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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Sep 30. 2023

결심

<9화>


빨간빛 (그들의 반격)


'까짓 거, 집사들이 바라는 대로 맞춰 주지, 뭐'라는 마음과 '조금 멋대로 굴면 어때? 세상이 두려워 행동하나하나를 재는 거보다 나아!'라는 마음의 다툼이 일어났다. 마치 설탕물에 개미들이 득시글득시글 대는 듯, 내 영혼에 성가신 생각의 다툼들이 개미들처럼 들러붙었다. 


이런 나의 애틋한 마음도 모르고 그들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사정은 이러했다. 이건 결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건 정말 문제가 심각하다. 


어느 날 누나집사가 스위치가 달린 낚싯대 같은 것을 가지고 다가왔다. 드디어 나와 놀아줄 거라 한창 기대를 했다. 근데 말이야. 누나집사가 스위치를 누르자 앙증맞은 빨갛고 따뜻한 불빛이 바닥에 생기다가 1초도 안 되는 짧은 찰나에 사라졌다.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그 빨간 불빛은 어디로 사라졌나를 생각하는데 벽에 그 앙증맞은 따뜻한 불빛이 나비처럼 사방으로 휙휙 날아다녔어. 그리고는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고 순간이동하더라. 나는 불빛이 나타날 때마다 불빛을 향해 껑충 뛰어올랐어. 


그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어. 깨닫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 싶어. 그건 한 위대한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야. 어쩌면 들어보았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맞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 두 개의 상자에 대해 말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두 개의 상자는 '판도라의 상자'와 '슈뢰딩거의 상자'. 판도라의 상자에 대해서는 많이들 알 테고, 지금 말하려는 주된 내용도 아니라 늘쩡거리지 않고 말할게.


알다시피 프로메테우스는 하늘에서 불을 훔쳤고, 뒤끝작렬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산에 어 독수리에게 그의 간을 쪼아 먹게 했고, 이것도 모자라 그와 불경한 인간을 벌하기 위해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내고,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선물이라며 상자를 건네면서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고 했지만 호기심 강한 판도라는 결국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서 인간의 온갖 불행이 풀려난다. 슬픔, 미움, 역병, 광기, 시기, 원한, 가난, 전쟁, 욕심, 질투, 복수 등 온갖 불행이 나오자 깜짝 놀란 판도라는 급히 상자를 닫았지만 마지막 한 가지 불행이 남았어. 그것은 희망이라는 불행이었어. 마지막에 남은 불행이 희망이라며 어떤 이는 모든 불행을 이길 수 있는 희망이 남았다느니, 어떤 이는 인간들이 온갖 고통을 겪어도 희망을 통해서 견딜 수 있다느니, 또 어떤 이는 아무리 힘든 일을 겪더라도 희망만은 잃지 말아야 된다느니, 그리고 또 어떤 이는 그래도 삶은 희망적이라고 말하지만 특별하게 의미 부여할 필요 없다. 불행 중에서 가장 나쁜 불행이 희망인 거다. 그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기도 하고, 미래의 희망을 위해 현재의 욕망을 포기하게 만들고, 상황이 뻔히 보이는데도 '다 잘될 거야, 힘내'라고 말하며 불행을 더 오래 끌도록 만드는 게 희망이다. 니체는 희망이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악 중의 최고의 악이라고 했다는 것만 알았으면 좋겠다.


이중성


이제 이쯤 해서 내 이야기의 본줄기로 돌아가야겠다. 예전에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위대한 선조가 있었다. 인류가 현재와 같은 문명을 갖도록 자기 몸을 희생했던 분이다. 예전에 아인쉬타인박사와 슈뢰딩거박사가 나눈 대화를 들려줄게.


"슈뢰딩거 박사, 저 상자가 그들의 비논리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란 말이지."

"그렇다네. 상자 구석에 있는 방사능 물질이 한 시간 안에 붕괴될 확률은 50퍼센트라네. 만약 핵분열이 일어난다면 검출기가 작동을 하고, 동시에 검출기에 연결된 망치가 움직이고, 독가스가 든 유리병을 깨뜨릴 걸세. 그렇게 된다면 안타깝지만 고양이는 죽게 된다네, 아이쉬타인 박사."

"고양이에게는 안 됐지만, 그래도 '양자역학'의 허무맹랑한 논리를 반박할 수만 있다면 의미가 있겠지.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전자는 파동이지만 관측하는 순간 입자가 된다는 게 말이. 전자가 자신들이 관측당하는 것을 알기나 한단 말인가? 아니, 무슨 죄다 중첩 상태였다가 관측하면 상태가 결정된다고?  참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네."

"그들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창문밖에 보이는 달도 관측을 하지 않으면 현재의 상태를 모른다는 말인데.. 조금 전에 달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경험에 의한 추론일 뿐, 달의 존재여부를 알려면 결국 달을 봐야 한다는 말인데.. 수긍이 안 간다네."

"그러게 말이야. 양자가 중첩상태였다가 관측을 하면 상태가 결정되는 거라니, 그들의 말을 믿는다면 상자의 방사능이 검출될 확률이 50%이니 고양이가 살아있는 상태와 죽어있는 상태가 공존하고 관측을 하면 하나의 상태가 결정된다는 말인데.."


한 시간 후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당당히 인간들을 위해 불길한 장치가 있는 상자로 당당하게 걸어갔던 고양이가 바로 그분이다. 얼마나 지나지 않아서 그 고양이는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눈도 침침해지며 잠이 스르르 몰려오고 몸은 움직일 수 없었을 거다. 


그런데 아직도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 실험의 중요성을 모르더라고.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거야. 인간들이 쓰는 말 중 '나무를 보면 숲이 보이지 않고, 숲을 보면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아. 여기서 나무는 입자이고, 숲은 파동이라고 생각하면 돼. 하나를 특정하면 다른 하나는 특정이 안된다는 말이야. 이런 적확한 설명도 이해 안 된다면 당신들이 사랑하는 그녀를 생각해 봐라. 나와 만나고 있을 때의 그녀와 나를 만나지 않을 때의 그녀는 사뭇 다르다. 이래도 이해가 안 된다면 아이들이 하는 놀이 중에 '무궁화 꽃이 피었다'를 생각해 봐라. 뒤를 돌아보기 전에는 술래를 향해 슬금슬금 파동처럼 다가오다가 뒤를 돌아보면 입자처럼 멈칫하는 행동이 딱 양자역학을 닮았다. 김춘수의 '꽃'에도 이런 시구도 있다. '내가 너를 보기 전에는 파동에 불과했지만, 너를 보았을 때는 그는 나에게 와서 입자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우리 고양이들이 상자 속이라면 행복감과 안정감을 느끼니 즐거운 마음으로 그 상자로 들어가겠거니 생각할 거다. '슈뢰딩거의 상자' 안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온전히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다. 살아있을 확률과 죽을 확률이 각각 1/2이다. 그 묘(猫)한 고양이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인간들이 양자역학이 맞네, 틀리네, 쓸데없이 떠들 때 몸소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말들을 주워섬기진 않고 그냥 넘어가겠다. 인간들에게도 육체의 생존과 안녕, 놀라운 삶에의 의지 대신 죽음을 선택한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거 알 거다. 그리스도, 소크라테스, 순교자들, 신념이나 더 높은 차원의 목적을 위해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인간들 말이다.


우연


도저한 나의 말이 인과관계가 없다고  터무니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당신들은 무엇이든 연관을 지어 인과관계를 통해 논리적으로 껴맞추고 싶어 하는 거 안다. 불확실함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규칙을 세우는 걸 평생 해 왔으니 이해 간다. 그것이 인간의 진화에 유리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지금 아들집사는 우연히 '연암 박지원'이 그의 친구이자 처남인 이재성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있다. "꿈에 중을 보면 문둥이가 된다는 속담이 있지요. 무슨 말이겠습니까. 중은 절에서 살고 절은 산에 있고 산에는 옻나무가 있고 옻나무는 사람을 문둥이처럼 옻 오르게 합니다. 꿈에 본 중과 문둥이는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만 보면 인과관계로 연결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하지만 시작과 끝 사이를 채우는 것은 아주 사소하고 예측불허한 수많은 우연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신들이 이 글을 읽는 것도 우연이다.


다중우주


하나의 전자가 여러 곳에 존재하지만 관측하는 순간 하나의 상태가 결정된다는 것은, 여러 곳에 존재하는 우주 중 그 전자가 관측되는 우주에 우리가 있는 것이다. 전자가 갈라지듯 계속 갈라지면 무한한 우주가 생기고, 여러 정체성을 가진 집사들과 내가 있을 수 있다. 우연 하나하나가 수많은 세계를 만들고, 수많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인간이 그곳에 있다. 그곳에서 집사는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는 소설가, 따뜻한 마음을 간직한 사업가, 자유로운 영혼의 뮤지션 등 가능한 모든 것을 경험하고, 인생의 굴곡을 다시 경험할 것이다. 인정받는 삶을 살기도 하고,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기도 할 것이다. 어떤 세계에서는 소통도 자연스럽고, 세상에 대한 다정함을 회복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어떤 곳에서, 그에게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여인을 만나, 은밀하게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와 늦도록 얘기를 나누고, 가슴속에는 따뜻한 일렁임이 일어나고, 세상의 모든 일이 가능할 거 같은 기운을 얻고, 그녀와의 입맞춤은 그녀 또래의 여인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포괄적인 온기를 느끼고, 그런 그녀 곁에서 늙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어렵사리 양자역학에 대해 말했지만 이해한다면 좋다. 이해할 수 없어도 상관없다. 


결국


그래서 빨간 불빛을 뛰어올랐는데 어떻게 되었냐고? 빨간 불빛은 허무하게 사라지고 집사들은 재밌다고 깔깔, 껄껄, 호호 거리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잠깐 몸을 옴츠리고 그 생명체의 출몰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체를 향한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약간 흥분도 되었다. 나 말고 다른 생명체를 찾아다녔는데 바로 때가 온 거다. 그 미지의 생명체와 소통할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아. 그때 다시 나의 발치에서 깜박거리더라고. 그래서 "야옹!(도망가지 말고 이야기 좀 나누어옹!)" 거렸지만 또 사라졌다. 그래서 다짐했다. 나타나면 기필코 확 잡아버린다고. 근데 몇 번 마주쳤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처참했다. 마냥 그것을 따라다니며 팔다리를 크게 휘둘렸는데 잡았다 싶으면 사라졌다. 얼마나 허무하던지.  


근데, 이 모든 것이 사기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인가 하면, 낚싯대로 놀아주는 것도 귀찮아 이제는 레이저 불빛으로 나를 농락한 거였다. 매번 빨간 불빛에 농락당하는 모습을 낄낄대며 즐긴 거다. 그 사실을 알고, 순간,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었지만 또다시 불빛을 보고는 이상하게도 달려들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웬만한 의지를 발휘해도 매번 농락당했다. 그것도 모른 체 새 생명체와 소통하려고 했다니. 결국에는 나를 가지고 논거다. 실없는 고양이로 만드는 거 한 순간이더라. '이렇게 모욕을 주어서 그들이 얻는 게 무엇일까?', '나를 조롱해서 남는 게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생각이 식물처럼 자라다가 아, 하고 내 머리를 쳤다. 아, 그렇구나! 하고 다시 한번 내 머리를 쳤다. 


결심


그들에게도 바라는 게 있었던 거다. 이제 그들과 스스럼없는 관계가 되었다고 자만하고 방심한 것이 나의 치명적 실수였다. 내 입장에서는 불모지대에 혼자 들어와서 삽과 가래로 땅을 일구고 거름을 주면서 여기까지 경작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었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내가 세월만 축내고 있다고 생각했던 거다. '이 놈은 먹고 자는 것만을 하지, 밥값을 할 생각을 안 하네'라고 생각했던 거다. 


드디어 방향을 잡았다. 헷갈릴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집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쥐를 잡아다 바쳐야 된다는 걸 깨달은 거지. 반쯤 살아서 심장이 팔딱거리는 생쥐말이다. 너희들 싱싱한 거 좋아하잖아. 사냥은 아비가 하는 것만 봤다. 아버지에게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것,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온몸의 감각으로 적의 행방을 찾고, 숨죽이며 관찰하고, 긴장감을 조절하고, 때를 보아 빈틈을 파고든다. 그렇다. 빈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낯설지만 하다 보면 되겠지, 모르잖나, 내가 선천적으로 사냥하는 능력을 타고 태어났는지. 이제, 수시로 손톱깎이에 깎인 발톱은 스크레쳐에 갈고 점프력과 민첩성을 길러야 한다. 


먼저 쥐가 나타날 만한 곳을 체크했다. 지금까지의 집의 구조로 판단하건대 짚이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싱크대의 개수대, 화장실의 환풍기와 개수대, 목욕실의 수쳇구멍, 세탁실 수챗구멍, 베란다의 수쳇구멍. 집의 구조로 보아 들어오는 길을 선제적으로 차단하기에는 구멍이 많아 난감했다. 그래서 일단 쥐 냄새가 나는 곳을 최우선 후보지로 선정하고 미리 잠복하기 위해 이쪽저쪽으로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그런 모습을 보며 집사들은 전날밤 잠자리에서 목이라도 삐끗했다는 듯이 천천히 못마땅하게 힐끔 본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곧 내가 심장이 펄떡거리는 반쯤 살아있는 생쥐를 대령할 테니.'


그렇지만 하늘도 무심하게 냄새의 족적은 끊긴 지 오래된 듯했다. 하물며 한가닥의 털도 발견하지 못했다. 철저한 쥐들이다. 이럴 때일수록 방심을 해서는 안된다. 룰렛게임을 하듯, 어디서 갑자기 좀비처럼 뛰쳐나올 수도 있다. 기다리다 지쳐갔다. 에너지가 넘친 하나의 생명체를 향한 험난한 추격전을 생각했었는데 헛발질로 끝낼 수는 없다. 그래서 할머니처럼 기도도 해봤다. 고양이는 신을 믿지 않지만 한번 해봤다. 나는 생쥐를 기다렸고, 기대했고, 간절히 희망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더라. 기도를 한들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었다. 그러면서 정말 나는 쓸모가 없는 존재인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쓸모없는 존재 하나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한들 아무도 모를 거야. 숲에서 나무 하나 쓰러지든지 말든지 누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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