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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 Oct 02. 2023

'사라진 것들의 대충 연대기'

<7화> 다시 한번 아이로 돌아가기

빅뱅

'너무 어려서 기억이 희미하지만 빛과 시간과 공간과 여러 가지 살림살이들이 머리카락 한가닥도 들어갈 틈 없이 빽빽하게 들어가 있었다. 아니, 응축되어 곤죽이 되어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겨를도 없었다. 가족과 친구를 찾거나 그들의 근황을 알아보거나 내가 누구인지 알릴 틈도 없었다. 당신도 한 번 생각해 보라. 서로 접착제처럼 붙어서 꼼짝 못 하고 찌그러져 있어야 하는 상황을, 서로의 몸이 빠져나오려고 버둥대는 상황을, 끈적거리고 불쾌한 체취가 진동하는 상황을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제 아무리 테레사 수녀가 있다고 해도 서로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가 다행스럽게도 아주 작은 빈틈이 생겨서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는 미친 듯이 격렬한 탈출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갑자기 밝은 세상에 눈을 뜨지 못했지만 그래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자유를 만끽하며 더 멀리, 더 빠르게, 팽창하고, 팽창하고, 또 팽창했다. 그리고 또 팽창하면서 허벌나게 공간을 만들었다. 최초의 한 점에 있었던 가족들을 찾겠다는 생각도 없이 다시 팽창했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겠는가? 그렇게 해서 허망한 비존재의 공백을 채워가고 있다. 가끔 가족과 친구들이 생각날 때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러 볼 뿐이다.'


'사라진 것들의 대충 연대기'는 다음과 같다.


1. 탄생(전율적)

2. 최초 같은 기억(기록적)

3. 집단생활 1(정치적 입문)

4. 집단생활 2(정치적 모색)

5. 집단생활 3(정치적 활로)

6. 해방된 생활(보헤미안적)

7. 자기도취(설레발적)

8. 첫사랑(몽환적)

9. 마지막 사랑(연극적)

10. 스포일러(예언적)


소개(紹介)


그는 생각보다 느낌을 믿는다. 많은 생각이 유발하는 감정의 피로를 꺼리고, 남용되었던 생각을 단념하고 싶어 한다. 믿을 수 없는 기억들, 기억 속 시간들, 기억과 기억사이를 메꾸지 못한 기억들, 기억 속에 새겨진 상상의 이미지를 바닷가 산책길에 동행하여 버려두고 되돌아오기를 바라지만 그 기억들은 밤마다 다시 퍼지며 밀려온다.


1974년

이야기인즉슨 다음과 같다. 폭발과 함께 3억 마리의 경쟁자들은 하나의 알을 만나기 위한 대장정이 시작된다. 계곡과 늪을 통과하며 많은 동료들은 사멸했지만 나머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다시 나뭇가지에 걸리고 찢기고 갈수록 험난한 과정 속에 단 하나의 목표물을 향해 나아간다. 이제 동료는 불과 수백여 마리밖에 없다. 먼저 도착했다고 선택받는 게 아니라 최종선택은 알이 한다. 오로지 한 마리가 운 좋게 알속으로 들어가자 문은 닫히고 모든 경쟁은 끝난다. 남아있던 동료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주변을 서성이지만 곧 최후를 맞이한다. 드디어 무의 광야에 한 알의 존재의 싹이 트고, 38억 년의 진화의 과정을 몇 주 만에 압축하여 완성된다. 드디어 인간의 모습을 갖춰간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어둡고, 하나 가득한 세계는 더 이상 웅크린 그를 가둘 수가 없다. 드디어 한 바탕 울음소리와 함께 거칠고, 차갑고, 현기증 나게 밝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세상에 갓 태어났다. 탯줄도 없이 폐로 숨 쉬고 부력 대신 중력을 느낀다. 그렇게 그는 세상에 던져졌다. 하나의 서사는 시작되고, 어미는 눈물을 흘린다.


1979년

아들집사의 몇 장의 사진을 보았다. 한 장은 흑갈색으로 조색된 그의 유년시절의 사진이다. 내 짐작에, 5살 전후로 추정되는 사진인데 일종의 자긍심과 관련이 있다. 사진 속의 아이는 카메라를 보면서 씩씩하게 웃고 있다. 세상에 겁먹지 않겠다는 배짱 좋은 모습이다. 쪽창으로는 백묵 같은 볕이 들어오고, 볕 속에는 빛나는 먼지들의 춤이 있다. 벽에는 사물들의 사진과 이름이 붙은 커다란 그림이 있다. 그 앞에, 색연필을 단단히 쥐고 있는 아이가 있다.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해, 인간사회 속에 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초유의 세상을 발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젊은 여인이 덜 감은 동그란 털실을 손에 쥔 체, 유별난 애착의 눈빛을 보내고 있다. 먹고사는 근심을 잊게 해주는 달콤한 순간, 그녀는 무얼 생각하고 있었을까?


1981~1986년

초등학교시절의 기억들, 아니, 느낌들. 얼굴과 팔을 간질이는 햇살, 여며진 옷핀이 살갗에 닿아 느껴지는 차가움, 오르내리며 어지럽게 돌던 회전목마, 통학길 버스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꼈던 후련함과 유리창에 멀뚱이 이마를 대고 사라져 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순간, 신발을 벗고 들어간 잔디밭의 간지러움, 뺨이 엄마의 허벅지에 닿는 부드러움과 따뜻함, 육교를 놀이터로 삼아 오르내리던 순간, 자전거 핸들을 잡지 않고 두 손을 벌린체로 몸의 중심 이동만으로 바람을 가르던 순간, 바람 부는 초가을 마당의 펄렁이는 하얀 빨래들의 상쾌함, 풍선의 끈을 잡고 있던 손의 간지러움, 그리고 달아나는 풍선을 넋 놓고 바라보던 순간.


1987~1989년

그 당시는 까닥하면 싸움이 일어났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인가 하면, 덩치가 크거나 힘이 세 보이는 아이가 얕잡아 보이는 아이에게 시비를 걸거나 곯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덩치 큰 아이들은 언제나 고개를 바로 세우고 몸을 곧게 펴고 다녔다. 자신의 존재감을 상대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품새이다. 싸움이 시작하려는 순간, 약해 보이는 아이에게 몇 가지의 선택이 있다. 그놈과의 싸움을 비굴하게 피할 수도 있고, 용기 있게 피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놈과의 싸움을 부모나 선생님에게 말할 수도 있다. 


그는 두렵지만 피하지 않고 스스로 감당하는 길을 선택했다. 자존심을 걸고 하는 싸움이다. 아이들은 모여들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누군가 모욕당하는 구경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어서다. 물론, 그의 선택에는 공포가 함께 있다. 이 세계는 거칠고 잔인하고 격렬한 세계이다. 공기도 다르고, 냄새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세계이다. 둘은 두 팔을 휘둘러 대고 부둥켰다. 입술은 터지고 눈은 멍투성이가 된다.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는다.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힘든 순간이었다. 부당한 힘에 맹목적으로 굴복하느냐,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느냐, 진정한 선택이 무엇이냐를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이다. 피하지 않고 자존심을 세우는 쪽으로 결정을 하는 순간은 무자비한 고통의 시간이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어쨌든, 자신이 한 명의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깨우쳤던 순간임은 맞다. 그 시간 뒤로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폭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학교는 순화된 군대생활이었다. 교장선생님부터 담임선생님까지 이어지는 훈시와 사랑의 매를 가장한 폭력들. 그들은 한결같이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훈시를 시작하고, 이성을 잃고 체벌을 했다. 간혹, 그들은 아이들을 사랑한 나머지 가정방문도 했다. 집에 담임선생님이 방문하는 날, 어머니는 술상을 차리고, 봉투에 아끼던 돈을 챙겼다. 선생님은 거나하게 취해서 갈 때, 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1990~1992년

고등학생이 되면서 미래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 당시, 미래를 바라본다는 건 입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시험 때는 밤을 꼬박 새기도 하였다. 입시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피학적인 경험이다. 다행히 같은 고민을 가진 친구들이 있어 무사히 넘겼다. 그들은 아무리 그가 잘못을 해도 "미안했어"라는 말 한마디로 그의 마음의 빚을 씻어 주었다. 그 시기는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지 돌아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자유니 독재니 민주주의니 정의니, 그것들은 그에게 관련 없는 배경에 불과했다.


비가 내린 어느 날, 그는 택시운전사를 꿈꾸었다. 딱히 어느 날이랄 것 없이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꿈이다. 차 안은 세상의 어수선함을 단절하는 공간이다. 도시는 비에 젖고, 지면에 반사된 불빛은 살아 움직이고, 창문에 맺힌 빗방울 사이로 초점을 잃어버린 불빛은 흔들린다. 빗방울은 투덕투덕 차를 때리지만 그의 몸에는 닿지 않고, 빗속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만 소리는 삭제된다. 


닿을 수 없는 빗방울과 삭제된 소리. 그 후로 인생은 그의 꿈처럼 실체에는 닿지 못하고 모호함 속에 몸을 숨겼다. 간혹 삶의 본질이 그에게 닿을라치면 의도적으로 피해 갔다. 그런 비겁한 모호함에도, 수학을 할 때면 모호함은 사라지고, 어둠 속에 돌연 환한 통로가 나타나는 듯 보였다. 그런 통렬함은 혼자 있을 때 훨씬 더 강렬하고, 순수했다.


1993~1996년

대학에 들어가면서 많은 생활의 변화가 생겼다. 우선 부모에게 모든 일에 설명을 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났다. 환호 작약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일어나고, 자고, 집에 무시로 드나들고, 섣부르게 찧고 까불었다. 강의시간의 변경이나 휴강, 아니면 동아리 활동, MT라는 수많은 변명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대학에서의 학문탐구는 존재한 바 없고, 미지의 이성과 친구에 대한 호기심에 기울어져 있었다. 허구한 날, 바람난 고양이가 집 나가듯 길거리를 허세 덩어리 친구들과 배회했다. 술집도 드나들고, 성인영화도 자유롭게 보았다. 쾌락으로 연결하는 문을 통과할 때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매캐한 냄새와 야릇한 환희를 느꼈다. 지금까지 꾹 눌려왔던 것들이 부풀어 올라 자유롭게 떠 다녔고, 쇼윈도에 보이는 그의 표정은 전보다는 밝아 보였다. 막연한 행복을 느꼈다. 그와 같은 자유를 느낄 거 같은 여자도 더러 만났다. 그렇지만 매번 그녀의 손을 잡을, 입맞춤을 할 절호의 찬스를 놓쳤다. 그녀가 허락하는 때를 눈치채지 못하고, 눈치를 채도 적절한 말을 찾아내지 못해 입술은 얼어버렸고, 두 볼은 붉어졌고, 이내 그녀의 눈초리는 실쭉해졌다.


1994년

그가 살고 있는 동네는 따분한 곳이다. 도심에서 떨어진 변두리라는 이유가 가장 크다. 눈에 띄는 익숙한 것들은 흥을 떨어뜨리고, 상상력은 얼어붙었다. 그에 반해 신촌은 달랐다. 무슨 일이 생길 거만 같은 낭만적인 도시였다. 그 일은 열광과 감동의 순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 상상의 순간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아름다운 한 소녀를 우연히 만나, 어떤 반짝이는 행동에 그녀의 호감을 사고, 애틋한 사랑 끝에 결실을 보는 형태이다.


그날도 스포츠신문을 사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상상했던 눈부신 영혼이 있었다. 그녀만이 도드라지게 시야로 다가오고 다른 사물들은 뒤로 물려났다. 그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바로 그가 찾던 그녀라고. 순백의 상쾌함이 불어왔다. 가슴이 떨렸다. 그녀에게서 거리를 둔 채 흘깃 곁눈질하며 그녀와의 앞날을 생각했다. 그 앞날은 모든 낭만적인 것들이 두루뭉술하게 압축된 형태이다. 그것도 잠시, 그녀 옆으로 속 빈 강정처럼 허우대만 멀쩡하게 보이는 놈이 다가왔고, 둘은 다정하게 말하며 사라졌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미소 지을 때 제멋대로인 치아가 볼만했던 거 같다.


그때부터인가, 변함없이 지속되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의 감정들은 항상 어딘가로 향해 있었다. 예컨대, 상대방의 미세한 표정의 움직임을 놓치지는 않지만 그에게 귀를 기울이며 속으로는 딴생각을 했다. 속이 깊은 아이예요,라고 선생님들은 말하곤 했다. 맞는 말이다. 어찌나 속이 깊은 지 그 속을 볼 수가 없을 정도다.


1998년

오스카 와일드는 '삶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사랑을 얻지 못하는 비극, 또 하나는 사랑을 얻는 비극'이라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를 알 수 없던 시절에 한 여인을 만났다. 아직까지도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첫사랑이다.


카세트에 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넣는다.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이다. 수화기를 든다. 긴장된다. "호출은 1번, 음성 녹음은 2번, 부가서비스는 3번을 눌러 주세요." 3번을 누른다. "삐! 음성 확인은 1번, 인사말 녹음은 2번, 비밀번호변경은 3번을 눌러주세요." 2번을 누른다. "비밀번호를 눌러주세요." 0000을 누른다. "삐 소리가 나면 인사말을 남겨 주세요." 젭 싸게 카세트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조심스럽게 전화 수화기를 카세트 스피커에 댄다. 숨죽인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 걸..." 무사히 일을 마친 거 같다. 수화기를 들어 012 354 **** 를 누른다. 성공이다. 이제 그녀의 삐삐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언젠가 그녀에게 1004나 486을 보낼 순간을 상상해 본다. 기분이 들뜬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나 감정이나 중요도에 따라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다. 인생의 무상함을 말할라치면 길어질 필요가 없다. 단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를 밝혀두면 그것 이상 무상함을 나타내는 표현은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새로운 무언가도 첨가되지 않는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라면 상황이 다르다. 따지고 보면 살면서 추구한 목표는 여성과 관련된 것이 많다. 그때는 젊었기에 그랬더랬다. 


그녀를 첫 직장인 학원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를 지나칠 때는 흥분되고, 놀라웠다. 지나친 후에도 그의 마음은 그녀 옆을 같이 걸어갔다. 그녀는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남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아름다움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그 아름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루만지고, 입맞춤을 하고,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을 자연스레 불러일으킨다. 그냥, 도시 한 복판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수컷들의 눈길을 끌고, 심장박동을 빠르게 하고,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볼멘소리를 나오게 한다. 그는 적어도 그렇게 보았다. 게다가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정신의 성장을 멈춰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와는 같은 학원에 있었기에, 우연히 마주친 아름다운 여자가 미처 말을 걸기도 전에 떠날 일도 없고, 몇 분 후 카페를 나서면 운명의 그녀를 영원히 잃어버릴 염려도 없었다. 단지 학원 내 다른 수컷들의 동향을 관찰하고, 그녀에게 비칠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불안한 탐색을 하면서 그녀에게 다가갈 기회만 엿보면 된다. 남자들이란 게 어떤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면 그녀와의 인연을 위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별의별 짓을 다하기 마련이다. 어쨌든 그녀와의 만남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는 여러 번의 별의별 짓과 우연이 깃들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우연을 가장한 우연이 맞을 거다. 설명하자면 이런 거다. 출근길에 그녀를 만난다면, 그녀가 꽤 멀리 보일 때 난데없이 그는 골목에 등장한다. 그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처럼 학원에 출근하는 거라 생각할 무렵, 그는 그제야 뒤처져 오는 그녀를 발견했다는 듯이 놀라며 걸음을 멈춘다. 함께 걸으며 즉흥적인 것 같은 대화를 시도한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들끼리 나누는 듯한 대화만 오고 가지만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며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어찌 보면 수준 낮은 삼류소설처럼 보일지라도 그에게 그녀는 삶의 악보를 내림표에서 올림표로, 다시 올림의 도돌이표로 만든 여인이다. 그녀와의 체험은 풍부한 화음으로 공명을 일으켰다. 그 공명은 한쪽이 한쪽을 완전히 지지해 주는 화성법이 아니라 독립된 생명을 가진 선율이 동시에 울리는 대위법의 형태이다. 그의 모든 감각은 그녀를 향해 튀어 오르고, 가슴과 눈에 그녀를 달고 살았다. 그녀로 인해 인생의 배경이 갑작스레 바뀌었다. 같은 재료와 같은 문제로 이루어졌던 그의 삶이 그녀라는 새로운 변수를 만나 변주되었다. 그런 그녀와 헤어지기까지는 1년이면 충분했다.


불현듯 낯 모를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의 사랑이 이룰 수 없는 꿈에 기초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기대했던 사랑이 꿈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사랑의 끝도 이룰 수 없는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2010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 결정하는 요소는 분명히 있지만 딱 뭐라고 꼬집어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을 때가 있다. 그녀와 사귄 후, 어느 늦은 여름날 해변가를 거닐고 있었다. 그녀의 옷은 바람에 날리고 물결은 그의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그의 이마에 내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찍어냈다. 그는 갑자기 기분이 평온하고 야릇해졌다. 어떤 다른 차원으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그녀가 다가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볼 때면 느닷없이 웃음이 나오고 손발이 꼼지락거리고 몸은 간질거리고 피는 심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때, 그녀와 결혼을 생각했다. 당시에 그가 이 감정에 대해 얼마나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랬던 그녀에게 그의 말은 닿지 않고, 그녀는 언제부턴가 '이상적이다', '낭만적이다'라는 말로 그를 표현했다. 그녀에게 이상적, 낭만적이라는 말은 현실성도, 요령도 없다는 말이다. 그도 자신이 요령이 없다는 것은 안다. 도대체 남들은 요령을 어디서 배워오는지 궁금했다.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바뀌고, 그녀의 침묵 속 의심스러운 모호함이 감지된 후 헤어졌다. 증오와 혐오와 분노에 찬 말싸움 없이 말이다. 물론, 대화는 비어 있었고, 서로에게 자신들의 자리가 없는 듯한 기분을 느끼긴 했었다. 헤어지는 순간, 혐오감과 욕망을 동시에 느꼈다. 물론 불안한 직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알 수 없는 표정과 진심을 가늠할 수 없는 야릇한 눈빛이 두 눈에 배어 있을 때는 당혹스러웠다. 그 순간은, 가슴에 싹트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어슴푸레 느껴서 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 눈길을 마주쳤을 때 내 시선을 느꼈던지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 눈길은 설명하기 힘든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어찌 차가운 그녀 눈 뒤에 감춰진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떠나지 마라, 하소연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겨울밤 철문의 냉기가 그녀에게 느껴졌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산책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단다. 어쩌란 말이냐, 이젠, 그에겐, 그녀에게 걸맞은 새 이름을 지어줄 마음도 없고, 그의 상상 속에 그녀를 채우기도 싫고, 그녀의 눈가에 붙어있는 머리칼을 떼어줄, 그녀의 엉킨 머리칼을 풀어줄, 손이 없다.


2034년

그의 마지막 소설인『소설들』집필 중 세상을 떠남. 그는 마지막 순간 둘러싼 사람을 향해 한 팔을 들어 올렸다가 이내 떨어뜨렸다. 그리곤 떨리는 눈을 감았다. 유언에 따라 화장되고, 재는 교외의 산에 뿌려졌다.


관 속에서 그의 영혼이 소리쳤다. "나는 아직도 끝내지 못한 일이 있어, 그것도 두 가지씩이나. 하나는, 끝내지 못한 소설과 두 편의 희곡을 완성하는 일이고, 또 한 가지는, 열광적인 타인들 앞에 서는 일이야!"


무대 한가운데를 비추는 조명의 빛줄기는 계속 빛을 달리하고 , 뒤로는 클라이맥스를 담당하는 기타, 곡의 중심을 잡아주고 음색을 풍부하게 만드는 베이스, 리듬과 흐름을 관장하는 드럼, 곡을 화려하게 만들거나 곡의 음색을 바꾸는 키보드 세션이 있고, 그는 티셔츠 단추를 세 개 정도 풀어놓은 체 그들 가운데에 서있다. 그렇다, 락밴드의 보컬이다. 무대의 불빛 속에는, 움직임이 과한 기타와 건방지듯 살짝 리듬만을 타는 듯한 베이스 그리고 힘이 넘치는 드럼과 건반 위를 빠르게 움직이는 키보드가 하나가 된다. 유대와 친밀감을 느낀다. 잠시 후, 조명은 무대가운데를 비추고 그와 음악만이 남는다. 열광적인 보컬의 목소리가 관중들을 흥분시킨다. 팬들은 숨을 죽이다가 곡이 끝나자 함성을 질러대며 그의 열정에 답한다. 자신의 삶에 동의하지 못한 그의 두 번째 꿈이다. 


"이왕지사 이렇게 죽음을 맞이했으니 나를 위해 노래한 곡 들려다오. 내 젊은 시절의 노래 'Radiohead'의 'Creep'으로. You're so fuckin' special. But I'm a creep(넌 존나게 특별해. 하지만 난 병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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