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은 대충의 연대기는 다음과 같다. 시간이 흐르면 이야기는 잊히거나 용해되어 하나의 빛깔로 응고된다. 응고된 이야기는 때론 배경과 이야기 자체를 뛰어넘어 하나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시간은 쇠퇴해도 인상은 남는다.
1. 탄생(전율적)
2. 최초 같은 기억들(기록적)
3. 집단생활 1(정치적 입문)
4. 집단생활 2(정치적 모색)
5. 집단생활 3(정치적 활로)
6. 해방된 생활(보헤미안적)
7. 자기도취(설레발적)
8. 첫사랑(감상적)
9. 마지막 사랑(연극적)
10. 스포일러(예언적)
소개(紹介)
1975년
이야기인즉슨 다음과 같다. 폭발과 함께 3억 마리의 경쟁자들은 하나의 알을 만나기 위한 대장정이 시작된다. 계곡과 늪을 통과하며 많은 동료들은 사멸했지만 나머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다시 나뭇가지에 걸리고 찢기고 갈수록 험난한 과정 속에 단 하나의 목표물을 향해 나아간다. 이제 동료는 불과 수백여 마리밖에 없다. 먼저 도착했다고 선택받는 게 아니라 최종선택은 알이 한다. 오로지 한 마리가 운 좋게 알속으로 들어가자 문이 닫히고 모든 경쟁은 끝난다. 남아있던 동료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주변을 서성이지만 곧 최후를 맞이한다. 드디어 무의 광야에 한 알의 존재의 싹이 트고, 38억 년의 진화의 과정을 몇 주 만에 압축하여 완성된다. 드디어 인간의 모습을 갖춰간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어둡고, 하나 가득한 세계는 더 이상 웅크린 그를 가둘 수가 없다. 드디어 한 바탕 울음소리와 함께 거칠고, 차갑고, 현기증 나게 밝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세상과 첫 입맞춤을 한다. 탯줄도 없이 폐로 숨 쉬고 부력 대신 중력의 힘을 느낀다. 그렇게 그는 XY 염색체를 가지고 세상에 던져졌다. 어느덧 하나의 서사는 시작되고, 어미는 눈물을 흘린다.
1979년
물론 탄생의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어디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의식과 의식 사이를 메꾼 무의식은 어떤 것일까? 한참을 고민해도 생각해내기가 어려울 거 같다. 생각한들 순서도 잘 모르겠다. 어차피 시간도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기억을 할 수 있으면 그 시간은 존재하는 것이고, 기억할 수 없다면 그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정확하진 않지만 기억해 낼 수 있는 최초의 기억에 대해 고민해 본다. 그것은 일종의 자긍심과 관련이 있다. 아마 5살 무렵인 거 같다. 물론 흑갈색으로 조색된 사진을 통해서이다. 사진 속의 아이는 카메라를 보면서 씩씩하게 웃고 있다. 세상에 겁먹지 않겠다는 배짱 좋은 모습이다. 쪽창으로는 백묵 같은 볕이 들어오고, 볕 속에는 빛나는 먼지들의 춤이 있다. 벽에는 동식물 사진과 명칭이 붙은 커다란 사진이 있고, 그 옆에는 색연필을 단단히 쥐고 있는 아이가 있다.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해, 인간 사회 속에 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초유의 세상을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젊은 여인이 덜 감은 동그란 털실을 손에 쥔 체, 유별난 애착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먹고사는 근심을 잊게 해주는 달콤한 순간, 그녀는 무얼 생각하고 있을까?
그 아이가 자라서 지금의 나로 바뀌었다. 그 무렵에는 어떤 모욕감에 대한 기억도 있다. 꿈속에서 뛰놀다 급해서 길가에 시원하게 소변을 본 아침, 이불은 축축이 젖어있었다. 그럴 때는 엄마는 머리에 키를 씌우고 바가지를 손에 쥐어주었다. 옆집 가서 소금을 얻어 오라고 했다. '이런 일을 왜 해야 하지?' 그리고 '굳이 밖에까지 알려 집안 망신시킬 이유가 있을까?'가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마술 같은 일도 있었다. 밖에만 나갔다 들어오면 주머니에는 손 끝에서 만져지는 모래가 있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땅바닥에서 뒹글었냐고 묻는다. 맹세컨데 그런 일은 없었다.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다. 정말로 힘든 것이 있었다. 친구들이랑 있으면 시간은 이상하게 빨리 지나가 해가 금방 진다. 그러면 어디선가 밥 먹으라고 하면서 마녀들이 나타나 한 명씩 붙잡아 간다. 한 명씩 사라질 때마다 힘들었다. 믿었던 동네형도 힘없이 끌려간다. 인간의 연대를 이렇게 무참히 깨는 게 맞는 건가? 나는 사회적 동물로서 역할을 충실히 한 것뿐이다. 물론 나도 등짝을 한대 맞고 질질 끌려가긴 한다. 완전 독재다. 그래도 평화를 위해서 참는다.
1981~1986년
이 시절은 초등학교 시절이다. 많은 기억이 산재해 있다. 여며진 옷핀이 살갗에 닿아 느껴진 차가움. 기다란 막대에 매달린체 오르내리면서 어지럽게 돌던 회전목마. 풍선의 끈을 잡고 있던 손의 간지러움과 땀의 끈적임. 얼굴과 팔을 간질이는 햇살의 느낌. 신발을 벗고 들어간 잔디밭의 간지러움. 남자라는 최초의 기억을 알려준 남탕과 여탕의 구분. 온유한 여성과 포악한 남성의 세계 사이에서 고민한 적이 있다. 여성은 곤충들을 잡아 다리를 자르지도 않고, 날개의 일부를 자르고 날려보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경주를 강제로 시키지도 않는다. 그리고 서열을 정하는 것이 당연시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역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터무니없는 전쟁과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녀들은 다정다감하고 동정심이 많다. 점점 사랑과 평화가 공존하는 세계로부터 멀어지는 걸 직감했다. 그 직감을 더한 것은 '동물의 왕국'이라는 tv 프로그램이다. 구성원들의 힘의 차이가 지배 체재를 결정하는 과정을 마음을 조여 가며 보았다.
그 당시에 잘하면서 칭찬받던 일이 있다. 심부름이다. 실은 거기에는 음모가 있었다. 남는 돈에 대한 권리이다. 심부름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돈의 효용성을 배웠다. 여기에서 그쳤어야 했다.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돼지저금통에서 야금야금 동전을 빼냈던 일이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돼지저금통을 옷핀이나 코바늘로 입구를 조금씩 늘릴 때는 어디선가 부모의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을 거다. 잘했다고는 안 했다. 뻔뻔하게 말하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사회성 발달의 증거로 삼아주면 안 되겠냐는 거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이런 일을 앙갚음하기 위해서인지 간혹 대중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이태리 타올로 빡빡 문질러 살을 벌겋게 만든다. 뽀얗게 만들겠다는 약속을 위반하고는 미안한지 초콜릿 우유를 사준다. 그러면 나는 항의하는 것을 곧 잊어버리게 된다.
물론 보람된 일도 있었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자전거를 처음으로 배웠을 때다. 떨리는 마음으로 안장에 올라 무작정 페달을 밟고 자전거는 한쪽으로 기울어 넘어진다. 반대쪽으로 핸들을 돌려야 된다는 것을 알지만 어렵다. 그러다 어느 순간 페달 밟기와 적절한 핸들 조작으로 몸이 마치 떠오르듯이 균형을 잡았을 때 이 세상에 태어난 걸 감사했다. 이때부터는 놀랍게도 쓰러지지 않고 똑바로 서서 바람처럼 달린다. 마법 같았다. 달리기랑은 다르다. 달리기만 하면 옆 엣 놈이랑 부딪혀서 자빠지든, 의욕만 앞서던 제 발에 넘어지던지 했는데, 자전거는 핸들을 잡지 않고 두 손을 벌린체로 몸의 중심 이동만 하면 바람을 가르고 아무 데나 가는 것이 가능했다. 이건 차를 타는 거랑도 달랐다. 유리창에 멀뚱이 이마를 대고 사라져 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힘껏 페달을 밟노라면, 그를 뒤따르던 등 뒤의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한없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럴 때면 삶이 영원할 거 같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는 박애주의자였다. 방과 후 교문 앞에서 병아리를 사거나 길가의 이름 모를 들꽃을 집으로 가져왔다. 잘 키우려는 애틋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살린 건 없다. 생명의 연장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그 시절의 꿈은 과학자였다. 내 친구들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호기심이 많았다. 비와 눈은 왜 내리는지,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지,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저 별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땅 속에는 무언이 있는지, 수많은 질문이 있었다. 친구들과 땅을 파보기도 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호기심을 잃어버렸다. 말하다 보니 참기 힘든 게 또 한 가지 생각난다. 이건 중요하다. 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린이날 선물을 받지 못하는가 이건 말이 안 된다. 이렇게 초등학교 시절은 끝났다. 비눗방울처럼 빠르게 부풀어 올라 영롱하게 빛을 반사하여 사람을 황홀하게 만들고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좋은 시절은 다 갔다.
1987~1989년
중학교 때는 나의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중2 때였다. 학교에 새로 부임해온 국어 선생님이다. 나의 첫사랑은 밥도 먹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는 신적인 존재였다. 아직도 성함을 기억한다. 온통 선생님 생각뿐이었다. 하나에 몰입하면 다른 것들을 놓치게 되는데, 그때는 짝사랑이 나의 전부였다.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 앞 화단에서 창문을 통해 선생님을 몰래보곤 했다. 선생님이 고개를 들려 창문을 바라볼 때는 숨곤 했다. 물론 선생님도 나의 마음을 아는 거 같았다. 그러던 중 선생님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울었다. 그냥 눈물이 나왔다. 죽을 거 같은 이별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하여간 잊지 못할 선생님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싸움도 몇 번 했다. 입술은 터지고 눈은 멍투성이었다.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는다.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힘든 순간이었다. 선택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와의 싸움을 피할 수도 있고, 피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놈과의 싸움을 부모나 선생님에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피하지 않고 나 스스로 감당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이 선택에는 공포가 함께 있다. 이 세계는 거칠고 잔인하고 격렬한 세계이다. 냄새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세계이다. 부당한 힘에 맹목적으로 굴복하느냐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느냐. 진정한 선택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피하지 않고 자존심을 세우는 쪽으로 결정을 하는 순간은 무자비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 뒤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한 명의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깨우쳤던 순간이었다.
술, 담배는 하지 않았다. 금기와 금지는 인간의 욕망과 상상력을 더 자극하지만, 하지 않았다. 그 말은 범생이었다는 말이다. 친구들은 화장실이나 옥상에서 담배를 피웠다. 냄새나는 좁은 화장실에서 3~4명씩 들어가서 피거나 옥상에서 몰래 피웠다. 짙은 초록색 옥상 바닥은 방수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여름이면 빛이 튕겨져 나가고 열기가 심했는데도, 뜨거운 연기를 입으로 삼키고 다시 코로 뿜어 낸다. 다시 뿜어낼걸 삼키는 이유는 모르겠다. 그런 후에 그들은 수북한 꽁초 위에 항상 침을 뱉는다. 침을 뱉는 모양도 장기자랑이었다. 선생님들에게 걸리면 체벌을 받는데도 독립운동하는 것처럼 비장했다. 그 아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가방 조사도 하고 단체 기압도 받았다. 체벌로 우리를 빨리 바꾸고 싶었던 거 같다. 아이들은 오랫동안 볼 건데 하루 이틀에 승부를 짓겠다는 것이다. 뭐 비판은 하고 싶지 않다. 그때는 사회 전체가 폭력적이었으니까. 그 아이들은 먹을 거에는 더 용감했다. 그들은 먹는 게 아니라 아예 입속에 먹을 수 있는 걸 쑤셔 넣었다. 볼은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그 당시 첫 몽정도 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잠결에 오줌을 싼 거 같았지만 야릇한 꿈에 느낌도 묘했다. 큰 죄를 진 거 같아 팬티를 몰래 빨았다. 근데 한 가지 이상한 게 있다. 사람들은 관광버스만 타면 춤을 추었다. 수학여행 때 아이들은 움직이는 관광버스의 좁은 통로에서 몸을 흔들었다. 어릴 때 엄마랑 아주머니들이 추는 거처럼. 이렇게 천방지축인 거 같은 아이들도 반드시 지키는 게 있다. 아니, 전 국민이 지켰다. 매일 오후 5시에 국기 하강식을 알리는 애국가가 울리면 길을 가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하던 일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올렸다. 조건반사였다. 만약에 멈추지 않으면 간첩이라고 했다. 신고가 두려워서인지 모두가 멈췄다. 이런 식의 폭력은 만연했다. 학교도 군대생활같이 수많은 조회와 교장선생님부터 담임선생님까지 이어지는 훈시가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훈시를 시작했다. 그때는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체벌도. 그들은 아이들을 사랑한 나머지 가정방문도 간혹 하였다. 집에 담임선생님이 오신다고 하여 어머니는 술상을 차리고, 봉투에 아끼던 돈을 챙겼다. 선생님은 거나하게 취해 갈 때 나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셨다.
1990~1992년
중학교 시절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감정도 고등학생이 되면서 미래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입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시험 때는 밤을 꼬박 새기도 하였다. 입시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피학적인 경험이었다. 다행히 같은 고민을 가진 친구들이 있어 무사히 넘겼다. 같이 모든 것을 함께한 삼총사와 달타냥이 있었다. 나중에 달타냥은 학교에서 잘 나가는 새로운 무리에 합류했다. 우리 삼총사는 그와 깨끗하게 갈라섰다. 시험기간이 좋은 이유는 그 삼총사들과 같이 밤을 새울 수 있어서였다. 물론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수다 떨면서 새벽을 맞이하였다. 서로의 기억과 비밀을 조금씩 열어 보여 얘기는 끝 간 데를 몰랐다. 그들은 아무리 내가 잘못을 해도 "어제는 미안했어"라는 말 한마디로 나의 마음의 빚을 씻어 주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수많은 누군가를 미워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이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 시기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지 돌아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독재도, 민주주의도, 정의도, 그것들은 나에게 관련 없는 배경에 불과했다.
(a+b)^2=a^2+2ab+b^2.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운 곱셈 공식이다. 좌우 대칭식이다. a와 b를 바꾸어도 항상 성립하는 항등식이다. 대칭은 아름답기도 하고 안정적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습도, 동물이나 식물의 모습도 좌우대칭이다. 이런 방향으로 진화된 것은 대칭이 생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대칭이라는 패턴을 가지고 있어야지 벌과 나비를 이끄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라 결과론적으로 생각한다. 많은 건축물도 대칭적인 것이 많다. 'Non-existen of proof is not proof of non-existence.(증명의 부재가 부재의 증명은 아니다.)'라는 말처럼 쓰는 말도 좌우대칭이면 리듬감도 있고, 오래 기억된다. 미술과 음악에서도 대칭성은 필수이다. 바흐의 invention BMW779 에서는 음의 몇 마디를 좌우 반사시키고, 좌우 반사시킨 음을 상하 반사시킨다. '트랄팔마도의 수학 사전'도 눈치가 빠른 독자는 알겠지만 대칭적으로 플롯을 구성했다. 안정적이고 좌우가 연결되는 것을 보이고 싶어서다.
그 당시 나의 꿈은 택시운전사였다.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꿈이다. 차 안은 세상의 어수선함을 단절하는 공간이다. 도시는 비에 젖고, 지면에 반사된 불빛은 살아 움직이고, 창문에 맺힌 빗방울 사이로 초점을 잃어버린 불빛은 흔들린다. 빗방울은 투덕투덕 차를 때리지만 나의 몸에는 닿지 않고, 빗속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만 소리는 삭제된다. 닿을 수 없는 빗방울과 삭제된 소리. 그 후로 인생은 나의 꿈처럼 실체에는 닿지 못하고 모호함 속에 몸을 숨겼다. 간혹 삶의 본질이 나에게 닿을라치면 의도적으로 피해 갔다. 그런 비겁한 모호함에도, 수학을 할 때면 모호함은 사라지고, 어둠 속에 돌연 환한 통로가 나타나 어두웠던 세계는 맹렬하게 밝은 세계로 바뀐다. 그런 통렬함은 혼자 있을 때 훨씬 더 강렬하고, 순수하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그 통렬함은 미분을 배우면서 극에 달했다. 모든 것이 움직이지만 수학은 움직이는 것을 다룬 적이 없다. 그런데, 미분을 통해 움직이는 모든 것을 계산하게 되었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모든 것을 수학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순간속도뿐만이 아니라 흐르는 물의 부피나 가격의 순간 변화율, 온도의 변화와 대기압의 변화든, 변하는 것들은 미분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미분의 역연산인 적분을 통해서 물체의 과거의 위치를 알 수도 있다. 그 당시에는 미분과 적분의 영향인지 모르지만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