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당연한 줄 알았던 것들이 멀어질 때

1부| 마흔에는 서울 자가에 정장 입고 일할 줄 알았다

by 영초이

20대의 나는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하루하루를 축제처럼 살았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숙취로 느지막이 출석했다. 수업이 끝나면 컵라면으로 속을 달래고 다시 술집에 모여 피시방으로 향했다. 마지막은 늘 순댓국이었다. 고추기름과 청양고추를 잔뜩 넣어 시뻘겋게 끓인 국물을 떠먹고 나면 더 이상 술이 아쉽지 않을 만큼 취해 있었다. 주변 모두가 그렇게 살았기에 그것이 당연한 캠퍼스 라이프인 줄 알았다.


그렇다고 마냥 흘려보낸 시간만은 아니었다. 시험 3주 전부터는 기숙사 책상에 붙어 앉았고, 1주 전부터는 하루 세 시간씩 자며 밀린 전공을 몰아쳤다. 벼락치기가 이상하게 몸에 맞았다. 그때는 그럴 체력이 있었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어느 날 대학원 선배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지금 돌아보면 겨우 20대 중후반이었을 그 선배들은 비싼 안주를 거리낌 없이 시키고 생맥주를 물처럼 비워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어른처럼 보였다. 몇 번의 만남 이후, 나도 선배들과 술 모임을 이어갔다. 어느 날은 캠퍼스커플을 많이 배출한(?) 학교 앞 작은 술집에서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그날은 이상하게 빨리 취하는 날이었던 것 같다. 어느 한 선배에게 대학원과 취업 사이에서 헤매던 고민을 털어놓았다. 벼락치기 공부가 전부였지만 전공 공부가 재밌다는 생각을 한 때였다. 이 일이라면 평생 해도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전부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음 날 점심, 그 선배에게 메시지가 왔다. "오늘 오후에 연구실로 좀 와봐." 그 짧은 문장을 보는 순간 어젯밤의 대화를 더듬었다. 괜히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긴장하며 연구실을 찾았다. 선배는 나를 교수실로 데려갔다. 그 짧은 면담이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학부연구생이 되었다.


2학년 2학기, 그 선택 하나가 지금까지 이어졌다. 박사 학위와 연구소, 그리고 현재 몸담고 있는 직장까지 눈 깜짝할 새 흘러왔다. 그 시작은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단순한 호기심을 술자리에서 내뱉던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막연히 믿었다. 박사가 되면 30대에는 대기업 본사로 출근하고, 마흔에는 서울 자가에서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될 거라고. 그것은 목표라기보다 당연한 미래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근사한 이미지를 연료 삼아 첫발을 내디뎠다.


그래서 나는 2026년에는 내 삶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을 줄 알았다. 몸에 잘 맞는 정장을 입고 출근하면 일을 프로페셔널하게 처리하고, 매월 지급되는 월급은 생활을 넘어 가격표를 안 보고도 원하는 것을 사게 하며, 두툼한 통장이 미래의 불안을 잠재워주는 상태일 것이라 상상했다. 정확히 말하면 상상이 아니라 그게 내 인생의 기본 옵션인 줄 알았다. 박사 학위를 따고 괜찮은 회사에서 오래 버티면 자연스럽게 지급되는 보상 같은 것 말이다. 마흔은 마땅히 완성형이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그림과는 꽤 다르다. 대신 다른 방식의 만족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조건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 눈앞에서 제품이 구현되는 순간의 쾌감, 사이드 프로젝트로 본업 외에 돈을 버는 경험까지 그 자체로도 흥미로웠다. 그 만족감을 동력 삼아 데이터로 사람을 설득했고, 숫자 하나를 맞추기 위해 밤을 새웠다. 생산 라인을 통째로 폐기해야 했던 사고와 예측할 수 없던 변수들 속에서도 그 과정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나는 나름 성실한 플레이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삶의 만족과 현실의 조건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연차는 쌓였지만 자산은 제자리 혹은 마이너스였고, 직급은 바뀌었지만 연봉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책임은 넓어졌는데 권한은 줄었다. 전문성은 분명해졌지만 회사 문을 나서는 순간 나를 설명하는 일은 늘 어려웠다. 특히 이름도 생소한 벤처 회사에서는 더욱 그랬다. 요즘은 다니는 회사 이름만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는 시대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매번 짧은 브리핑을 통해 설명해야 했다. 박사라는 타이틀만이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내 지식수준과 능력을 방어해 주는 유일한 보루였다.


회사 안에서도 같은 상황이 이어졌다. 숙련된 인력은 대체되지 않을 거라 믿었지만 조직은 언제든 재편되었다. 짧은 회사 생활 중에서 바뀐 내 직급과 직책10번이다. 명함 속 이름과 전화번호는 그대로인데, 그 밑의 직급과 직책은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빠르게 오르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았다. 서른 초반까지도 간간이 들려오는 집들이와 승진 소식은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서울 자가는 멀어졌고, 정장은 불편해졌다. 한때 내게 있어 정장은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면접장에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앞으로의 기대감에 설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 정장은 내 실무와 상관없는 복장이 되었다. 중요한 발표 자리에서 정장을 입을 때면 맞지 않은 옷처럼 거북하고 불편할 뿐이었다.


서울 집은 더 솔직했다. 연구 데이터의 숫자는 노력으로 올릴 수 있었지만, 서울의 집값은 내 성실함과는 다른 세계의 언어로 움직였다. 아무리 그래프를 그려봐도 연도별 부동산 가격 추이보다 의미 있는 곡선을 그릴 수 없었다.


내가 믿은 마흔 살의 기본 옵션은 시스템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 선택된 자들만 거머쥐는 매우 비싼 입장권 같은 것이었다.


지금에야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망한 것도, 성공한 것도 아닌 그 애매하고 불안한 지점에 멈춰 서 있다. 비교 따위 하지 않는 단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마흔의 문턱에서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 20년의 데이터와 기록들이 자동으로 마흔에 완성된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시간을 쌓는 것과 방향을 잡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렇지만 기본 옵션이 없다는 걸 인정하자 오히려 조금 가벼워졌다. 서울 자가가 자동 지급되지 않는다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 그래서 지금은 애물단지가 된 회사 근처 작은 집을 샀다. 정장이 성공의 상징이 아니라면 굳이 그 틀에 나를 맞출 필요도 없다. 이제 내게 정장은 연례행사일 뿐이다. 회사 직함이 전부가 아니라면, 내가 가진 이 애매한 경험과 기술들을 나만의 바구니에 담아보면 그만이다.


우연한 기회에 내 연구와 기록들을 정리해 강연할 기회가 생겼다. 대중 앞에서 내 연구 결과와 그때의 경험을 처음으로 꺼내 놓았던 날, 그 떨림 뒤에 찾아온 삼십만 원 남짓의 강연비는 생각보다 짜릿했다. 회사 시스템이 만들어준 수익이 아니라 오직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시장에서 화폐로 치환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회사에서 보장하는 월급과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가치였다. 그 돈은 오직 나라는 사람에게 지급된 첫 수익이었다.


나의 경험과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닿는 하나의 상품이 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그때 이후로 나의 이야기와 브랜드를 파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사고의 전환이다. 근사한 시스템의 부품이 아닌 퍼스널 브랜드로서의 나를 정립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이제 내게 마흔은 완성이 아니라 전제를 의심하며 다시 정렬하는 출발선이다. 기본 옵션이 없다는 사실은 서글프지만, 동시에 내 판을 다시 설계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의 지금 애매한 상황을 정리할 만큼의 충분히 애매한 경험도 갖고 있다. 마흔, 이제야 겨우 내 인생을 설계할 준비가 되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멀어질 때 비로소 묻게 된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마흔이 되어서야 나는 그 질문을 제대로 내게 던져보았고, 이제는 그 질문에 답하며 살아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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