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 Oct 02. 2023

지워지지 않는 '1'

<5화> 누나 집사와 형아 집사

누나 집사는 몸을 뒤척이며 빛이 나오는 직사각형을 들여다보고는 한숨과 함께 침대 한켠에 던져 놓는다. 잠시 후 다시 직사각형을 들여다 보고 다시 내려놓는다. 누군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든지 아니면 무슨 사달이 났는지 다가가 화면을 본다. 직사각형의 화면에는 형아집사의 얼굴과 지워지지 않은 '1'자가 화면 가득이다. 정확히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누나집사와 형아집사가 어쩐지 남처럼 느껴진다. 내 눈치가 틀림없을 거다.


누나집사는 스무 살이 되면 세상이 '짜잔'하고 환상적으로 바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수액이 체내에 한 방울 한 방울 흘러가듯 나이가 들어 이제 이런저런 걸 알 만큼 나이가 들었다. 그렇지만 누나집사는 아무리 동생을 이해하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아마 동생도 마찬가지 일거다. 설령, 서로에 대해 부분적으로 이해한다 해도 그건 존재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앞으로도 결단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녀를 흘끗 보았다. 어둑한 불빛 속에서 그녀의 옆모습이 보였고, 그녀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 빗방울 몇 개가 망설이는 듯 바람에 날려 창문에 부딪쳐왔다. 그녀에게서 뒤엉킨 양면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자신이 청승맞아 보이는 게 싫은 누나집사지만 지금은 청승맞게 보인다. 카톡, 소리에 그녀는 다시 직사각형을 확인하고 실망한 듯 내려놓는다.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본 사람처럼 시선을 재빨리 다른 데로 돌린다.


인간들의 목소리는 잊히고 글자로 서로의 마음을 전한다. '카톡'이라는 소리는 누군가가 상대방을 향해 '여기 있음'을 알리는 소리이다. 소리를 듣는 순간 미지의 상대방을 예측한다. 처한 상황에 따라 설렘, 반가움, 귀찮음, 무관심의 감정이 교차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설렘과 반가움이 앞서겠지만 이별을 생각하고 있다면 귀찮음과 무관심으로 시큰둥하다.


호의든 적의든 상대방을 확인하는데 약간의 시간 간격을 둔다면, 쉽게 말해 뜸을 들인다면, 뭔가 의뭉스럽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는 게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서로 마주 보고 얘기할 때는 상대방이 자신의 표정을 보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말한다. 상대방 말의 진실됨을 그의 눈빛, 표정, 몸짓으로 판단한다. '카톡'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확인하면 상대방에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마음을 들킨 거 같다. 상대방에게 마치 발가벗겨진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현재의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반대로 상대방에게 전송과 동시에 떠있는, '지워지지 않은 1'자를 보게 되면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자신의 애틋한 마음이 상대방의 문 앞에 가로막혀 그가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고 서성대는 느낌이다. 그것도 아주 초조하게. 문 앞에 굳은 표정으로 완강히 서있는 '1'이라는 수문장은 요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지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상대의 배려에 감사해한다. 그러고 나서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해 궁금해한다. 마음의 동요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읽고 답장이 없으면 이유를 추측하고 과대망상에 빠진다. 좋게 해석해서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하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불길하게도 그의 속내를 알고 있다. 자신은 그에게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물론, 억지로 달리 생각할 수는 있다. '많이 바쁜가?' '배터리가 없나?' '내가 잘못한 게 있나?' '핸드폰을 분실했나?', '마음이 변했나?', '전화번호가 바뀌었나?', '나를 차단했나?' 아니면 '말하기 싫다는 건가?' 등 수많은 추론으로 질식할 수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어쨌든 버림받은 느낌이고 급기야 상대방의 예의 없음에 분노한다. 시간이 지나서도 아예 읽지도 않으면 '왜 읽지도 않을까?' 하고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손에 일도 잡히지 않는다. 체한 거 같기도 하다. 긍정적으로 굳이 생각하면, 최악의 결과보다는 불확실성이 낫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아직 읽지 않아 내 생각이 봉인된 상태로 멈춰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읽고 답장이 없든, 아예 읽지도 않든, 모두 미묘한 기싸움이고, 고도의 심리전이고, 권력관계까지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끝은 아니다. 또다시 갈림길에 서게 한다. 다시 보내는 것에 대해서다. 다시 보내기에는 자존심이 상하고, 다시 무반응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다. 마치 '판옵티콘의 감옥' 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보이기만 한 처지에 놓인 거 같아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문자를 보내고 나서는 발신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다음 몫은 수신자에게 있고, 그의 처분만을 기대해야 한다. 부당하다. 부당함은 내가 부여한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더해져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를 야기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어떤 것의 이면을 보아 달라는 것도 아닌데도 문자를 보냈다는 원인제공으로 사후처리까지 책임져야 한다. 마치 공을 던지고 나서 순간순간 공이 어디쯤을 날고 있는지 매번 예측을 해야 하고, 어느 곳에 떨어졌는지 신경을 곤두서야 하고, 떨어진 결과도 보낸 사람의 몫이다. 다른 사람의 의도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를 쓰는 게 싫지만 발신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언제부턴가 누나집사와 동생집사는 대화도 없고, 카톡에는 '지워지지 않은 1'이 꼿꼿하게 서있다. 둘의 불화는 생각보다 깊다.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점점 멀어지는 걸 지켜보고만 있다. 가족들의 몇 번에 걸친 설득은 유효기간이 지나 약효도 없고, 이제는 둘 사이의 틈을 메울 방법도 알지 못하고,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도 사라졌다. 그렇게 됐다. 각자 나름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어떤 시도는, 곧바로 감정의 찌꺼기에 신호를 보내 잊혔던 분노를 차오르게 했다. 이제, 그들은 서로 감정의 차오름을 피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잠들어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어떤 대화도 거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어떤 일에도 무관심하는 것이다. 이 일은 내가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가장 흔한 일이라 새삼 확인하는 것이 더 놀랍다. 행복한 가족은 밥 먹는 장면만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식사를 언제 같이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뭐, 어차피 같이 모이면 어색하고 시선처리도 되지 않을 텐데 잘 된 것 같기도 하고.


모두가 어떤 시기를 지나는 것처럼, 그들도 마찬가지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라는 말만으로 그 시간을 관통하는 사람에게 힘이 될 수는 없다. 다만, 희망적인 것은 그들의 관계는 아직 미결정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운이 좋다면 그런 상황을 벗어나 마음의 고통이 결국 사라지는 순간을 기대할 수도 있다. 설령, 기대에 어긋나더라도 그들의 선택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간혹, 사람만큼 어리석은 존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뻔히 결과가 예측이 되고 기어코는 후회할 일을 저지르고 만다. 항상, 때가 되면, 좋은 기회가 오면,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는 야무진 희망을 저버리지 못한다. 그러다 버릇처럼 회피의 장막 뒤에 숨어 있다가 이미 때가 늦음을 알고, 회한에 젖는다. 뭐, 행위의 결과는 무언가 일어난 후에 나중에야 아는 것도, 그저 다 인간의 행위이니 인간적이라 생각하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