이들을 간접적으로 만나는 희귀한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결론을 가급적 내리지 않음으로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대상이 만들지도 모르는 새로운 가능성에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소설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가 되게 만든다.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현재의 나는 미래의 독자를 상상하며 자신의 글이 영원한 생명력을 가질 것을 기대하며 이야기를 짓는다. 그러므로 소설은 한층 풍요로워지고 핍진성을 획득한다.
이런 소설의 역할은 확대되었다. 트랄팔마도인들은 경험을 극단으로 몰아가 여러 가지 논쟁을 일으켰다. 극단의 경험을 수용할 수 있는지 아니면 수용할 수 없는지, 수용하든 수용하지 못하든 논쟁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는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내적인 변화는 무엇인지에 스스로 의문을 던졌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 마음속에 소설을 향한 타오르는 불길이 있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 불길은 운동으로 이어졌다. '보지 말고 읽어라', 우리를 바보 무지렁이로 기필코 만드는 바보상자를 그만보고, 글을 읽으라는 운동이다. 지구의 바보상자에서 유행하는 프로는 먹방, 짝짓기, 서바이벌 프로이다. 남들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남들이 짝짓기 하는 것을 지켜본다. 이것은 스스로 해소해야 할 욕망이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경쟁에 미쳐 돌아가는데 오락프로조차도 죄다 경쟁을 시킨다. 편안히 쉴 때 조차도 인간에게 경쟁심과 긴장감과 경각심을 일으킨다. 여기까지는 봐줄 만하다. 그렇지만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조차도 자막을 달아주고, 리액션을 안 하면 큰 일이나 일어난 듯하고, 세심하게도 그때그때의 감정을 자막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가르쳐준다. 이럴 때는 '으쓱으쓱'한 느낌이고, 저럴 때는 '머쓱머쓱'하기도 하고 '쭈뼛쭈뼛'한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듯 한다.
'보지 말고 읽어라'는 운동 이후 독자라는 집단이 서점에서 최초로 생겼다. 어쨌든 소설로 인해 기분이 좋아 춤을 추기도 한다. 템포의 변화는 그들의 정서적 분위기의 변화를 보여준다. 다만 음악을 동반하지 않아서 엄숙하게 느껴진다. 간혹 팔꿈치를 쿡쿡 찌르기도 한다. 기분 좋다는 표현이다. 기쁨은 열광으로, 황홀감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소설이 주는 위안을 박탈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가혹한 벌이다. 글을 못쓰게 하는 것은 바람에 몸을 맡겨 하늘을 날던 새가 지상의 새장에 갇힌 상황이랑 같다. 새장의 새는 깃털 사이로 들어간 바람의 푹신푹신함도, 아이를 홀리는 요람처럼 바람의 등에 두둥실 떠 있는 자유로움도, 느낄 수 없다. 하늘 맛을 알기게 새장의 새는 하늘과 바람을 그리워하며 죽어버릴 수도 있다. 그런 처지가 되면 그들은 글을 쓰는 자유를 달라고 항의하며 모든 것을 포기한다.
다만 소설을 전문적으로 쓰는 이에게는 약간의 부작용은 있다. 소설을 쓰는 이들은 자신들의 예술혼이나 자유로운 영혼을 무기 삼아 모든 책임으로부터 도망간다. 대중들은 그의 부재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외려 대중들은 그들의 직업윤리가 부여한 고귀한 소명의식에 고개를 숙이고, 그들을 더 우러러본다. 그들의 행위는 보다 큰 예술의 숭고함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여긴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런 행위들은 그들의 비사회성과 평범함을 감추려는 의도이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괴팍한 성격이나 도덕관, 터무니없는 논리, 가까운 사람들의 비밀이나 상처를 풍자의 제물로 삼는다. 어떤 이들은 그런 것들을 그 작가만이 가지는 개성이라고 하며 작가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런 괴팍함 속에서 다행스럽게도 작가의 놀라운 생애나 신기한 경험을 발견하면 독자들은 그를 위한 전설을 짓고는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낭만주의가 사실주의를 무릎 꿇게 만드는 과정이다. 괴팍한 작가의 개성이 그를 찬미하는 독자에게 어떤 심미감을 주는지, 그들에게 어떤 정서를 구현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작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작가의 비밀을 캐고 싶어 한다. 기발한 착상은 어디에서 구하는지, 글쓰기는 언제 하는지, 글쓰기를 하지 않을 때는 무엇을 하는지, 그들에게 영향을 준 작가는 누구인지 등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작가의 입에서 꾀나 멋지고 창의적인 말을 기다리며 그의 입에 집중한다. 작가들도 그런 기대를 알고 있다. 그들은 뜸을 들이면서 말한다. 어색함과 긴장감을 감추려고 담배도 피우고, 커피도 마시면서 말이다. 어지간히 이력이 나 있는 질문에는 목소리도 가다듬고, 강약도 조절하지만 낯선 질문에는 그 스스로 모호함의 미로에서 허우적거리며 말한다. 그러면 비평가들은 그 틈을 파고들며 즐긴다. 보통사람들이 작가에게 친절함을 베푸는 반면에 비평가들은 작가의 창조성을 질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트랄팔마도인의 행동양식 중에 마지막은, 그들은 지구인처럼 나이에 집착하지 않는다. 단지 남아있는 삶에서 고통의 총량과 쾌락의 총량을 비교하여 고통의 총량이 쾌락의 총량을 초과할 때 죽음을 슬슬 준비한다. 그러고 나서 노화에 맞서 싸우는 것이 불가능해지면 자유롭게 안락사를 선택한다. 그렇게 침착하게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