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사라진 것들의 연대기 2

by 김영


1993~1996년

대학에 들어가면서 많은 생활의 변화가 생겼다. 우선 부모에게 모든 일에 설명을 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났다. 환호 작약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일어나고 자고, 집에 무시로 드나들고, 섣부르게 찧고 까불었다. 강의시간의 변경이나 휴강, 아니면 동아리 활동, MT라는 수도 없는 변명거리가 준비되어있다. 대학에서의 학문탐구는 존재한 바 없고, 미지의 섹스에 대한 호기심에 기울어져 있었다. 허구한 날 바람난 고양이 집 나가듯 길거리를 허세 덩어리 친구들이랑 배회했다. 술집도 자주 드나들고 성인영화도 자유롭게 보았다. 쾌락으로 연결하는 문을 통과할 때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매캐한 냄새와 야릇한 환희를 느꼈다. 지금까지 꾹 눌려왔던 것들이 부풀어 올라 자유롭게 떠 다녔고, 길거리 쇼윈도에 보이는 나의 표정은 전보다는 밝아 보였다. 막연한 행복을 느꼈다. 나와 같은 자유를 느낄 거 같은 여자도 더러 만났다. 그렇지만 매번 그녀의 손을 잡을, 입맞춤을 할, 껴안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쳤다. 그녀가 허락하는 때를 눈치채지 못하고, 눈치를 채도 적절한 말을 찾아내지 못해 입술이 얼어버렸고, 두 볼은 붉어졌고 이내 그녀의 눈초리는 실쭉하였다.


1994년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따분한 곳이다. 도심에서 떨어진 변두리라는 이유가 가장 크다. 눈에 띄는 익숙한 것들은 흥을 떨어뜨리고, 상상력은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에 반해 서울은 달랐다. 무슨 일이 생길 거만 같은 낭만적인 도시였다. 그 일은 열광과 감동의 순간과 관련되어 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아름다운 한 소녀를 우연히 만나 어떤 반짝이는 행동에 그녀의 호감을 사고 애틋한 사랑 끝에 결실을 보는 그런 상상의 순간들이다. 그날도 스포츠신문을 사고 서울행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순수하고 눈부신 영혼이 있었다. 그녀만이 도드라지게 시야로 다가오고 다른 사물들은 뒤로 물려났다.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바로 내가 찾던 그녀야!라고. 순백의 상쾌함이 불어왔다. 보통 전철을 타면 스포츠 신문을 읽었지만 그날은 예외였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떨렸다. 그녀에게서 거리를 둔채 흘깃 곁눈질하며 그녀와의 앞날을 생각했다. 그 앞날은 모든 낭만적인 것들이 두루뭉술하게 압축된 형태이다. 며칠 동안 멍하니 그녀와 함께하는 인생이야기를 그리며 그녀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녀 옆에는 속빈 강정처럼 허우대만 멀정하게 보이는 놈이 있었다. 둘은 허연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 지으며 바짝 붙어 있었다. 그 순간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의 문은 '꽝'하고 닫혔다.


1998년

카세트에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넣는다.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이 있는 테이프이다. 수화기를 든다. 긴장된다. "호출은 1번, 음성 녹음은 2번, 부가서비스는 3번을 눌러 주세요." 3번을 누른다. "삐! 음성 확인은 1번, 인사말 녹음은 2번, 비밀번호변경은 3번을 눌러주세요." 2번을 누른다. "비밀번호를 눌러주세요." 0000을 누른다. "삐 소리가 나면 인사말을 남겨 주세요." 젭 싸게 카세트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전화 수화기를 카세트의 스피커에 댄다. 숨죽인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무사히 일을 마친 거 같다. 수화기를 들어 012 354 **** 를 누른다. 성공이다. 이제 그녀의 삐삐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언젠가 그녀에게 1004나 486을 보낼 순간을 상상해본다. 기분이 들뜬다.


오스카 와일드는 '삶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사랑을 얻지 못하는 비극, 또 하나는 사랑을 얻는 비극'이라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를 도저히 알 수 없던 시절에 한 여인을 만났다. 아직까지도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첫사랑이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나 감정이나 중요도에 따라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다. 인생의 무상함을 말할라치면 길어질 필요가 없다. 단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를 밝혀두면 그것 이상 무상함을 나타내는 표현은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새로운 무언가도 첨가되지 않는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라면 상황이 다르다. 따지고 보면 살면서 추구한 목표는 여성과 관련된 것이 많다. 그녀를 첫 직장인 학원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내가 진정으로 도달해야 하는 해방구였다. 몇 번의 구애로 사랑을 얻었다. 그 당시에는 사랑과 성과 결혼은 매우 단단한 끈으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손을 처음 잡고는 멈짓하고는 힘없이 그녀의 허벅지에 내려놓고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녀가 숨을 내쉬면 내가 들이마시고, 내가 내쉬면 그녀가 들이마셨다. 순간, 결혼해야 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우연의 일치에 놀라웠다. 서로가 스쳐 지나가던 장소를 말하면서는 더 일찍 만날 수 있지 않았나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아니면 인생의 우여곡절의 얄궂음에, 지나쳐버린 시간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랑은 1년 남 짓갔다. 간절했던 것이 아득이 사라져 서로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버리기에는 1년이면 충분했다.


2004년

최저가를 찾아다니고, 제휴카드를 만들던, 그녀는 초밥을 좋아한다. 그 알뜰한 여자에게 차였다. 애정을 넘어 내 생각까지 존경한다던 여자였다. 그랬던 그녀에게 나의 말은 닿지 않고, 언제부턴가 '이상적이다', '낭만적이다'라는 말로 나를 표현했다. 그녀에게는 이상적이고, 낭만적이라는 말은 나쁜 말이다. 한마디로 현실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놈이라는 말이다.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바뀌고, 그녀의 침묵 속 의심스러운 모호함이 감지된 후 보기 좋게 차였다. 차이는 순간, 욕망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꼈다. 물론 불안한 직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알 수 없는 표정과 진심을 알 수 없는 야릇한 눈빛이 두 눈에 배어 있을 때는 당혹스러웠다. 그 순간은 그녀 가슴에 싹트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어슴푸레 느껴서 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 눈길을 마주쳤을 때 내 시선을 느꼈던지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 눈길은 설명하기 힘든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내 어찌 차가운 그녀 눈 뒤에 감춰진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떠나지 마라, 당신 없이 어떻게 사느냐!'라고 하소연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울밤 철문의 냉기가 그녀에게 느껴졌다. 그리고, 1년 정도 지나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산책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단다. 어쩌란 말이냐, 이젠, 나에겐, 그녀에게 걸맞은 새 이름을 지어줄 마음도 없고, 나의 상상 속에 그녀를 채우기도 싫다. 그리고, 그녀의 눈가에 붙어있는 머리칼을 떼어줄, 그녀의 엉킨 머리칼을 풀어줄, 손이 없다. 당신은, 나에게는 예전에 죽은 자라는 것을, 이별은 또 다른 죽음이라는 것을, 모른다.


2034년

마지막 소설 『소설들』집필 중 세상을 떠남. 그는 마지막 순간 둘러싼 사람을 향해 한 팔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떨어뜨렸다. 그리곤 떨리는 눈을 감았다. 유언에 따라 화장되고, 재는 교외의 산에 뿌려짐.


'I have a dream.' 나도 누구 못지않은 꿈이 있다. 열광적인 타인들 앞에 서는 일이다. 무대 한가운데를 비추는 조명의 빛줄기는 계속 빛을 달리하고 , 뒤로는 클라이맥스를 담당하는 기타, 곡의 중심을 잡아주고 음색을 풍부하게 만드는 베이스, 리듬과 흐름을 관장하는 드럼, 곡을 화려하게 만들거나 곡의 음색을 바꾸는 키보드 세션이 있고, 나는 티셔츠 단추를 세 개 정도 풀어놓은 체 그들 가운데에 서있다. 물론 보컬이다. 무대의 불빛 속에는, 움직임이 과한 기타와 건방지듯 살짝 리듬만을 타는 듯한 베이스 그리고 힘이 넘치는 드럼과 건반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키보드가 하나가 된다. 유대와 친밀감을 느낀다. 스피커는 사라지고 소리만 남는다. 아니, 소리는 사라지고 음악만 남는다. 이것이 나의 꿈이다. 음악에 취해있는 락밴드의 보컬이다. 드디어 죽음이라는 꿈을 이루었으니 나를 위해 신나는 노래한 곡 들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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