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권태

by 김영


둘째는 그들의 행동양식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트라팔마도인들에게는 현재, 미래, 과거가 동등하게 화음을 이루고 있어 미래의 불안감이 없다. 지구인의 불안은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에서 온다. 죽음의 공포도 그런 거다. 그런데 미래, 과거, 현재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트라팔마도인들에게 한 가지 고민이 있다. 그들은 미래를 알고 있어 어떤 기대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권태'라는 불치병이 생겼다. 권태는 모든 것을 알고 나서 일어난 정신질환이다. 우주청에서 모든 것을 발견했다고 공표했을 때 그들은 왠지 모를 엄청난 행복감을 느꼈다. 손에 비록 닿지는 않지만 미지의 섬의 주인이 된 것 마냥 들떴다.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아예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들은 애써 노력할 것이 남아 있어서 이 지경까지 안 왔을 것이다. 권태는 트라팔마도인들의 공공의 적이다. 어떤 승리와 행복과 평화와 쾌락도 결국에는 권태로 물들어갔다. 권태는 그들의 정신 속에 집요하게 똬리를 틀고서 그들의 정신을 질식시킬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들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권태에는 세 가지 범주가 있다. 묵시적 권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부정한 자세로 멍하게 눈만 끔뻑거리는 행위. 함축적 권태.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눈알을 뒤룩뒤룩 거리는 것. 명시적 권태. 마치 누군가에게 한 방 날릴듯한 태세로 3개의 발을 떠억 벌린 체 남은 두 팔로 X자로 하고 침(인간의 침은 하얗고 조그마한 공기방울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의 것은 녹색이다)을 뱉는 행위(눈물도 귀하기에 울지도 않는데 소중한 침을 뱉는 것은 이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거의 발작이다). 그러다 몸을 바닥에 완전히 납작하게 들러붙이고 눈은 멍하니 뜬 체 미끄러지듯 천천히 움직인다. 마치 우리가 한창 더운 여름날, 장판 바닥에 바짝 몸을 붙인 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냉기를 찾아 몸을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과 같다. 거의 내장이 툭 내려앉아 속이 텅 비어있는 듯한 상태이다. 우리는 파란 종이에 단단히 묶여 있지만 그들은 끈적이는 권태에 뭉크러져 허우적 된다.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을 저질러야 한다. 트랄팔마도에서는 권태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장려하지만 대개는 '환타스틱'이라는 마약으로 욕구를 푼다. 환타스틱을 먹게 되면 그렁거리던 그들은 킥킥댄다. 어쩌면 그것이 진보된 형태일 수 있다. 섹스 전 쓸데없는 애정의 교류도 생략하고, 도중에 연기도 필요 없고, 상대의 오르가즘에 신경을 안 써도 되고, 섹스 후 다른 생각을 갖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필요 없고, 뒤처리도 깔끔하다. 그리고 임신 후의 책임의 등재로부터 자유롭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후손들은 점점 성관계가 아니라 선택적 유전자 결합으로 자손을 낳게 되었다. 아기들은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체 선별적으로 공장에서 태어나고, 자라서는 그들도 양육의 부담이나 가족으로 상처받을 일이 없다. 그냥 자기 길을 가던 남자와 여자가 마주쳐서 툭하니 아이가 생겨나는 꼴이다. 어찌 보면 육아란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지겨운 일이다. 트랄팔마도인이 생각하는 자유와는 양립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태아의 수정은 예전처럼 남성의 몸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아 남성들도 중요한 일을 결정한다(과거에 트랄팔마도인은 해마처럼 수컷이 수정을 하였지만 유전자 기술의 발달로 몸 밖에서 수정이 이루어졌다). 가축이나 아이를 돌보고 뜨개질 대신에 우주개발이라든지 우주인의 권리보호, 로봇권 보장을 위해 법 개정에도 다수 참여한다. 섹스도 마약도 권태에 도움이 되지 않는 트라팔마도인들은 급기야는 악몽을 즐긴다. 그들에게 악몽은 몽정과도 같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삶 속에서 악몽은 예상치 못한 기쁨이자 일탈이다. 다른 세계의 언어와 표현하기조차 힘든 이미지로 가득 찬 꿈에서 깨어나면 복기하려고 애썼다. "나 어제 이런 꿈을 꾸었어"라고 말을 하지 않는 이상 꿈은 온전히 개인적 체험에 불과하다. 이 개인적 체험을 잊지 않기 위해 언어로 표현하였다. 언어로 표현된 꿈 중 구성력과 생생함을 잃지 않은 꿈은 거래되기도 하였다. 이런 트랄팔마도에서 선풍적으로 인기 있는 오락이 새로이 생겼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