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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이 Jul 15. 2023

8번의 소개팅

  사실 마음에 둔 여자가 있음에도 소개팅을 8번이나 했다는 건 비난받아 마땅할 일이다. 지금의 아내에게는 물론이고, 소개팅을 했던 상대들에게도 매우 신사적이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선 나 또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굳이 핑계를 대자면 당시의 나로선 차마 거부할 수 없었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아내와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내던 시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폰 화면에 나타난 발신인의 정체는 [행정부장]이었다. 당시 특수전 교육단(현 특수전 학교)에는 주요 직위자 4명이 있었는데, 부대장이었던 교육단장(준장 / 원스타)과 학생단장(대령), 교수부장(대령), 행정부장(대령)이 그들이다.

  당시 학생 단장은 군대에서 가장 무섭다던 계급, '장포대'(장군 진급을 포기한 대령)로 부대장과 기수가 같거나 높은 이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미 진급의 기회가 끝나고 30여 년간의 군생활을 마무리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부대의 실세'라기보다는 '부대의 어른'으로 대우를 받고 있었다. 반면 교수부장과 행정부장은 아직까지 장군 진급의 기회가 남아있는 실세 중의 실세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중 한 명인 행정부장이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 본인의 집무실로 나를 호출한 것이다. 직속상관도 아닌 행정부장이 무슨 일로 나를 호출한 것인지, 게다가 참모를 통하지도 않고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 호출했다는 것이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숨도 안 쉬고 행정부장실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부대의 실세 중의 실세, 행정부장과 내 직속상관이었던 교수부장까지 함께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조카(친 누님의 딸)를 만나보라는 행정부장의 말에 차마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분명 행정부장의 누님은 부대에 괜찮은 남자가 있으면 소개 좀 시켜 보라고 했을 것이다. 행정부장은 미혼에 여자친구가 없으며, 짐승보다는 사람과 가깝게 생긴 대위 중 한 명을 찾았을 것이고, 교수부장의 추천으로 결국 나를 간택한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여자친구가 있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분명 내 모든 뒷조사를 끝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싫다는 말을 할 수도 없다. 직속상관인 교수부장의 입장이 곤란해질 테고, 행정부장은 한 번 만나보지도 않고 감히 자신의 조카를 거부한 나를 곱게 볼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결국 난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아내와의 만남 이후 첫 소개팅을 하게 되었고, 이후 7번이나 더 소개팅을 하게 된다.


  첫 소개팅 상대의 집은 포항이었다. 근무지였던 경기도 광주에서 편도로 4시간 이상이 걸렸다. 정말 가기 싫었다. 하지만 내 평화로운 군생활을 위해선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포항까지 내려가 점심 식사를 하고, 공원을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저녁 식사까지 함께 했다. 그리곤 집까지 데려다주고 인사를 하는데, 그녀가 내가 이런 말을 했다. "사실 전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사람을 처음 만나봐요. 술, 담배 끊고 교회를 다니셨으면 좋겠어요."

  난 당장이라도 그만 만나자라고 말하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술, 담배를 끊고 교회를 다니라는 걸 보니 조금 더 만나 보자는 것인데, 어찌 행정부장의 조카를 내가 먼저 찰 수 있겠는가? 그날부터 난 술과 담배를 끊었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주말마다 만나는 행정부장은 나를 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보다 더 부담스러울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두 달간 술과 담배를 끊고, 교회를 다니면서 포항에 3번이나 더 다녀왔다.


  나 또한 그녀가 싫지만은 않았다. 순수했고, 배려심이 깊었다. 다만 날 자신이 만든 틀 안에 자꾸만 욱여넣으려 하는 모습에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내게 교회에 잘 다니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며, 다음부터는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요약해서 자신에게 얘기해 달라고 한다.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순간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말았다.


  다행인 건 행정부장이 얼마 후 타 부대로 전출을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행정부장이 또다시 나를 호출했고, 두 번째 소개팅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행정부장은 자신이 예전에 모시던 상관의 딸이라며 내게 만나보길 권했다. 군인을 사위로 두는 것이 소원이라던 그분. 주변에서도 내게 "넌 그분 딸이랑 결혼하면 땡잡는 거야!"라며 나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난 그렇게 또 소개팅 자리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소개팅녀, 그녀의 첫인상은 너무 다소곳하고 차분해 보였다. 내가 하는 썰렁한 농담에 얼굴을 돌리고 피식피식 웃는 그녀가 나 또한 싫지 않았던 듯싶다. 게다가 다행히 집도 서울이었고, 술도 마셨으며, 교회도 다니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의 만남을 이어가던 중 어느 날 새벽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술에 취한 목소리로 꼬장을 부리기 시작하는 그녀,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날이 많아졌고 난 참지 못하고 또다시 이별을 통보했다. 그리곤 숙소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부대 당직사령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자 한 명이 위병소에서 나를 찾으며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나가보겠냐고 했다. 난 지금까지의 사정을 이야기했고, 당직사령은 알겠다며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결국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내 추측은 이렇다. 그녀의 아버지는 장교 출신에 당시 대기업 상무였으며, 여동생은 서울대학병원 의사였다. 그녀는 웨딩플래너 일을 하고 있었는데, 스스로를 미운오리새끼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녀가 부모로부터 인정받는 방법은 아버지가 너무나 좋아하는 군인을 만나 결혼하는 것뿐이라고 마음을 먹은 듯싶다. 그런데 내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많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늦은 밤 술을 먹고 내게 술주정을 한 것은 아닌지, 헤어지자는 말에 부대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리던 그녀. 한편으로 미안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늦기 전에 잘 헤어졌다는 생각을 했었다.


    세 번째 소개팅 상대는 동기였던 간호장교의 고향 친구였다. 지금의 아내에게 계속하여 거절당하는 내가 불쌍했는지 간호장교는 자신의 친구라며 한 번 만나보라고 했다. 당시에는 소개팅이 썩 내키지 않았고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아내에 대한 서운함이 컸던지라 질투심이라도 갖게 해 보자는 생각으로 소개팅에 응했던 것 같다.  

  그녀는 나를 만나자마자 내 SNS를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 회사 동료들에게도 엄청 자랑을 했다며, 매우 적극적으로 내게 호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당시 난 그녀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소개팅 마지막 순간까지 아내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국 집에 데려다주며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요."라며 말 끝을 흐리는 내게, 그녀는 "그럼 서로 마음에 안 들어서 헤어지는 걸로 해주세요. 제가 너무 창피해서요."라고 했다. 얼마나 미안했던지 귀까지 빨개졌던 기억이 있다.   


  네 번째 소개팅 상대는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여군 부사관의 동기였다. 아내 때문에 혼자 힘들어하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자신의 동기 중 가장 인기가 많던 여군을 내게 소개해주었다. 그 여군은 특전사 안에서 모르면 간첩이라 생각될 정도로 유명한 여군이었는데, 특히나 미모가 상당했다.(특전사 내에 팬클럽이 있었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다.)

  세상에 좋은 여자는 많으니 걱정 말라며 위로해 주던 여군, 그 여군에 대한 고마움과 소개받게 될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또다시 나를 소개팅 자리로 이끌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특전사 모든 남군들의 칭송이 자자한 것일까?

  그녀와의 소개팅은 너무나 평범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연극을 보고, 집에 데려다주었다. 물론 군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에 식사 자리나 차로 이동하는 동안 편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음날 출근과 동시에 사무실의 여군이 웃으며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동기한테 어제 전화 왔었는데, 지금까지 자기가 만난 남자 중에 제일 특이했었답니다." 아마도 다른 남자들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엄청난 노력들을 했을 것이다. 매거진의 5편에서 얘기했던 여군, 그것도 미모를 겸비한 여군을 만난다는 건 로또에 당첨된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아내에게 마음을 뺏겨버린 내게 그녀는 그저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던 것 같다. 그렇게 자신을 그저 평범한 여자로 대한 내가 분명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혹시 '너 따위가 감히?'라고 생각하진 않았을지 모르겠다.

  

  같은 사무실의 여군 부사관은 히든카드였던 자신의 동기에게도 내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자 오기가 생겼는지 폭풍 소개팅을 주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소개팅이 이루어졌다.

  다섯 번째 소개팅 대상은 인천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여자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사업을 시작하여 젊은 나이에 엄청난 자산가가 된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대단했다. 그래서인지 지금껏 연애다운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처음 본 그녀는 큰 키에 늘씬한 몸매, 모델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옷가게를 해서인지 패션 감각도 남달랐으며 쾌활한 성격에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멋진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와 두어 번의 만남을 이어가던 중 부대에 중요한 훈련이 있어 일주일 정도 연락을 못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난 당시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서로를 알아가는 가벼운 만남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먼저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어설픈 작업질을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빴는지, 일주일이나 연락을 안 해서 자신이 마음에 안 드는 줄 알았다며 오해였다 말하는 내게 차갑게 이별을 통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나볼 생각이 있느냐며 연락을 해온 그녀, 하지만 그땐 나도 그녀에 대한 감정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여섯 번째 소개팅은 사무실 여군 부사관이 이라크 파병 중에 인연을 맺은 여군 대위와 했었는데, 오히려 나보다 더 군인다웠다. 여자라기보다는 그저 군대 후배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아 첫 만남 이후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일곱 번째는 군대 동기가 소개해준 여자였는데, 그녀도 나와 같이 따로 마음에 둔 남자가 있었다. 소개팅하는 동안 서로 마음에 둔 사람들에 대한 뒷담화를 하고, 고민을 상담해 주는 시간을 가졌다. 헤어지기 전엔 맥주를 마시며 서로 마음에 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보자고 파이팅을 외쳤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 여덟 번째 소개팅은 대학 후배의 소개로 만나게 된 여자였다. 후배가 노량진 고시촌에서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알게 된 누나라고, 너무 착한 누나라며 한 번 만나보길 권했다. 당시에는 후배도 경찰이 되어있었고, 그녀도 9급 공무원에 합격한 상태였다.

  약속을 정하기 위해 먼저 연락을 했고, 그녀는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려준 뒤 친한 언니와 함께 나오겠다며 내게도 친구와 함께 나와달라고 얘기했다. 난 한 번 알아보겠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부대 업무를 마치고 약속 장소로 향하는데 차가 너무 많이 밀렸다. 일부러 30분 정도 여유를 두고 출발했음에도 결국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게다가 2:2로 만나기로 한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식당에 들어서니 둘은 먼저 식사를 하고 있었다.(이동 중에 늦을 것 같다고 먼저 식사하고 계시라고 했다.) 뒤늦게 혼자 나타난 나를 보고 같이 나온 '언니'는 기분이 많이 상했는지 소개팅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난 그 '언니'의 방해로 인해 소개팅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조차 없었다. 공무원에 대한 자부심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자신을 1등 신붓감이라 자랑하는 그 '언니'.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던 내 말에, 괜찮다며 안녕히 들어가시란다. 그렇게 난 소개팅녀의 '언니'에게 무참히 차여 버렸다. 


  2년간 여덟 번의 소개팅까지 실패하자 더 이상의 소개팅 기회는 없었다. 나도 포기했고, 주변 사람들도 포기했다. 그런데 얼마 후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아내가 소방관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난 그 소식을 듣자마자 아내에게 축하한다고, 고생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아내에게 답장이 왔다. "같이 밥 먹을래요?" 드디어 아내가 내게 마음을 열게 된 것일까?


  다음 편에선 아내가 소방관이 된 이야기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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