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시간의 중첩

by 김영


세 번째는 트랄팔마도이 생각하는 시간에 대해서다. 앞에서 간단하게나마 설명을 했지만 워낙 중요한 부분이다. 지구인들은 자조적으로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야'라고 말한다. 이 말이 진실임을 그들에게 배웠다. 지구인들은 시간은 불가역적이라 물리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흐르는 시간은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고, 이리저리 찢어버리고, 납작하게 변형시켜 버린다. 항상 인간을 좌절시키고 용기를 앗아가는 놈이다. 혓바닥을 내미는 게 취미인 어떤 천재 지구 과학자는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말한 후 '다이너마이트 상'을 수상했다. 운동하는 물체들은 상대적으로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각자는 각자의 시간이 있다는 말이다. 각자가 운동을 하면 나의 현재는 누군가의 미래이고, 누군가의 미래는 또 다른 누군가의 과거이며, 또 다른 누군가의 과거는 나의 미래 일수 있다. 그러면 나의 현재는 나의 미래와 동시일 수 있다. 즉 과거, 현재, 미래는 동시라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갑자기 시간 너머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오늘은 과거가 되고 미래는 현재가 되지만 현재, 미래, 과거의 시간이 중첩되면 미래도 과거에 함께 존재한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회상이라는 단어는 이젠 쓸모없다. 현실이 생성되면 과거와 미래, 다시 현실을 증식시킨다. 세분 분열과 같다. 그들이 경험하는 세상은, 시간 대신 사건과 기억만 있고, 새로운 것은 이미 정해진 것에 불과하다. 시간을 달리 보기에 그들은 지구인들처럼 통념, 선입견이 없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을 필요도 없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잘못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도 향수를 느낄 수 있다. 그의 모습에는 과거의 모습도 있기 때문이다.


2012년 6월 12일 오후 5시 집 근처 공원의 풍경을 기억한다. 비는 긋다 내리다를 반복했다. 숲에는 잎과 가지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 지표면과 이파리들의 마찰 소리, 개골개골 소리, 짹짹거리는 소리, 윙윙거리는 소리, 사각사각하는 소리, 삐걱거리는 소리, 딱하고 부러지는 소리, 그리고 톡. 토토토톡..타닥타닥.우두두두. 떨어지는 빗소리가 있었다. 숲에서 듣는 빗소리는 신비스러운 심포니였다. 연못에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은 동심원의 꽃을 사방에 만들고, 잎사귀에 떨어지는 비는 갈증을 해소하고 묵은 때를 씻겨주었고, 땅에 떨어지는 비는 흙먼지를 진정시켜주고 땅을 숨 쉬게 했다. 얼굴 없는 바람이 불어와 나무 가장자리를 흔들자 잎이 퍼덕이고 물방울은 사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낮동안의 열기는 흙냄새를 뿜어내고, 꽃과 풀 냄새를 사방에 퍼뜨렸다. 오므라졌던 초록빛 꽃받침은 기지개를 펴듯 펼쳐지고 꽃봉오리는 수줍게 벌어지고 향기는 공중으로 퍼져갔다. 이런 기억의 조각이 무려 1470965개나 있다. 다만,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다 보면 자칫 나의 본질을 잊을 수 있어서 항상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손을 오므렸다 폈다 하며 귓가에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미, 등 뒤에서 아비는 안고 나는 살짝 발버둥을 치던 순간, 햇볕을 가리려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려 주던 누나, 언덕배기에서 밤하늘의 별에 대한 터무니없는 얘기를 해주던 동네형과 이름 모를 누나, 처음으로 배운 글자를 뜨문뜨문 이해하면서 그림책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던 순간, 동물도감에서 또아리를 틀고 득실거리는 뱀이 나오는 섬뜩한 48페이지를 그냥 건너뛰었던 순간, 함께 동화책의 삽화와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옆에서 다 읽기를 기다리는 어미, 눈을 뜬 아침 눈 덮인 세상은 고요하고 유리창에는 얼음꽃이 피어있고 나는 손으로 유리창을 동그랗게 문질렀던 순간, 숲 사이의 반짝이는 시냇물을 따라가며 종이배의 출항을 응원하던 순간, 햇볕이 가득한 마당에서 당신과 내가 잡고 턴 이불의 출렁거림, 자전거를 배우고 나서 바람을 가르며 날 듯한 마법 같던 순간, 어떤 여름날 마당에는 하얀 빨래가 펄럭이고 나는 그 사이로 뛰어가고 다리만 보이던 순간, 무엇이 땅속에 있는지 수많은 질문 속에 땅에 털퍼덕 앉아 친구들과 땅을 파보던 순간, 하늘에는 함박눈이 날리고 나는 입을 벌리고 눈송이는 입안에도 눈썹에도 떨어졌던 순간, 늦은 낮잠에서 깬 후 초저녁 어둠에 서럽던 순간, 중2 때 첫 사랑한 국어 선생님을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 앞 화단에서 창문을 통해 선생님을 몰래보곤 했던 순간, 그 후 선생님이 결혼한다는 소식에 그냥 눈물이 나던 순간, 야릇한 꿈에 느낌도 묘했던 첫 몽정의 순간, 시험기간을 핑계 삼아 친구와 밤을 새우며 서로의 비밀을 조금씩 열어보았던 순간, 가볍고 차갑고 부드러운 눈송이가 그녀의 볼에도, 속눈썹에도, 코 잔등에도, 살포시 닿고 그녀의 온기에 흰빛은 사라지고 물방울이 되어 맺힌 순간, 바람을 가르며 걸어가던 그녀의 코트 속으로 바람이 들어가 그녀의 몸이 부풀어 올랐던 순간, 그녀의 숨과 공기의 미묘한 변화로 그녀의 불안, 사랑, 유혹, 두려움, 안타까움, 편안함 같은 감정을 느끼던 순간. 마음만 먹으면 기억 속에 묻어있는 냄새에 대한 기억도 은은하다. 어미 몸에서 나는 나른하고 은연한 냄새부터 계절의 냄새까지. 시간의 중첩 내지 역전은,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 흐른다는,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열역학 제2법칙도 소용없다. 떨어지던 빗방울은 다시 구름이 되고, 죽은 이는 깨어나 내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모래는 뭉쳐서 바위가 되고, 엎질러진 물은 다시 얌전하게 컵에 담겨있고, 발사된 총알은 다시 장전되고, 쓰러졌던 병사는 다시 일어서고, 구부러진 허리는 펴지고, 찢어졌던 상처는 다시 아문다. 이 모든 것은 트라팔마도인들에게 시간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배운 덕택이다.


다른 시간에 대한 태도를 가진 트라팔마도인은 종교 대신 수학과 과학을 믿는다. 감정 대신 합리성을 선택한 것이다. 수학은 연역적 사고와 귀납적 사고, 예술의 이해와 언어의 형성에 깊이 관여하고, 우주에 숨겨진 고유한 의미를 선제적으로 이끌어내기보다는 사후처리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과학은 될 수 있는 한 이를 뒷받침하였다. 종교의 사제나 성직자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수학이나 과학을 추종하는 무리들의 늘 의심하고 따져 묻는 기색은 역력했다. 트라팔마도인이 비선형적 시간 속에 사는 반면 인간은 한 방향의 선형적 시간의 흐름 속에 산다고 착각하고 있다. 시간의 영원한 반복에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 각자가 하나의 세계이다. 그래서 마음의 평온을 누린다. 그런 반면에 지구인은 순차적 시간의 한평생밖에 모르고, 그들의 믿음은 고작해야 한 세기만 유효하다. 그 이후의 무한한 시간은 새로운 신을 만들지도 모르고, 선과 악이 바뀔 수도 있다. 또는 오지 않는 신을 기다리다가 지쳐 개종할 수도 있다.


트라팔마도인이 미래, 과거, 현재를 다 안다고 한다면 지구인들은 트랄팔마도가 더 이상 발전이 없는 정체된 사회라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지구인의 생각으로 나름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이다. 지구인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면서 창조나 창의, 창작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어떨 때는 새로운 발견은 앞선 것들을 융합,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모순된 상충이 지구인의 한계이다.


라쿤데력 22556년에 '커트 보니갓'의 애제자인 '헤스르보'는 창작이나 창의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있는 것을 재활용하여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기존 재료를 새롭게 가공하든지 기존 재료에 숨겨진 다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단순한 상상을 통한 예술지상주의의 한계를 넘겠다는 의지이다. 그는 기존 텍스트의 무한 가공의 과정을 '상호 텍스트'또는 '패러디'라고 명명하였다. 패러디를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우리 각자는 부모의 패러디이다. 부모는 또 그 부모의 패러디이다. 이런 식으로 확장하면 각자는 우주의 본령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아버지'라는 말은 그를 낳은 부모, 그 부모가 먹어치운 소와 돼지, 소와 돼지가 먹어치운 여물, 여물을 낳은 대지, 그리고 끝에는 우주의 대폭발까지 망라되어 있다. 하나의 존재는 우주와 동의어다. 그리고 시간의 무한함속에 언젠가는 동일한 조합이 생길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이 세계가 되풀이한다. 세계도 패러디인 것이다. 지구인이 '창조한다'라는 말은 그들에게는 '패러디된다'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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